조선의 양반집, 안동 내앞마을
[목수의 옛집 나들이 ] 올 여름에는 의성김씨 종택 한번 와 보시라
    2013년 06월 10일 10: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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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내앞마을

안동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앞의 글에서 6·10 만세 운동의 기획자 권오설, 조선공산당 초대 비서 김재봉,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선생의 고향마을과 옛집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의성김씨가 오백여 년 살아온 동네, 백여 년 전 만주벌 호랑이라 불리던 김동삼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치열하게 살았던 동네, 지금은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있는 내앞마을로 가보자.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반변천을 끼고 동쪽으로 가다보면 안동대학교 앞 동인문을 만나게 되고 좀 더 가면 내앞마을이다.

허1

안동독립운동 기념관 입구 : 전통건축의 맛을 살리려 노력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내앞마을에는 옛집이 참 많다. 옛집들을 둘러보기 전에 잠시 현대의 집을 둘러보자.

전통문화가 많이 남아 있어 근래에 안동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들리는 이는 많지 않다. 경북을 여행 할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이곳을 들리기를 권한다.

천안에 비해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사회주의 계열인사들을 애써 모른 척 하지는 않는다.

이 건물은 항온과 항습을 비롯한 많은 설비가 필요한 전시 공간, 튼튼하고 독립적으로 격리 된 수장 공간, 연구자를 위한 연구 공간, 기본적인 관리와 사무 공간 등이 필요하기에 현대의 기법과 자재로 지었다. 그래도 입구는 나무를 사용해서 한옥모양을 살리며 주변과 어울리게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여기서는 건축보다 내부 전시를 잘 살펴보자. 천천이 실내 전시를 보고 밖으로 나오면 인근의 독립운동가 1,000명의 이름을 새긴 벽이 있다.

이들이 안동의 자랑이며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서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기념관을 나설 때는 안동 독립운동사를 빛나게 재조명한 김희곤 관장이 쓴 책도 사서 읽으면 더욱 좋다.

내앞마을 대표적 옛집 : 후손이 살고있는 의성김씨종택

허2

의성김씨 종택 전경 : 수평으로 긴 행랑채위에 솟은 크고 작은 합각면과 뒷산의 소나무가 좋다.

이번 글에서는 내앞마을의 종가라 할 수 있는 보물 제450호 안동 의성김씨 종택을 간단히 소개한다. 보물 450호이니 일반적인 사항은 포털에서 명칭만 치면 다 나오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훨씬 자세한 설명을 해 놓은 기행문도 많다.

이 고택은 다행스럽게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어 오래된 집이지만 온기가 느껴진다. 당연히 관리도 잘 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항상 집 내부를 둘러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중문내부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불쑥 들이닥치는 관광객들에게 사는 사람들이 지쳤기 때문이다.

이 집을 천천히 그리고 제대로 둘러보고 싶으면 반드시 미리 연락을 하고 가야만 한다. 아니면 밖에서 집의 외관만 구경하다 발길을 돌려야만 한다.

대청마루 – 세 단으로 나누어 위계를 표시하다.

허3

넓은 대청마루가 세 단으로 나뉘어 있다.

이 집에 대해 두 가지 애틋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첫 번째가 안채에 있는 넓은 마루에 관한 이야기다. 안채 대청마루는 세 단으로 높이가 서로 다르다. 각 단의 차이는 약 3치(9cm), 5치(15cm)이고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차이는 8치(24cm)정도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적지 않게 불편하였을 것이다. 같은 재료, 같은 평면, 같은 목적을 가진 마루가 왜 세 단으로 높이가 다르게 되어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조선시대의 위계질서에 있다.

대청은 안채의 중심공간이기는 하지만 벽체가 없이 트여 있다. 안채에서 위계는 크게 대청 위의 양반과 안마당의 하인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집을 지었던 사람들은 대청위의 구성원끼리도 위계를 또 나눈 것이다.

상방의 할머니, 안방의 안주인, 작은방의 며느리, 시집가지 않은 딸 등 안채 사람들도 자신의 처지에 맞게 대청의 적당한 곳에 앉거나 섰을 것이다. 혹은 문중의 큰 행사 때에도 단을 이룬 마루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나누었을 것이다.

제일 상단에는 느긋하게 앉아 담소를 나누던 할머니들, 중간단에는 상단을 힐끔 그리며 소근 거리던 중년의 여인들, 아랫단에는 앉기는 했지만 좌불안석이었을 젊은 며느리, 그리고 잠시 다리쉼도 하지 못하고 안채 마당을 중심으로 부엌과 광을 드나들며 모든 일을 하던 낮은 신분의 여인네들이 있었다.

조선은 그러한 사회였다.

대청과 같이 열린 공간에서 조차 위계를 따지며 나누었던 사람, 당시의 주된 사상을 건축과 일상생활에서 조차 담으려 했던 바로 그 사람

그들이 안동의 양반이었다.

19세기말, 그 꼰꼰한 안동 양반은 기울어가는 국운을 보고 자결한 이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20세기, 이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온몸을 바쳐 실천한다. 양반을 버리고 의병이 되고, 독립운동가가 된다.

상방 누마루 – 고향하늘을 바라보는 여인들의 공간

이 집에 얽힌 두 번째 애틋한 이야기는 상방 누마루에 관한 것이다.

경북의 ‘ㅁ’자형 집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의 안채, 동·서 양편에는 부엌과 광 등으로 쓰이는 부속채, 남쪽에 사랑채가 있는 게 보통인데 이 집은 안마당 전체를 안채가 둘러싸고 있을 만큼 집이 크다. 사랑채와 행랑채, 광 등의 시설은 따로 있다.

허4

동상방과 누마루 – 절대 ‘찬(餐)다락’이 아니다.

안마당 동편에는 동상방(동쪽에 있는 상방이라는 뜻이다)이 있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트인 수장 공간이 있다. 문화재보고서의 관련 설명을 보면 이 공간을 ‘찬다락’이라 한다.

밥에 곁들여 먹는 음식이 찬(餐)이니 ‘찬다락’이란 반찬이나 반찬의 재료를 보관하는 다락이라는 것인데 나는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

음식이나 음식재료를 보관하는 공간은 이렇게 트여 있어서는 안 된다. 쥐와 고양이는 무시로 드나들 것이며, 여러 날짐승들도 자유로이 사람들의 찬을 같이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찬다락’이라면 수장 공간이니 장식이 있는 난간은 필요하지 않다. ‘찬다락’의 안마당 방면으로는 난간을 설치하고 가운데 안상(眼象:코끼리 눈모양) 문양을 새겨 놓고 있지 않은가

이 공간은 당시의 유교적 질서에 갇힌 안채 여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동상방 위의 누마루는 안마당을 벗어나기 힘든 안채 여인들의 나들이 장소이자 휴식의 장소인 것이다. 안채에서 바라보이는 바깥세상은 채 열 평도 안 되는 사각의 안마당 하늘밖에 없다.

친정이 서쪽인 여인은 해질녘 붉게 타는 노을을 보며 어릴 적 고향집에서의 생활을 잠시나마 생각했을 것이다. 고향이 동쪽인 여인은 동으로 난 창으로 고향하늘이 어디쯤인지 짐작해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이렇게 동상방 위 누마루는 여인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이와 같은 시설은 다른 고택에서도 보이는데 경주 양동마을 회재 이언적의 생가인 향단에도 있다. 향단의 안마당은 이곳보다 훨씬 좁다. 그래서인지 향단의 여인들을 위한 시야는 이곳보다 조금 더 멀리 트여있다.

대청마루에서 조차 단을 나누어 위계를 따지던 시대였다.

열 평도 안 되는 사각의 안마당에서 시선이나마 밖으로 보낼 수 있는 상방누마루는 안채 여인의 안식처가 되었을 것이다.

내앞마을, 직접 와서 보시라

내앞마을에는 의성김씨종택 외에도 둘러볼 옛집이 참 많다. 모두 돌아보려면 짧게 잡아도 한나절은 걸린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구석구석 돌아보든지 아니면 그중 중요한 것들만 보든지 미리 계획을 잘 세워서 와야 한다.

허5

내앞마을에 있는 옛집 – 백하구려 : 백하 김대락 선생의 고택이다. 1907년 안동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의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간단히 소개한 보물 450호 안동 의성김씨종택 이외에도 귀봉종택, 제산종택, 임하댐 건립으로 1988년에 이사를 온 치헌, 낮은 박공벽과 옛스러운 기와가 좋은 백인재,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였던 백하 김대락의 백하구려, 농촌에 어디를 가서도 볼 수 있을 듯 한 김동삼 선생 생가 등등 많은 옛집들이 사람의 눈길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올 여름에는 안동의 내앞마을로 한번 와 보시라.

필자소개
진정추와 민주노동당 활동을 했고, 지금은 사찰과 옛집, 문화재 보수 복원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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