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 하나뿐인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③
        2013년 06월 08일 02: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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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②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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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이 되자 경성으로 돌아온 강처중은 정병욱을 찾아갔다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윤동주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해방이전 강제징집을 당했다가 부상으로 경성으로 돌아온 정병욱 역시 윤동주의 소식이 궁금해 몇 차례 일본으로 서신을 보내보았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다는 것이다.

    강처중은 연희전문 동문들을 상대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역시 윤동주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해가 바뀌고, 중국의 용정에 있던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정병욱을 찾아 경성으로 오면서 비로소 윤동주와 송몽규의 비참한 죽음이 알려졌다.

    두 사람의 죽음을 한꺼번에 접한 강처중과 정병욱의 충격은 컸다. 그때서야 정병욱은 세상에 단 세부밖에 없는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의 존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정병욱은 강제징집을 당해 전선으로 끌려 나가기 전에 시집을 광양의 고향집에 맡겨놓았었다.

    정병욱

    전남 광양에 위치한 정병욱의 생가. 윤동주의 단 한권뿐인 시집이 보관되었던 장소다. 정병욱의 모친은 징병에 끌려가는 아들이 맡긴 터라 ‘위험한’ 물건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역사의 한자락을 살려낸 순간이었다.

    소중한 물건이니 잘 보관해야 한다는 자식의 말에 독립군의 비밀문서처럼 장롱 깊숙이 보관한 어머니 덕택에『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윤동주의 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윤동주 자신이 보관하던 한 부는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고, 이양하선생이 가지고 있던 또 다른 한 부도 행방이 묘연했다. 정병욱이 고향집에 맡겨두었던 것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한 부였다.

    1947년 2월, 윤동주 2주기를 앞두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그를 추모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묻지 않아도 서로가 알 고 있었다.

    이듬해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쓰인 열아홉 편의 시와 일본유학 시절 강처중에게 보낸 다섯 편 등 총 서른 한편의 시가 묶여 윤동주가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시집의 진행을 도맡아 한 것은 강처중이었다. 정지용이 서문을 쓰고 강처중이 발문을 달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윤동주의 시집에서 사라졌다. 증보판에서 서문과 발문이 삭제된 것은 역사란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지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독재의 시대. 정지용은 월북이라는 혐의가 진실인 시절이었고, 강처중은 언론계에 침투한 남로당의 핵심공작원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 제정로마 시대의 ‘기록말살 형’이 두 사람에게 내려진 것이다. 좌익은 그 기록마저도 말살되어야 하는 것이 시대의 현실이었다. 정병욱이 없었다면『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는 세상에 그 빛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지용과 강처중이 없었다면 윤동주 시의 영혼이 이처럼 맑게 빛날 수 있었을까.

    반세기 동안, ‘경성에 있는 벗’이라는 익명으로 그 이름이 삭제되었던 강처중은 언제쯤 다시 누상동으로 돌아와 윤동주와 해후할 수 있을까.

    만나지 못한 두 천재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윤동주와 정병욱이 1941년 봄부터 초가을까지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던 하숙집이다. 보통 위인들의 집을 말할 때면 그가 태어난 고향의 생가가 가장 먼저 언급된다. 고향을 일찍 떠나온 경우는 그가 주로 살았던 곳을 조명한다.

    하지만 윤동주가 김송의 하숙집에 머물렀던 기간은 지나치게 짧다. 게다가 지금은 연립주택으로 바뀌어 예전의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상태다. 그런데 왜 윤동주의 하숙집, 즉 누상동 9번지는 여전히 조명을 받고 있는 걸까.

    이유는 단 한가지다. 윤동주가『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의 주요작품을 이곳에서 썼기 때문이다. 물론 시들이 쓰인 날짜는 11월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정병욱의 기록에 따르면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과 같은 주옥같은 시들은 이곳에서 쓰였다. 11월이란 날짜는 책으로 치면 최종 교정날짜인 셈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시(序詩)>가 이 누상동 골짜기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또 하나는 연희전문의 기숙사였던 연세대학교 핀슨홀을 제외하면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탓도 있다. 그런데 왜 학교에서도 외딴 누상동의 하숙집에 둥지를 틀었을까.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라면 연희전문에서 가까운 북아현동이나 가좌동 쪽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수업이 없을 때면 언제나 종로통을 쏘다니곤 했다. 물론 그 이유는 고서점들을 순례하면서 자신의 우상들 시집들을 찾아다니며 그 숨결을 느끼는 것이 그에게는 일과였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난 후 하루의 일과를 따라가 보면 이렇다. 연희전문의 백양로를 뒤로 하고 전철타고 소공동에 내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종로통의 서점가를 훑고 돌아서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된다. 일종의 윤동주가 움직이는 동선인 셈인데, 전철을 타고 다시 핀슨홀로 돌아가거나 걸어서 누상동으로 오거나 시간상으로는 큰 차이는 없다. 요컨대, 누상동 9번지에 원고지 뭉치를 내려놓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대가 낳은 천재라고 또 다른 천재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윤동주가 사랑한 또 다른 천재들을 굳이 꼽자면 세 명일 것이다. 첫 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정지용일 것이다. 또 다른 한명은 이 윤동주 나이에 시집 『사슴』을 세상에 내놓은 백석이다. 백석이 일백부 한정판으로 출판한 이 시집을 구하지 못한 윤동주는 연희전문 도서관에서 손으로 필사를 했고, 표지까지 직접 만들어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 나머지 한명. 불운한 천재, 시인 이상이다.

    역사란 확실히 심술쟁이다. 불행하게도 두 천재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윤동주가 경성에 발을 디뎠을 때는 이미 이상은 세상을 등진 뒤였기 때문이다. 연희전문에 입학해서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 정지용이고 백석의 한정판 시집은 필사해서 가지고 다녔다. 그렇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이상과는 어떻게 끈을 이으려고 했을까.

    이상생가

    통인동 154번지. 시인 이상의 생가터 일부분이다. 지금은 제비다방이라는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이상이 기생 금홍과 종로통에 제비다방을 차렸던 것에서 이름을 따왔다. 생가는 여러번 지번이 분할되어 정확한 위치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생전의 이상이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와 윤동주의 하숙집인 누상동 9번지는 대략 칠백여 미터의 거리다. 걸어서 불과 십분 정도다. 수업을 마친 윤동주가 정병욱과 함께 종로통의 서점들을 순례하고 집으로 돌아오려면 광화문을 지나 지금의 경복궁 전철역으로 오게 된다.

    여기서 누상동 하숙집으로 가는 지름길은 지금의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골목을 지나 수성동계곡쪽으로 쭉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그 골목 중간에 이상이 시를 써내려갔던 집터가 있다. 요컨대 윤동주가 자신의 하숙집으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이상의 집을 지나야만 했던 것이다.

    윤동주가 누상동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이상의 체취를 느끼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은 물론 추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정병욱은 친구의 소개로 누상동에 하숙집을 구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불편한 교통편에도 불구하고 누상동을 선택한 이유는 우연한 소개와 필연이 동시에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 필연적인 선택에는 이상의 집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하숙집을 구하던 두 문학도가 평소 흠모하던 시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우연과 마주친다면 누상동이라는 선택지는 필연이 되지 않았을까.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소설가 김송의 집인 이 하숙집에서 두 사람은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성악가인 그의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는 등 잊지 못할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하숙집은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오십여미터의 거리에 윤덕영 딸의 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박노수 가옥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집이다. 이완용과 더불어 대표적인 친일파 중에 한사람인 윤덕영의 딸과 사위가 사는 집이라면 특급 경호구역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김송 자신이 주요감시대상 인물이었다. 거기에 젊은 조선인들이 들락거린다고 상상해보라. 일제의 경찰이 수시로 하숙집을 기웃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꿈같은 누상동 9번지의 생활은 불과 5개월 만에 핀슨홀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매우 즐겁고 유쾌한 하숙생활(下宿生活)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숙집 사정으로 한 달 후에 그 집을 떠나야만 했다.

    그해(1941년) 5월 그믐께,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기 위해, 아쉬움이 가득 찬 마음으로 누상동 하숙집을 나섰다.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

    또 다른 누상동 하숙집. 정병욱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다. 윤동주와 정병욱이 핀슨홀을 나온 것은 아마도 3월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정병욱의 친구가 김송의 하숙집이 아닌 누상동의 어느 하숙집을 소개해 주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하숙집을 한 달 만에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상동 9번지 그 윗길 어디에 윤동주가 머물던 하숙집이 존재했던 것이다. 생전에 정병욱이 한 달 동안 머물렀던 하숙집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하숙집의 존재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현재 윤동주의 삶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은 연세대학교의 핀슨홀과 윤동주문학관,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도이다. 부암동 입구에 세워진 문학관은 행정편의적인 측면이 크다. 비어있는 수도시설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거닐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라는 청운공원의 ‘시인의 언덕’은 사실은 창작에 가깝다. 누상동 하숙집에서 왕복으로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이고 당시에는 인왕산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금도 인왕산로는 저녁이면 캄캄한 길이다.

    정병욱은 기억을 종합해서 추측하면 누상동 하숙집에서 수성동계곡을 거슬러 올라 지금의 버드나무약수터 입구 정도가 왕복 산책로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문학관은 부암동 입구로 시인의 언덕도 바로 옆에 조성 한 탓에 정작 누상동 9번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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