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정천 올림은어를 기다리며
    [작가들 제주와 연애하다-38]'천하의 생거지(生居地)' 강정의 수난과 아픔
        2013년 06월 07일 11: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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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연재 글을 모은 책 <그대,강정>(북멘토 펴냄)이 출간되었습니다. 4.3 항쟁을 염두에 두고 4월 3일 출간한 <그대, 강정>은 ’43인의 작가’와 ’7인의 사진가’가 참여했습니다. 오로지 강정을 향해 쓴 연애편지 모음집인 <그대, 강정>의 인세 전액은 ‘제주 팸플릿 운동’과 강정 평화 활동에 쓰이게 됩니다.
    제주 도민들에게 강정마을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작가들의 편지 연재는 처음 조정 시인이 제안하고, ‘제주 팸플릿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제주 팸플릿 운동’은 여기에서 연대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언어로 세상을 물들이고 싶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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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과 섬진강변에도 매화꽃들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봄을 이어받아 만화방창 꽃잔치가 시작된 것이지요. 때맞춰 강물 속으로는 황어 떼들이 남해 짠 바닷물에서 민물의 흙냄새 풀냄새를 맡으며 북상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보리가 팰 때면 이 길을 따라 은어 떼가 올라오겠지요. 지리산과 섬진강의 봄은 지상의 꽃들과 더불어 은어 떼들의 힘찬 꼬리짓으로 완성됩니다.

    매화꽃 산수유꽃 만발하는 섬진강변에 앉아 제주의 강정천을 생각합니다. 맑디맑은 강물 속으로 은어 떼가 돌아오는 곳이니 강정천과 섬진강은 참 많이도 닮았지요.

    옛날부터 물이 많아 마을 이름도 강정(江汀)이라 했으니, 범섬 앞바다의 에메랄드빛 바닷물과 한라산 곶자왈에 스며든 천연암반수가 사시사철 흘러내리며 한몸이 되는 곳. 바로 이 강정 마을은 꼭 한 번은 살아보고픈 천하의 생거지(生居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귀포 식수의 70퍼센트를 공급하는 강정천이야말로 제주의 생명줄이자 자랑이 아니겠는지요.

    십 년 전에 제주도를 걸어서 한 바퀴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올레길이 생기기 훨씬 전의 일이지요. 해안선을 따라 걷고 또 곶자왈 지대를 둘러보는데 25일 정도 걸렸습니다. 비로소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있었지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의 총괄팀장 역할을 맡아 도법・수경 스님 등의 순례자들과 함께였지요.

    제주도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천막 한 번 제대로 치지 않고 날마다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잤으며, 단 한 끼도 굶지 않았습니다. 섬사람들의 인심은 내륙 사람들과 많이 달랐습니다. 날마다 감격했지요.

    사람뿐만이 아니라 바닷가와 오름과 곶자왈과 한라산, 그리고 감귤농장과 돌담을 끼고 도는 마을 등 그 모든 곳이 마치 꿈만 같았습니다. 제주도의 존재 그 자체가 한반도 수려강산의 정점이었지요.

    특히 그중에서도 마을 주민들과 은어낚시를 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강정천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온갖 전설을 품은 듯한 구럼비의 모습과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새가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 계곡은 말 그대로 무릉도원이었습니다.

    강정천의 모습(유투브 캡처)

    강정천의 모습(유투브 캡처)

    그런데 이미 그때부터 강정 마을엔 서서히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은어회에 소주를 마시던 마을이장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지요. 그 뒤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미 폭발 직전의 화약고로 변해 있었지요.

    제주도가 ‘평화의 섬’은 고사하고 대립과 갈등의 아수라장으로,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강정 마을이 꼭 한 번 살아보고픈 생거지는 고사하고 전쟁기운을 몰고 오는 해군기지로 추락되는 날벼락 같은 일들이 벌어졌지요. 벌써 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문득 4․3사건의 참극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날들이 떠오릅니다. 아직도 성산 일출봉 아래 바닷가에는 일본군들이 파놓은 방공포진지가 그대로 있고, 제주 곳곳에 보이던 비행기 격납고의 잔재들이 잊히지 않습니다. 제주도의 해군기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지요.

    일본의 야욕이 제주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전쟁을 했듯이 또다시 서해와 태평양을 두고 벌이는 미국과 중국의 고래등 싸움에 대리전의 초토화 장소를 자처하는 셈이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주국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만에 하나 꼭 필요하다면 통일 이후에나 고민한 뒤 결정해도 늦지 않겠지요.

    최근 제주도의 땅과 집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팔려 나가고, 곶자왈은 골프장으로 파헤쳐지고, 강정 마을 앞바다는 전초기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섬 제주도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요?

    그대로 두기만 해도 대대손손 세계의 자랑거리인 제주도는 요즘 무엇을 꿈꾸는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한라산을 찾아오고, 오름을 찾아오고, 올레길을 찾아오는 이유를 행여 잊지는 않았는지요?

    무릎 꿇고 한라산 설문대할망께 여쭤 보고, 수많은 오름에 올라 통곡하며 물어 보고 싶습니다. 강정천 은어에게 묻고, 범섬에게도 물어 보고 싶습니다. 참으로 평화롭던 2002년 강정천 오름은어 축제의 시절이 눈물겹도록 그립습니다. 섬진강에는 해마다 더 많은 은어 떼들이 돌아오는데 자꾸만 줄어드는, 끝내는 씨가 마를 강정천 은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밤마다 한라산 설문대할망과 지리산 마고할미가 탄식하듯 주고받는 얘기에 귀를 기울일 때가 왔습니다. 평화와 상생의 길이냐, 대립과 상극의 길이냐에 21세기의 명운이 달려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주도의 저력을 믿으며, 섬사람들의 독립심과 자존심에 귀의하고 또 귀의합니다.

    이원규 : 시인. 84년 『월간문학』, 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신동엽창작상, 평화인권문학상 수상.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옛 애인의 집』, 산문집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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