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압에서 해방으로의 성장
    [세계 LGBT운동의 역사] 캐나다, 1971년 오타와 대행진까지
    By 토리
        2013년 06월 07일 10: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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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에서의 LGBT 운동의 성장은 1960년대 북미와 서유럽의 사회운동의 이론과 실천에 맞닿아 있다. 1950년대 미국 민권운동 및 반전운동, 1969년의 스톤월 항쟁 등은 캐나다의 운동 성장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빼놓을 수 없다.

    보다 넓게는 전쟁 이후 북미와 서구를 중심으로 발흥한 신사회운동과 다원주의가 캐나다의 정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가 다른 나라에 비해-특히 미국에 비해 손꼽히게 LGBT 권리가 신장된 이유로 정치제도의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가 얘기된다.

    하나는 미국과 같은 대통령제가 아닌 의회주의를 택함으로써 정책 변화에 대한 장애가 없으며, 고도로 규율화된 정당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화된 권위”가 부여된 의회 제도 속에서 정당은 반대파와의 타협 필요 없이 집행을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캐나다는 1980년대 헌법 개정을 통해 반차별, 인권 강령을 헌법에 삽입할 수 있었다. 또 동성결합의 경우 미국과 달리 각종 법적 수요로 인해 1970년대 이후 이성애 관계를 위한 ‘관습법상 관계(common law relationship)’ 인정이 늘어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캐나다가 처음부터 LGBT 인권에 관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533년 비역죄를 입법화한 영국법 모델을 따라 캐나다 역시 1859년 ‘비역죄’를 형법에 삽입하였으며 사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중죄로 다루어졌다.

    1892년 본 조항은 ‘반도덕 범죄’로 재분류되었고, 1969년까지 존속하였다. 단지 항문 성교만이 아니라 전체 성적 행위를 규제하는 목적으로 1890년에는 ‘중대 외설’에 관한 조항이 신설, 공적이나 사적으로 모든 남성은 다른 남성에게 ‘중대 외설 행위’를 행할 수 없었다.

    1948년 개정된 형법에서는 ‘범죄형 성적 사이코패스’ 조항이 신설되어 만약 어떤 사람이 ‘성충동을 통제하지 못해 성적 부정행위를 저지른다면’ ‘범죄형 성적 사이코패스’로 규정되어 무기징역까지 선고될 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 직후 냉전 상황은 게이 레즈비언들을 국가 안보에 대한 잠재적 배신자 혹은 스파이로 간주하였다. 게이 레즈비언들의 불분명한 사생활,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공산체제의 위협에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1953년 캐나다는 이민법을 개정하여 동성애를 이민 대상 목록에서 제외시켰다. 미국에서 메카시 광풍으로 정부 내 게이 레즈비언들을 대량 해고시킨 것과 유사하게 캐나다에서도 게이 레즈비언의 공직 근무를 금지시켰다.

    캐나다에서 게이 레즈비언 운동단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4년, 벤쿠버에서이다. 캘리포니아 메타친 소사이어티에서 영감을 받아 결성된 사회 지식 연합(Association for Social Knowledge)이 캐나다 최초의 동성애-우호적 운동단체라 볼 수 있다.

    벤쿠버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브루스 소머스가 첫 단체 회장이었으며, “사회가 성적 규범으로부터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단체는 1965년 ASK 뉴스레터를 발간하였으며 처음으로 공개된 장소에서 ‘동성 결혼’, ‘레즈비언’,’드랙과 트랜스베스티트”사디즘’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게이 레즈비언 하위 문화도 활발히 형성되었다. 1963년 게이 등장인물을 다룬 최초의 캐나다 영화가 불어로 제작되었다. 몬트리올의 경우 주류 극장계에서 게이들이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 게이 레즈비언 작가들은 다수의 연극, 시, 소설들을 출판하였다. 토론토에서도 제너럴 아이디어라는 아티스트 연합체가 1967년 결성, 퀴어적 시각이 담긴 예술 문화를 형성하였다.

    1969년 캐나다 의회에서는 형법 상 두 명의 성인의 동의에 따른 성관계 처벌 조항을 삭제하게 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1966년 에버레트 클리퍼트란 남자가 네 명의 남성과의 동의 하의 성관계로 ‘중대 외설 행위’ 혐의로 기소되고, 법정에서 ‘위험한 성 범죄자’로서 구금을 선고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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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버레트 클리퍼트(출처: CBC 라디오 아카이브

    재판 결과 항소에도 불구하고 최종 대법원에서도 기각되자 그 직후 당시 야당인 신민주당 당수 토미 더글라스가 의회에서 동성애 비범죄화 지지 연설을 하였고 당시 자유당 수상 삐에르 트르듀 역시 당시 준비 중이던 포괄적 형법 개정안 내에 동성애 비범죄화 조치를 포함하게 된다. 캐나다에서는 1969년 동성애 관계를 최종 비범죄화하였다.

    이토록 빠른 비범죄화 개정이 이루어진 데에는 1967년 영국에서 동성애 행위 비범죄화가 이루어진 것도 큰 관련이 있었다.

    같은 해 형법 개정안을 준비하면서 수상 트르듀는 ‘국가의 침대에는 정부의 공간이 없다’는 유명한 어구를 남기고 이에 반대하는 것은 낡은 아이디어임을 역설하였다. 다수의 교회에서 동성애에 대해 계몽적 온정주의 입장을 수용하였고 ‘성인의 동의’ 개혁을 지지하였다.

    교회가 주축이 되어 조직한 ‘사회 위생 위원회’는 동성애를 영혼의 문제와 함께 다루는 논의를 제안하였고 이는 이후 ‘종교와 동성애에 관한 이사회’로 바뀌었다.

    1969년 캐나다 교회 위원회는 동성애에 관한 적절한 크리스챤의 대응은 ‘편견과 괴이한 관점을 버리고 동성애자 남성 여성이 어느 정도 포용될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비범죄화 조치는 LGBT 운동 전략에서 더 이상 방어적 전략만이 아닌 자기 확신과 자긍심 전략을 가져오게 되었다. 곧 인구 10만 이상 도시 어디에서도 게이 레즈비언 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되었으며, 1971년에 최초로 대규모 오타와 행진이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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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최초의 오타와 대행진(출처: 캐나다 게이 레즈비언 아카이브)

    단체들이 활발히 결성되는 한편, 동성애 우호 그룹과 해방 그룹으로의 분화가 생겼으며 1960년대 결성된 동성애 우호 그룹들은 얼마 유지되지 못한 채 1970년대 초에는 거의 소멸하게 된다. 활동가들은 미국의 게이 해방 전선과 유사하게 동성애 해방 관점을 지닌 급진적 정치학을 수용하였기 때문이었다.

    토론토의 경우 토론토 동성애 우호 연합에서는 ‘게이는 좋은 것’이란 주장의 리플렛을 발행한 반면 ‘토론토 게이 액션’이란 단체는 The Body Politics라는 저널을 발행하며 “가부장적, 백인 중심적, 물질주의적, 폭력중심적” 질서를 해체하고 “게이 삶의 방식의 완전한 수용”을 요구하는 해방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다른 서구 국가의 경험과 유사하게 캐나다 그룹 단체들은 레즈비언 권리가 게이 권리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와 갈등이 있었고, 오타와 그룹의 경우 영어 사용자와 불어 사용자 모두 남성 여성 대표를 두도록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1971년 오타와 행진의 구호는 “중대 외설법”의 폐지, 동의 연령의 통일, 인권 강령에 따른 보호, 동성 커플 평등권, 경찰 파일의 파기, 군대에 복무할 권리, 이민, 고용, 입양 및 양육, 주거에서의 차별 제거 등이다.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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