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원 노동과 첫사랑의 기억
    [파독광부 50년사] 2년반이라는 독일에서의 세월이 지나고...<검정밥-10>
        2013년 06월 06일 12: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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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노동생활 중에도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이 빨리 지나갔다. 지루하고 어두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인 것 같더니 벌써 여름이 다가왔다.

    이제는 일도 몸에 배어 어려움이 없었고 계약기간의 반을 보내고 나니 내 몸도 곳곳에 석탄먼지가 들어가서 아물었던 상처에 검은 줄이 무늬를 이루는 단단한 노동자의 체격을 이루고 있었다.

    앞으로 지난 것만큼 더 일을 하면 공부할 수 있고 공부 마치면 귀국하리라고 생각하니 재정과 언어 실력이 남은 기한에 계획한 것만큼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음이 오히려 더 조급해졌다.

    여름에 66년도 휴가를 받았다. 원칙적으로는 우리는 여름철에 휴가를 받을 수 없었다. 여름휴가는 우선적으로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는 사람에게 주어졌다. 나는 요즈음 굴진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팀의 독일인 마이스터가 가을에 이사를 가기 때문에, 그때에 휴가를 가겠다고 자청해서 그 빈자리를 내가 얻을 수 있었다.

    나는 3주의 휴가 동안에 독일의 농가 혹은 포도원에서 보내기로 하고 우선 라인강변에 있는 작은 도시인 류데스하임(Rüdesheim)으로 갔다.

    이 도시는 관광도시로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드로쎌가쎄(Drosselgasse)라는 골목길을 메우며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 골목에는 포도주를 파는 술집과 식당이 즐비해 있고 골목이 끝나는 도시의 위쪽에는 포도밭이 있고 그 위로는 케이블카가 산 위에 있는 니더라인(Niederrhein) 기념동상까지 연결되어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나는 여기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동네 위쪽에 있는 포도원으로 올라갔다. 포도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혼자서 포도밭길을 올라오고 있는 동양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나도 여기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하니, 그들은 나더러 드로쎌가쎄에 있는 xx 호텔에 가면 포도원의 주인이 사는 곳을 알려 줄 것이니 주인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주인은 류데스하임에서 십리 남쪽에 있는 가이젠하임에 살았다. 호텔에서 미리 그 곳에 연락을 했기 때문에 내가 초인종을 누르자 큰 철문 옆에 있는 조그만 문이 열렸다. 철문 뒤에는 넓은 정원이 있고 정원 저쪽 약 백 미터 뒤에 성 같은 큰 저택이 있었고 저택의 옆과 뒤쪽은 다시 또 담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저택의 으리으리한 문 앞에서 나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조금 있으니 문이 열리며 머리에 화관 같은 하얀 수건을 쓴 여인이 나왔다. 나는 영화에서 보던 하녀를 연상했다. 누구냐고 물으며 주인이 내가 오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들어오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층계가 양쪽으로 놓여 있고 정면에는 약 십오 미터나 넓은 거울로 된 벽이 있었다. 여인이 거울의 한 곳에 손을 대니 그 넓은 거울이 소리도 없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울이 바닥에 완전히 사라지자 바깥 정원이 훤하게 보였다.

    거울 뒤에는 바닥에 대리석이 깔렸고 한 삼십 평되는 대리석 바닥끝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층계가 있었는데 그 층계 아래에는 약 20m 길고 10m 정도 넓은 수영장이 있었다. 더운 여름에 가족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던 한 오십 세의 뚱뚱한 남자가 나를 보고는 물에서 나와 몸을 닦으면서 나에게로 왔다.

    그는 대뜸 “내 친구 잘 왔어”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바깥 포도밭에는 일도 힘들 뿐더러 포도 열매와 가지를 치는 일은 숙련된 사람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저택 옆에 있는 포도주 양조장에서 일을 하라고 하면서 양조장 책임자를 불러 나를 넘겨주며 일하는 동안 재미있는 날들을 보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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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포도원의 한 장면(출처=독일와인협회)

    나는 류데스하임의 반이 자기 것이라는 이러한 부자가 자기 밭에서 일하고 싶다는 젊은 낯모르는 외국인에게 이처럼 친절하게 대하는 데에 은근히 놀랐다. 양조장 책임자는 나를 데리고 정원 곁에 붙어 있는 건물로 갔다.

    거기에는 기숙사처럼 한 방에 침대 둘씩 놓여 있는 방이 많이 있었다. 가을에 포도수확 때 철 따라 오는 일꾼들이 기숙하는 곳이라고 했다. 식사는 일꾼들이 다 함께 류데스하임에 있는 호텔에 가서 먹는다고 했다. 일할 동안 지낼 방을 정하고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은 포도주를 넣을 병을 씻고, 새 포도주를 넣은 병에 렛테르를 붙이는 일이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나는 그 일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쓸어졌다. 하루에 꼭 여덟 시간을 서서 앉지도 쉬지도 못하고 하는 일이 무덥고 먼지에 앞이 보이지 않는 지하의 일 보다 몇 배나 더 힘이 들었다.

    지하에는 일자리까지 오고 가는 시간을 빼면 작업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기껏해야 여섯 시간이 되었다. 지하의 노동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루의 할 일을 노동자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감시자가 없이 독립적으로 일을 하는 사실이었다.

    스타이거는 하루에 한두 번 작업장을 시찰하러 왔다. 일이 힘들면 언제든지 앉아서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닭장의 닭처럼 줄지어 선 우리들의 뒤에 양조장의 마이스터가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만 몸을 펴고 쉬면 야단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기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한 주 후에는 그곳을 떠나 남독으로 내려가서 여행을 계속했다.

    나는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 광산은 무덥고 공기가 탁하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감시 없이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지상에서 여덟 시간을 선채로 뒤통수에 감시자의 눈초리를 느끼면서 일을 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았다. 물론 지상 작업은 맑은 공기와 안전이라는 절대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의 갈림길

    두 주에 한 번씩 초대받아 가던 판데스트라트씨 댁에는 1965년 여름부터 매주 가다시피 했다. 아델하이드와 나는 자주 오페라 혹은 콘서트를 방문했다. 이렇게 매주 만나던 아델하이드와 나의 사이는 우리도 모르게 가까워졌다.

    주말이 되면 아델하이드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나에겐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고 지루하고 역겨운 시간들을 주름잡아 주었다. 나는 아델하이드를 방금 잎을 여는 장미의 꽃봉오리처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아끼면서 함께 있는 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지나는 동안 내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일을 할 때 장화 속에 돌부스러기들이 들어가 발등과 장화 사이에 끼어 발등을 조금 아프게 했으나 개의치 않고 일을 끝내고 난 후에야 장화를 벗고 둘 부스러기들을 털어내었다. 그런데 발에 힘을 주고 일을 할 때 발등과 장화 사이의 돌이 발등을 너무 눌렀는지 발등에 살갗이 벗겨져 벌겋게 되었다.

    며칠 일을 하고 나니 발등에 염증이 생겼다. 걸음을 걷기가 힘들었다. 그제야 의사에게 갔더니 병원에 가서 곪은 자리를 수술해내야 한다고 하며 나를 병원으로 보냈다. 생전 처음 당하는 수술이라 두려움도 컸고 서글픈 마음도 걷잡을 수 없었다.

    아델하이드가 연락을 받고 그 이튿날부터 매일 같이 병원에 찾아왔다. 며칠 후에 나는 양쪽에 목발을 집고 걸어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병원의 뒤쪽에 붙어 있는 작은 정원으로 나가서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어느 날 하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원에서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질 때가 되어서 아델하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이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별이 아쉬워 우리는 그 계단 위에서 한참이나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끝내 헤어지지 못하고 우리는 서로 끌어안았고 입을 맞추었다. 가늘고 연한 아델하이드의 몸은 내 팔에 감겨 있었고, 나는 오래 동안 맛보지 못하던 사랑에 도취되어 순간을 잊고 있었다.

    퇴원 후에도 우리는 시간 나는 대로 만났다. 흔히 듣던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라는 것을 우리는 몸소 느끼고 있었다. 아델하이드의 사랑은 나를 외로움에서 건져내었다. 샘물처럼 솟아나는 아델하이드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어려운 노동 중에도 모든 것을 견디어 내게 했다.

    물론 내 나름대로의 생활 관념에 의한 ‘일할 때는 철저히’라는 신조가 있었지만 그 일하는 시간은 정신력으로 단축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 곁에, 내 마음속에 누가 함께 있다는 사랑의 힘은 지루한 시간도 빨리 지나가게 했다.

    어느 날 어머님의 편지에 경아의 편지가 동봉되어 왔다. 나는 독일에 와서도 경아에게는 전혀 편지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경아는 고향 부산 주소로 보냈다. 이제는 그를 잊었다고 믿었던 내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고 편지 겉봉을 뜯는 내 손가락이 떨리는 것 같았다. 진주알처럼 가지런하고 참한 경아의 글이 드러났다.

    정의 씨,

    안녕하시리라 믿습니다. 일하시기가 얼마나 힘드세요? 고향생각에 미칠 것 같아 이역의 하늘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 치고 있을 당신을 눈앞에 그려봅니다. 여기는 개나리꽃들이 노랗게 담 너머로 내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희롱하는 계절입니다.

    당신께서 이 글을 읽으실 때는 경아는 부모님의 강요로 당신이 아닌 사람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유학입니다. 어쩌면 저도 그곳에서 평생 살고 싶은 생각을 가집니다. 졸업하던 날과 마찬가지로 시집가던 날에도 혹시 당신이 와서 있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곤 했습니다. 독일에서 미국에 오는 것은 쉽다고 합니다. – 하략 –

    서울에서 경아.

    아! 경아! 내 사랑. 나는 아직 경아의 편지를 손에 든 채 정원 뒷문을 열고 보리밭 사이로 발을 옮겼다. 경아를 이젠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물에 빠진 파리처럼 방향을 잃고 뱅글뱅글 맴돌기 시작했다. 경아도 아직 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헤어진 지 벌써 네 해 반이 지났으나 우리는 아직도 서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경아의 글은 나더러 미국에 와서 저와 함께 살자 라는 분명한 암시였다. 사랑과 행복을 손에 들고 즐기던 그 일년 반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사랑에 푹 담겨 다만 행복과 즐거움이 철렁철렁 흘러넘칠 때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세상천지가 온통 사랑으로 가득하던 때 손에 손을 잡고 도봉산을 오르면서 나더러 업어달라고 조르던 경아. 데릴사위라는 어처구니없는 조건 때문에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경아. 죽느라고 앙탈을 하며 함께 부산으로 가겠다던 경아. 나는 경아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면서 천천히 경아의 암시를 입속에 넣고 다시 한번 되새겼다.

    ‘시집가는 날에도 당신이 와서 있는 것 같아 뒤를 돌아봤습니다. 독일에서 미국에 오기는 쉽다고 합니다. 아버님 눈총 없이 미국에서 살고 싶어요.’

    쭉 빨아드린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 뿜으면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정말 경아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고 용단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경아는 부잣집 무남독녀로 태어나 세상을 몰랐다. 세상은 그를 위해 있고 그가 영위하는 삶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무대라는 뜻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없었다.

    아버님의 감시를 벗어난 미국에서 갓 결혼한 남편을 버리고 나와 함께 산다는 그 삶 속에는 다만 <나와 함께>라는 것만 존재하지 <나와 함께 사는 삶>과 수반하는 생활 수단과 방법은 존재할 권리를 이미 잃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경아를 사랑했다. 우리의 사랑은 무조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꿀 같이 달콤한 사랑 하나만 가지고라도 살 수 있던 20세를 갓 넘은 철부지도 아니고 또 서무과에 갖다 주라는 등록금을 다 까먹고 아버님의 질책이 두려워 군에 뛰어 들어가 엉덩이에 야전용 침대 몽둥이가 떨어질 때마다 후회를 하던 망나니도 아니었다.

    이년 반이라는 세월을 이역만리 땅속 천 길 깊은 곳에서 숨막힐 듯 탁한 공기와 무더위 속에 죽음과 이웃하며 삶 자체에 대한 엄한 도전과 싸움을 겪으며 그것을 이기면서 살아왔다. 나는 그 삶 속에 비치는 미국에서 경아와 함께 사는 또 하나의 삶을 드려다 보며 경아와 함께 사는 삶 에서 나를 끄집어내었다.

    나는 또 한번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경아에게 말하고 있었다. ‘경아! 부디 부디 행복하게 살아. 내가 백년을 살아도 충분한 사랑을 경아가 나에게 주었어. 내가 어디에 무엇을 하고 살아도 경아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칠 날이 없을 거야. 경아! 안녕.’

    나는 경아를 미국으로 떠나보내며 경아의 편지를 보리밭 가에서 태우고 있었다. 허공에서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나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어느 때 아버님과 함께 낚시질을 갔다가 낚시에 물린 커다란 고기를 놓쳐버렸다. 원통해서 발을 구르는 나를 보고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놓친 고기가 방석만큼 크단다. 놓친 고기를 너무 애석하게 생각 말라. 이번에 놓쳤으면 다음부터는 놓치지 않도록 해야지. 잡은 고기가 놓친 고기보다 더 중요하지.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때까지 놓친 고기도 많겠지만 잡은 고기가 놓친 고기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갯물과 싸우며 얻으신 아버님의 삶의 의미를 놓친 고기에 두지 않고 잡은 고기에 두는 생활철학을 다시 한번 머리에 새기면서 내 낚시에서 벗어난 고기가 유유히 내 주위를 맴돌다가 깊은 물속으로 영영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보는 듯 했다.(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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