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과 장애인에 대한 편견
    [파독광부 50년사] 삶은 그 자체가 숭고한 것 <검정밥-9>
        2013년 06월 01일 03: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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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람

    우리가 살던 길의 입구에 일본사람이 우리보다 5년 전에 와서 독일 여자와 결혼해서 그의 처갓집 위층에 살고 있었다. 그의 마누라는 다리를 몹시 절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야마모토라고 했다.

    하루는 우리가 이웃에 산다고, 된장과 다꾸앙을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주었다. 이웃나라에서 왔다고 고향사람처럼 대하는 그 친절이 고마웠으면서도 나는 야마모토가 주고 간 식품을 손에 든 채 어릴 때의 일본군들의 만행을 기억하면서 착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1945년 일제 말년 초여름부터 미군들의 B-29 폭격기는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부산에도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동삼동에 일본군 대공고사포 진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도 폭탄이 떨어졌고, 앞바다 오륙도와 아치섬 사이에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던 연락선이 폭격을 당해 파산되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도 두세 가구에 하나씩 방공호를 파야 했다. 뒷집 아저씨와 우리는 바로 우리 집 뒤 논두렁 아래에 굴을 파고 굴의 입구는 가마니로 덮었다. 밤에 하늘에 화경이 비치고 ‘구슈개요’ 라는 소리가 고사포 진지에서 크게 들리면 우리는 잠자리를 차려 들고 집 뒤에 있는 굴로 들어갔다.

    폭격이 심해지자 아버님은 아들만이라도 피난시켜야 되겠다고 작정하신 후에 나와 사촌누이들을 고향인 밀양 큰집으로 보내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밀양 큰집에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으나, 하루는 부산 큰아버지께서 오셔서 사촌 누이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나는 계속 밀양 큰집에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두 집에 하나뿐인 아들은 대동아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두어 둘 작정이었다. 갑자기 누이들을 잃은 나는 외롭기 그지없었다. 밀양 큰집에는 내 나이 또래의 친구도 없었고 조카들도 다 나이가 서넛 살 많은 여식들이라서 함께 놀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아버님이 나를 보러 오셨다. 모기, 빈대, 벼룩에 물리고 뜯겨서 볼 모양이 없는 나를 보시고는 아버님은 측은해 하셨다. 폭탄에 죽이지 않으려고 피난 보내었더니 버러지에 물려 죽게 만들었구나 하시면서, 그 이튿날 큰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등에 업으셨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우리 내외 죽고 나서 제 혼자 부모 없이 산들 무슨 소용이 있소?”

    계속해서 말리는 큰어머님을 뒤로 두신 채 아버님은 나를 업고 부산 길로 떠나셨다. 우리가 부산역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진 후였고 캄캄한 밤길을 걸어서 조내기라고 부르는 청학동을 지나 동삼동 가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이 언덕길은 군사지역인 대공고사포 진지로 가는 길이었음으로 길가에 군데군데에 초소가 있었다.

    초소를 지날 때마다 우리는 검열을 당했고, 검열할 때는 일본 군인이 총에 꽂은 칼을 이리저리 번쩍이면서 조사를 했다. 나는 시퍼런 칼이 내 코앞을 어른거릴 적마다 무서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의 무서움이 얼마나 컸던지, 오늘에도 일본 하면 그 날 밤의 칼날이 떠오른다.

    그 후에 하루는 긴 칼을 찬 일본 헌병들이 우리 집에 왔다. 그때 우리 집에는 아주 잘 생긴 <종>이라고 부르던 큰 사냥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개의 못된(?) 버릇은 칼을 찬 일본 헌병들만 지나가면 죽기를 각오하고 물려고 덤볐다. 원래 사냥개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이 개가 필요하다고 하며 우리 개를 강제로 끌고 갔다. 쌀은 다 빼앗아 갔고 놋그릇은 제사그릇까지도 다 납수한 그들이 이번에는 개까지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쌀밥을 먹지 못하고 보리밥에 바닷말을 섞어서 먹을 때마다 일본 놈들을 욕했는데, 형제 같이 자라던 <종>을 뺏어 가는 그들의 뒷다리에 매달리며 욕을 퍼붓는 나를 아버님은 잡아채면서 내 입을 막으셨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오늘까지 일본사람을 그렇게 달갑지 않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미워하기까지 했다. 어릴 때의 기억도 생생하고 또,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행한 만행과 압박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러한 역사를 잊지 않고 산 교훈으로 가슴속에 간직함으로써, 나의 세대나 나의 후손의 세대가 다시 그들에게 정복되어 노예의 쓰라림을 받지 않도록 나와 내 국가의 힘을 키우는 동시에 또, 그들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일본인 개개인까지도 미워하는 경지에 이르고 말았다.

    지난 역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역사가 비극이었으면 비극이었을수록 그러한 역사가 재현되지 않도록 양 국가와 국민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서로가 조국을 떠나와서 객지에서 어려운 노동생활을 하면서, 또 한 이웃에 살면서, 서로 마주칠 때마다 너는 일본녀석 쪽바리 새끼니까 인사를 안 한다 하고 지나칠 정도로 적대시하면서 살아갈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나도 부모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자식들을 벌할 수 없다고 하면서 며칠 후에 그 사람에게 한국에서 보내온 김을 보내었더니, 감사하다고 하면서 당장 그 다음 주말에 뒤쎌돌프에 있는 일본 상점에 가서 마른 멸치 한 봉투를 사서 보냈다. 서로가 멀고 먼 타국에 와서 노예생활을 하는 처지에 일본 놈, 조선 놈 가릴 경우가 못되었다. 우리는 그 후로 한 동양 사람으로 친하게 지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내가 일하던 아래 구역에서 나보다 사오 년 전에 왔던 일본인 하야시가 근래에 독일로 온 일본인 후배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비록 광부로 왔지만 그들 간의 선후배의 차이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했다.

    일을 하면서 하야시는 그의 젊은 동료에게 욕을 퍼부으며 나무랐다. 젊은 일본인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머금고 일을 계속했다. 내가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는 그의 동포를 구박했다. 그래서 내가 차마 볼 수가 없어 하루는 하야시에게 물었다.

    “하야시. 자네들은 같은 동포인 일본 사람들인데, 왜 자네는 같은 동포를 그렇게 구박하며 그를 못 살게 구는가? 같은 일본인끼리 너무하지 않는가?”

    하야시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참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그러나 확실한 어조로 대답했다.

    “리 상. 그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내가 욕을 하는 거야. 만약 그가 자네 같은 한국인이라면 내가 왜 욕을 할 필요가 있나. 같은 일본인이 독일까지 와서 일을 잘하지 않고 게으르니까 내가 그 사람더러 왜 일본에 있지 않고 독일까지 와서 나라 망신을 시키느냐고 야단을 치는 거야.”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이 사람에게 머리를 숙였다.

    독일에 온지 벌써 일 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비록 천길 땅속에서 내 몸이 이겨내지 못하는 노동에 시달리고 여기저기에 긁힌 상처에 석탄 자국을 내었더라도, 나에게 많은 경험과 쓰라림과 기쁨을 준 기간이었고, 철없던 나를 조금 어른이 되게 한 해였다.

    일 년을 지나는 동안 영원히 잃어버린 동료도 있었고 팔다리를 잃은 동료들이 늘어났다. 우리가 지하작업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함께 일하던 동료가 떨어지는 돌에 손이 찍혀서 장갑을 끼고 일을 했지만 새끼손가락 끝마디가 잘라졌다. 그는 아파서보다도 병신이 되었다는 사실로 그 자리에 앉아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는 지상 치료실까지 한 시간 동안 울면서 갔다고 했다.

    내 기억으로는 한국인은 병신의 개념에 대해서 예민한 편이었다. 눈이 조금 옆으로 보거나 발을 약간 절거나 심지어 말을 조금 더듬거리기만 해도 병신이란 낙인이 찍히고, 거기에다 돈 없고 가난하면 처녀장가는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진출에까지 영향이 미칠 정도로 배척되는 형편이었다.

    심지어 누구를 경멸해서 욕을 할 때도 “이 병신 같은 녀석” 이라고 했다. 육이오 남북전쟁이 일어난 후 많은 부상자가 생기게 됨으로써, 가족이나 친척 중에 수족이 잘렸거나, 한눈을 잃었거나, 걸음을 저는 사람이 낯설지 않게 되었고 병신이라는 개념 중에 외면적이고 배타적인 사상은 많이 없어졌지만 신체의 결함에 대한 안견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셈이었다.

    나도 이러한 사회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장애자에게 대한 마음가짐은 다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하 천길 땅속에서 바깥까지 새끼손가락의 한 마디를 잃었다고 어린아이마냥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고 갔다는 그 친구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장애인에 대한 독일인의 사고

    그런 반면에 독일에 와서 차츰 독일 사람들과 사귀며 상대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마음가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되었다. 아마 독일 사람들은 삼십 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에 두 개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수많은 다친 사람을 보았고 자기 자신도 다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광산의 지상 작업장에는 손발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지하에서 다쳐서 팔다리를 잃었을 경우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어도 일할 수 있는 지상 작업장에 배치되었다. 우리 회사의 작업번호 검사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지하에서 팔 다리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얼굴이 그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분간하기에 어려울 것이었는데도 입사한 지 며칠 후에는 내가 내 작업번호를 부르지 않아도 내 얼굴만 보고 번호를 집어내 주었다.

    여기에는 눈과 머리가 중요했지, 팔다리의 힘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경험으로 나는 장애인에 대한 나의 마음과 반응을 아주 정상적으로 가질 수 있었다. 장애인는 건강한 사람의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신체에 결함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차별 없이 대해주기를 원한다.

    하루는 옆집 부부가 손자를 유아차에 싣고 우리 집 주인에게 놀러왔다. 내가 아래로 내려오니 그들이 정원 베란다에서 주인 부부와 함께 커피와 과자를 들고 있었고 차일 그늘 아래에 유아차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웃 부인에게 손자를 보게 되어 즐겁겠다고 축하를 한 후에 유아차로 가서 누워있는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아기를 보는 순간 나는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기가 기형아였다. 얼굴 모양이 균형 없이 비정상으로 보였고 한쪽 팔은 없고 다른 팔에는 팔꿈치가 있어야할 곳에 손이 붙어 있었다. 나는 아기의 손을 잡고 예쁘다고 해주고 아기가 방긋 웃으면 안아주려고 했는데 기대와는 전혀 달리 끔직한 장면이 나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찌그러진 얼굴에 박힌, 티 없는 눈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갓난아기의 소리를 내면서 하나 밖에 없는 그나마 짧은 팔을 휘우적 거리고 있었다.

    아기는 나를 보고 웃고 있는데, 나는 못 볼 것을 본 듯이 아기와 나 사이에 담을 쌓고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 이러한 어린 아기와 직접 정면으로 마주 서 본적이 없었다. 내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고, 이 아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 바를 모른 체 허리를 굽히고 아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기가 참 귀엽지요? 이제는 사람을 보고 방긋방긋 웃기 시작합니다.”

    아기의 외할머니인 옆집 아주머니가 내 곁으로 다가서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는 아기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쁨을 온 몸에 풍기고 있었다. 아기를 유아차에서 들어내어 두 팔로 번쩍 높이 올리면서 또 아기와 희롱을 하기 시작했다. 아기도 즐거워서 무슨 소리를 내었으나 나에게는 이상하게 들려왔다.

    “불행스럽게도 아이가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앞으로 살아갈 길이 순조롭지 못할 것이 할머니인 내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우리에게 손자로서 주는 즐거움은 건강한 아기나 장애인인 아기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기를 볼 때마다 즐거움과 행복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할머니의 행복이 불티가 되어서 나에게로 날아오는 것 같았다.

    “제가 아기를 한번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아기가 낯을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잘 갑니다.”

    아주머니는 아기를 나에게 넘겨줬다. 나는 아기를 안고 젖비린내가 나는 비뚤어진 그 얼굴을 내 뺨에 살짝 붙였다. 연한 아기의 입술이 내 뺨에 닿았다. 아기를 안고 어르면서 나는 천천히 베란다에서 잔디밭으로 내려갔다. 자꾸 아기를 휘감은 나의 손이 오른쪽 팔이 붙어 있어야 했을 어깨에 가 닿았고 한쪽 팔이 없다는 것과, 공룡의 앞다리처럼 생긴 짧은 팔을 인식할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나는 그 아기가 한없이 가여웠고 불쌍했다. ‘너는 무슨 팔자로 이렇게 태어났느냐?’ 하면서 아기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아기의 운명에 대해서 천만가지 생각을 하더라도 그 중에 하나도 아기의 운명과 실제적인 연관성을 띄지 못했다.

    이 아이의 운명은 이 아이 스스로가 살고 만들어 나가야 했다. 내가 살아온 것처럼 이 아이도 살아야 하고 또 살 권리가 있다. 그의 삶은 그의 것이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즐거움과 아픔을 느낄 것이고, 그 삶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그 삶에 대한 그 이웃의 인정과 존경이 따라야 했다.

    내가 정상적(?)인 얼굴모습을 가지고 성한 팔다리를 가졌다고 해서 내 삶이 이 아이의 것보다 나은 것도 없고 귀중한 것도 없으며 더욱이나 우선권도 없다. 이 아이의 삶도 내 삶과 다름없이 귀중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내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이 아이의 삶을 아끼고 사랑해줄 의무가 있다.

    삶은 잘 생기고 못생긴(?) 얼굴이나, 팔다리가 있거나 없는 것과 상관없다. 삶은 그 자체가 숭고한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 뿐인 창조주의 선물이다.

    나는 아기를 안고 잔디밭을 걸으며 나도 모르게 아기와 뺨에 뺨을 비비고 있었고 아기와 함께 서로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아기는 아기대로 나에게 삶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인식을 그의 티 없는 웃음과 함께 가르쳐주고 있었다.

    (다음 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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