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동반자들과 그의 거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②
    2013년 05월 31일 10:42 오전

Print Friendly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① 링크

핀슨홀의 삼총사와 정병욱

1998년 8월의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있던 어느 날, 시인 윤동주의 시집『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출판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가 열렸다. 윤동주를 추모하며 참가자들이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작가 송우혜가 그동안 시집에서 지워진 이름을 끄집어냈다. 강처중.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맞아 증보판을 낼 때 서문을 쓴 정지용과 함께 발문을 썼던 강처중은 그 이름이 삭제된 적이 있었다. 송우혜는 그런 강처중을 다시 호명한 것이다. 정지용이야 납북된 혐의 탓이라고 하겠지만, 강처중은 왜 삭제되었을까. 생전의 강처중을 만나기 위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면 한 인물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정국은이다.

정국은 간첩사건이 워낙 드라마틱했던 탓에 사건에 관련된 나머지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노출되지 않았다. 군사재판의 기록에 따르면, 정국은 간첩사건의 주범은 정국은 자신이 아니었다.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박헌영은 북으로 넘어갔고, 남한의 최고책임자는 김삼룡이었다.

군사재판에 따르면 김삼룡은 여러 개의 비선조직을 운영했는데, 강처중이라는 인물이 언론계에 침투한 비선 책임자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국은의 죄목은 주요기밀을 강처중을 통해 북에 보고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강처중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정국은 간첩사건의 주범은 강처중이라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고향인 만주의 룡정을 떠나 평양숭실고보에 입학한 윤동주는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청년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경성이북의 최고 엘리트 학교인 평양숭실의 학생들은 조국의 미래와 자신들의 운명을 놓고 새하얀 밤을 지새우곤 했다. 윤동주 시인과 동창인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언제나 구석 한쪽에 앉아 편안한 웃음으로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따뜻한 차를 홀짝 거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문익환

평양숭실고보 시절의 윤동주. 뒷줄 좌측부터 장준하선생, 문익환목사, 그리고 맨 오른쪽이 윤동주 시인이다. 아래쪽의 인물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면 세사람과 친밀한 사이였을 것이다

경성에서 평양은 매일 사람들이 스쳐가고 하루 걸러 경성의 이야기들이 평양에 회자되곤 한다. 청년 윤동주가 그런 경성을 흠모하는 것은 당연했다. 의대를 고집하던 부친의 반대에 불구하고 윤동주는 연희전문의 문학을 고집했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 대부분이 그렇듯이 연희전문 역시 기숙사가 잘 구비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연희전문은 윤동주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함께 입학한 고종사촌 송몽규와 기숙사 건물인 핀슨홀 3층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한명의 룸메이트는 강처중이었다.

윤동주와 송몽규, 그리고 강처중은 연희전문의 삼인방이었다. 삼인방은 최현배 선생의 조선어 수업을 들으면서 백양로에서 나라와 언어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에 분노했다. 이년 후, 광양의 촌놈 정병욱이 연희전문에 입학하자 이들은 나이를 뛰어넘어 함께 어울렸다.

윤동주에게 송몽규는 경성에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였고, 강처중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민족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는 동지였다. 특히, 정병욱은 시라는 미지의 땅을 함께 찾아가는 정신적인 동반자였다. 물론, 이 네 명을 하나의 끈으로 묶은 것은 윤동주 자신이었다.

누상동 9번지

1941년 봄, 졸업반인 윤동주는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 위치한 소설가 김송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병욱과 함께였다. 하지만 강처중과 송몽규는 허구한 날 누상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누상동 하숙집에서 연희전문까지 등하교 길은 그리 좋은 교통환경은 아니었다. 전차를 타려면 소공동 한국은행 본관까지 가야하는데 걸어서 족히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왜 윤동주는 누상동 골짜기로 거처를 옮겼을까. 주변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숙집에서 십분만 걸어 올라가면 인왕산 중턱이고 이곳에서는 경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수성동계곡이 바로 옆에 흐르고 저녁이면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질 듯 보이는 동네다. 관광지로 치면 뷰 포인트(View Point)였다. 무엇보다 졸업을 앞두고 시를 쓰기에는 경성에서 이곳만큼 적당한 곳도 드물었다.

종로구 누상동9번지. 윤동주 시인이 소설가 김송집에서 하숙을 하며 를 써내려갔던 곳이다. 지금은 2층 연립주택으로 바뀌어 시인의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종로구 누상동9번지. 윤동주 시인이 소설가 김송집에서 하숙을 하며 <서시>를 써내려갔던 곳이다. 지금은 2층 연립주택으로 바뀌어 시인의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해 겨울, 윤동주는 자신이 쓴 시 중에서 열여덟 편을 고르고, 맨 앞장에『서시(序詩)』를 붙여 졸업 작품을 만들었다. 자필 시집『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였다. 애초에 윤동주는 시집을 출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영시를 가르치던 이양하 교수의 만류로 뜻을 접어야만 했다. 최현배 선생이 도서관 사서로 소일을 해야만 할 정도로 시기가 좋지 않았고, 일부 시는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조언에 따라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윤동주는『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3권을 스스로 필사하고 표지까지 직접 만들어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증정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권은 자신이 소장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마치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게 되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윤동주가 원래 입학한 곳은 동경에 위치한 릿교대학(立敎大學)이었다. 와세다대학과 함께 동경의 명문종합대학이다. 하지만 첫 학기를 마치고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의 영문과로 재입학을 하게 된다.

송몽규가 교토에 있다는 것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도시샤대학 영문과는 정지용이 졸업한 학과였다. 백석과 함께 가장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의 숨결을 느끼며 학업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듬해 여름방학, 윤동주는 짐까지 꾸려놓았지만 끝내 나가사키 연락선에 몸을 싣지 못했다. 얼마 후 송몽규 역시 윤동주의 뒤를 따라 한줌의 재로 현해탄을 넘어야 했다.

1947년 2월 13일, 시인 윤동주의 2주기를 며칠 앞두고 경향신문에 그의 시 한 편이 실렸다. 소개 글은 경향신문의 주간을 맡고 있던 정지용이 직접 썼다. 윤동주라는 이름이 영향력 있는 언론사에 의해 그의 삶이 재조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왜 정지용은 윤동주의 『서시(序詩)』와 같은 대표작을 제쳐두고 『쉽게 씌여진 시』를 지면에 소개했을까. 그것은 윤동주가 번민과 학업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일본에서 쓰인 시였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와 함께 일제에 의한 그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윤동주를 세상에 드러낸 정지용은 얼마 후 이화여대 교수직과 신문사 주간을 모두 그만 두고 녹번리로 들어가 세상과 높은 담을 쌓았다. <계속>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