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성애, 박해의 역사 (2)
    [빵과 장미]동서양의 역사에서 보이는 '남성성'의 찬미
        2013년 05월 31일 10: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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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성애, 박해의 역사 (1)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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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신교와 동성애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위기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 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13)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롬 1:26-27)

    기독교에서 동성애 반대(?)를 위해 흔히 근거로 삼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들이다. 특히 1세기에 사도 바울은 동성애를 ‘우상’을 섬기는 하나의 증거로 삼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순리”를 무너뜨리는 죄악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313년) 이후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교리를 정리해 나갔다. 나아가 기독교를 로마제국 국교로 자리잡게 하기 위해 기독교의 절대적 힘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만들고 규제했으며 ‘우상숭배’인 동성애도 당연히 그 이단 행위에 속하게 된다. 4세기 즈음부터 그렇게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동성애를 범죄화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동성애자들을 사형에 처했다.

    당시의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약 모든 사람이 소돔을 모방한다면 그들은 신의 규율 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의 약속을 훼손하는 것이다.”라며 동성애를 강하게 비판한다. 신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부정하는 동성애는 악마와 손을 잡는 것으로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 동성애는 반자연적이며 엄청난 퇴폐행위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규정되면서 동성애는 심지어 자연재해나 질병의 원인으로 취급 받기도 했다. 지진, 기아, 흑사병을 동성애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날 에이즈가 동성애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될 일도 아니다.)

    이제 서구 사회가 기독교의 절대 권력 아래 놓이게 된 중세, 1150년 즈음부터 교회는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한다. 13세기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에서 기독교인의 성도덕을 체계화하며 “자연계의 법칙을 훼손하는 죄악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다.”라고 동성애를 범죄화한다. 예나 지금이나 신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이들은 신을 모독하지 않기 위해 인간을 모독하는 행위를 참 서슴없이 저지른다.

    이슬람교는 어땠을까. 남성 간의 강한 우정과 사랑이 담긴 <길가메시의 서사시>를 오랜 세월 공유했으며 남성간의 육체적 접촉을 금기시하지 않았던 중동에서는 이슬람교가 자리잡으면서 동성애가 최고의 혐오대상이 된다. 역시 신의 질서를 배반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유대교도 마찬가지였는데 히브리어로 써진 최초의 랍비 문학인 <미슈나 Mishna>에는 투석형과 태형으로 다스려야 할 가장 큰 죄로 이교숭배와 살인, 그리고 동성애를 규정하고 있다.

    '미슈나'

    랍비문학 ‘미슈나’

    그런데 성서나 코란에서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비판하는 것에 비하면 여성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여성동성애에 관대했다는 뜻은 아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들의 동성애는 종교의 관심에서 아예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는 이에 대해 약간의 차이가 있다. 12세기 유대인 철학자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그의 책 <미쉬나 토라, Mishne Torah>에서 여성 동성애를 ‘금지해야 할 성관계’의 하나로 다루었다.

    이렇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에서 모두 동성애를 단죄하는 근거로 끌어오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다.

    그러나 도시 소돔이 신의 벌을 받고 멸망한 원인은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롯의 집을 방문한 두 천사를 마을 사람들이 강간하기 원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자연스럽다. 프랑스의 랍비 아줄래Azoulay는 2010년 “성서의 재해석이 필요하다. 성서에서 단죄하는 동성관계는 동성 ‘강간’이다. 자유롭게 합의된 관계를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응하기라도 하듯 2011년 또 다른 랍비인 질 베른하임Gilles Bernheim은 동성결혼 반대를 주장하는 책을 내어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소돔 사람들의 죄악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는 ‘소도미sodomy’의 의미도 시대마다 다르게 인식되어왔음을 상기해야 한다. 중세시대에는 ‘자위’도 이 소도미에 포함되었다. 자위는 재생산과 무관한 성적 쾌락을 위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소도미가 구체적으로 ‘남성동성애’를 의미하게 된 때는 15세기부터다. 그리고 19세기가 되면 이성이든 동성이든 상관없이 ‘항문성교’를 의미하게 되었다. 현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소도미의 정의는 광범위하다. 성기결합이 아닌 성행위를 의미하기에 구강성교도 포함되고 동물성애와 소아성애를 의미하기도 한다.

    '소돔과 고모라> 얀 브뤼겔 17세기

    ‘소돔과 고모라> 얀 브뤼겔 17세기

    결국 사회는 이성 간의 성기결합이 아닌 모든 성행위를 제도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꾸준히 배척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소돔을 끌어와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이들은 항문성교와 구강성교도 ‘반대’하는가. 설사 반대한들 어떻게 ‘발견’하여 ‘단속’하려는가.

    상대적으로 다양했던 아시아

    오랫동안 아시아 지역에 전파되어 나라마다 다양한 종파를 가진 불교는 동성간의 사랑을 딱히 배척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스승인 달라이 라마는 “동성이든 이성이든 타인에 대한 존중만이 관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한다.”라며 사랑의 대상이 이성이냐 동성이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불교는 성적 지향에 따른 억압은 크게 발견되지 않지만 성욕 자체를 정신적 진보의 방해물로 여겼기에 섹슈얼리티와 적당히 거리를 둔 면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조금 다르게 섹슈얼리티 문제에 접근했다. 9세기 일본 불교 진언종의 창시자인 승려 구카이에 의해 남성 승려들 사이의 동성애가 ‘긍정적으로’ 전파된다. 이 동성애가 남자들 사이에서 기쁨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남성으로 이루어진 승려 사이에서 동성애는 꽤 보편적이었다. 그 후 강한 남성성의 집단인 사무라이들에게서도 이러한 남성애는 발견된다. 이들은 당시에 남성애에 깊이 빠져있었고 고대 그리스에서 그랬듯이 남성간의 사랑을 이상화했다. 이하라 사이카쿠 (井原 西鶴, 1642~1693)가 쓴 소설 <남색대감(男色大鑑)>에서 사무라이의 사랑을 중심으로 이 남성애를 다루고 있다. 일본의 민속신앙에 속하는 신도도 역시 개인의 다양한 성적 지향을 존중했다.

    유일신을 믿기보다 수많은 신과 종교가 어우러져 있는 인도는 훨씬 더 ‘신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케랄라 주의 가장 대중적인 신인 아야판Ayyappan은 시바Shiva와 비슈누Vishnou라는 두 동성 신의 결합으로 태어났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4~6세기 <카마수트라>의 저자로 알려진 바챠야나Vātsyāyana는 동성애를 관능적 기쁨을 알아가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인들과 다르지 않다. 인도의 비폭력주의 종교인 자이나교도 일본의 신도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성적 지향을 존중했으며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사회적으로 비난 당하는 성관계는 동성애가 아니라 근친상간이나 동물성애였다.

    가까운 중국은 한나라(기원전 3세기~3세기)시대에는 동성애가 통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도교가 4세기 이후 국가적 종교로 자리잡아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는 도교의 음양론 때문이다.

    여성적 기(음)와 남성적 기(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도교에서 인간의 몸은 곧 소우주이기에 이 우주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조화가 장수에 좋다고 여겼으며 음과 음, 혹은 양과 양의 결합인 동성애는 개인 내부의 균형을 깬다고 생각했다. 음양의 조화를 긍정하는 사상은 결국 남성(양)과 여성(음)이 결합하는 ‘이성애’만이 ‘건강하고 정상적’ 관계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단, ‘양기’가 부족한 남성의 경우 예외적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은 궁극적으로 ‘남성성’을 우월한 가치로 삼았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나, 일본의 사무라이에게서 보여지는 ‘남성애’ 찬미는 모두 동성애에 ‘관대’했다기보다 남성성을 높은 가치로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양기가 부족한 남자에게는 남성과의 관계가 필요하다는 사고도 역시 ‘여성성’을 가진 남성을 ‘결핍’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옛날’ 얘기가 아니어도 오늘날 “계집애 같은 남자”라는 표현은 남성을 비하하고 조롱할 때 쓰인다. 동성애를 제도적으로 금지하는 말레이시아에서는 현재 ‘여자 같은 남자 청소년’을 위한 재교육 제도가 있을 정도다. ‘사나이다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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