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이국에서 만난 한국사회
    [파독광부 50년사] 앞날에 대한 두려움 벗어버리던 어느 순간<검정밥-8>
        2013년 05월 29일 02: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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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척이나 더운 여름, 한센에서의 한국인 사회 경험

    바깥 날씨가 더우니까 땅속 작업장의 온도도 35도 이상을 오르내리기 시작해서 석탄 먼지 속에 더위를 이겨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집에서 병가로 놀고 있는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야외수영장으로 놀러갔고, 그래도 쉬지 않고 몇 푼 더 벌려는 사람들은 무더위를 무릅쓰고 땅속에서 피땀을 흘려야했다.

    땅속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수영장에서 뒹구는 한국인들이 더 많은 경우도 생겼다.

    어느 토요일에 8.15 광복절 기념식을 악헨(Aachen) 시에서 한다고 했다.

    Z형이 나와 김홍석 군에게 거기에 가자고 제안했다. Z형은 그때 작은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다. 군에서 만든 면허증을 여기서 갱신해서 쓸 수가 있어서 한 팔 년된 차를 구입했다.

    약 두 시간 후에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악헨의 기념식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우리 차가 네거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끽하는 소리와 동시에 쿵 하면서 옆구리에 무엇이 들어왔다. 나는 앞자리 운전수 옆에 앉았고 내 뒤에는 김홍석 군이 앉았었다. 우리 쪽이 오른편에서 달려오는 차에 부딪힌 것이었다.

    부딪히는 속력에 인하여 우리가 탔던 차가 뒤집어졌다. 차가 흔들리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나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넘어진 차를 바로 세우려고 할 때 내가 깨어난 것 같았다.

    차가 바로 세워지자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를 천천히 차에서 끌어내었다. 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내 머리에 깨어진 잔 유리조각이 가득히 박혀 있었다. 살펴보니 Z형은 멀쩡한 것 같고, 나도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으나 머리가 좀 아프고 띵했다. 내 뒤에 앉았던 김 군은 차 바깥으로 끌려 나오자 나를 잡고 물었다.

    “이 형 어떻게 된 거요? 우리 왜 여기에 있소?”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몇 번이고 이렇게 물었다. Z형은 내 소매를 꽉 잡더니 홍석이가 이상하다고 하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조금 있더니 긴급구조차가 와서 우리를 싣고 병원으로 갔다.

    Z형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고, 김 군은 병원에서 관찰하기 위해서 하루 더 있어야 된다고 했다. 의사가 내 머리에 뢴트겐 사진을 찍어보고는 큰 이상은 없다고 했다. 그는 나더러 일주간 집에서 조용히 쉬어야 된다고 하면서 우리 동네 의사에게 주라고 진단서를 내게 주었다. 오른쪽 머리가 거울을 들여다보니 조금 부었다. 어지러움이나 아픔이 없었기 때문에 고통은 없었지만 부어오른 머리를 보니 불안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옆에 무엇이 보이는 가 했더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영영 깨지 못하고 갈 뻔 했다.

    오후에 연락을 받은 Z형의 친구들이 우리를 찾아 병원으로 왔는데 통역도 함께 데리고 왔다. 조금 있으니 경찰관들도 왔다. 그들은 우리의 여권을 조사기록하고는 누가 운전을 했는가 물었다. Z형이 자기가 했노라고 하니, 경관은 우리 차의 잘못이라고 했다.

    신호등이 없는 네거리에서 우리는 우선권이 있는 국도를 가로지르다가 높은 속력으로 국도를 달려오던 차에 받힌 것이라고 경관은 설명했다.

    그 차에는 중년부부가 타고 있었는데 우리들의 차가 가벼워서 그들의 차 엔진이 있는 앞부분은 박살이 났지만 외상을 입은 데는 없고 뇌진탕의 위험을 진찰하기 위해서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결과는 내일 경찰이 물으면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우리 차가 폐차가 되었으니 폐차 처분료를 내야 된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도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가지고 돈을 지불했다.

    독일 고속도로의 모습

    독일 고속도로의 모습

    김 군을 병원에 홀로 두고 우리는 Z형의 친구들을 따라 경축장소로 갔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형님은 우리가 고속도로에서 나오는 길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우선권이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이것도 우리가 독일이라는 나라를 너무도 모르는데서 일어난 사고라고 단정했다. 그저 면허증만 있다고 해서 차를 몬 것이다. 교통신호와 교통법규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차를 몰았다. 이러한 무모한 짓은 우리 자신의 생명을 위험 속에 던질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을 나는 감사하게 여겼다.

    경축장에 오니 사람들이 뒤끓었다. 오래 만에 같이 교육을 받고 이곳에 온 고향 동삼동의 S형도 만날 수 있었다. S형은 아침에 있었던 사고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이 글썽하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Z형과 내일 열두시에 오늘 갔던 병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S형이 사는 집으로 따라갔다.

    악헨의 에슈봐일러 광산에 일하는 한국 사람들은 다 개인 주택 같은데서 살았다. 이층집인데 각층에 부엌을 하나씩 두고 세 명이 살았다. 자취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S형의 집에는 먹을 것이 많았다. 오래 만에 한국음식 비슷한 것을 먹으니 즐거웠으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병원에 누워있는 말도 잘 못하는 김 군 생각이 나서 음식이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는 것 같았다.

    저녁에는 경축장에서 노래자랑도 있으니 거기에 가자하며 S형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했다. 나는 걸으면서 고향의 가족이 다 무고한지 물었다. S형은 다행히 다 별일 없이 잘 있다고 하면서 나더러 돈을 좀 송금했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사실대로 어머님 쓰실 용돈 외에는 보낸 것도 없고 저축한 것도 없다면서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계획을 말했다. 그는 그러한 용단을 내릴 수 있는 젊은 내가 부럽다고 했다. 자기는 마흔이 다 된 사람으로 위로는 부모님과 아래는 아이 셋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책임이 너무도 무겁다고 했다.

    “이 군!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모으지만, 자네, 노동자가 부자 되는 것 봤나? 아무리 잘 사는 나라라고 해도, 노동자는 항상 제일 말단의 돈을 받고 사는 것이니까, 노동해서 부자 될 생각은 버리고 조심하면서 지나다가 기한 마치고 건강한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그의 어깨가 더 아래로 처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땅만 보며 걸었다.

    우리가 저녁순서가 있는 큰 건물 앞에 왔을 때, 거기에 구급차가 서 있고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오니 어떤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구급차에 실리고 있었다. Z형도 친구와 함께 거기에 있었다. 나는 형님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싸움판이 벌어져 두 사람이 칼과 깨어진 유리병에 찔려서 병원으로 실려 가는 중이라고 했다.

    비록 독일 땅이지만 한국 사람이 모이는 곳은 한국사회였다.

    서로 잘난 체하고, 서로 힘센 체하면서, 남을 인정하지 않고, 남이 나처럼 잘난 체하면 잡아 누르려는 것이 그 당시의 한국의 젊은이의 심리였다.

    제 몸은 땅 속에서 다치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써서 병을 빙자하여 몸을 아끼면서 다른 사람의 몸은 추호도 사정없이 유리병과 칼로 찌르는, 이러한 썩어빠진 잔인한 심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우리의 가정교육과 사회생활에 인한 민족성에서 온다고 보았다.

    독일에 와서 듣는 말 중에 제일 귀에 서먹서먹한 말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는 <나의>라는 말이었다.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아들’, ‘나의 아버지’, 라고 하면서, 누구의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남편’, ‘우리 아들’,‘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나의 무엇’,이라는 말을 그렇게 쓰지 않는다. 비록 내가 형제자매가 없는 외동아들이라고, 나는 지금까지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라고 했지 한번도 ‘나의 엄마’, ‘나의 아버지’,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라는 전체적인 우리(= 울, 울타리?) 속에 <나>라는 하나의 뚜렷한 개체를 감추고 행동함으로서, 개개의 책임성을 회피하고, 개개의 수단에 단체성을 띄우게 해서 정당화시키려 한다.

    여기에는 <우리> 밖의 <나>라는 것이 용납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속에 잠재해 있는 <나>가 강해지고 크게 되려면 <우리>를 더 단단하게 지키고 간수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남을 무시하고 남의 것을 배척하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나>라고 할 때는 상대적으로 <너>가 대립된다. 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너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너>와 <나>의 공존이라는 단체성을 태어나게 하고, 그 공존을 유지하기 위한 개개의 자발적인 공(共)을 위한 관념과 단체를 이루는 개체의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고 아끼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한국의 집단적인 <우리>라는 표현에는 독립하는 <나>와 <너>가 존재되지 못하고, 서방의 <우리>는 <나>와 <너>의 개체가 모여서 한 단체 곧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단정했다.

    여기에서 또 서로 다른 정치적인 사상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나와 너를 분명히 구별하는 곳에는 개개인의 권리를 인정, 옹호 존경하고 개개인의 의무를 수행함으로서 동존의 근원이 이루어지고, 이 근원의 전제조건인 민주사상이 자리 잡을 수 있지만, <우리>라는 이미 규율과 제도가 고정된 단체 안에서는 독립적인 개성을 가진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음으로 우리 속에 <나>라는 하나가 굵어지고 커지면 또 하나의 우리로서 첫째의 우리에게 대립하는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둘째의 우리가 생김으로서 첫째의 우리가 쇠약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더 엄하게 하고 명령계통을 더 튼튼하게 하고 복종을 강요하게 되는 독재의 뿌리가 내리기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당도 나와 너가 하나의 당책과 강령을 깃발로 그 아래에 모인 것 아니고 <우리들>이 공존의 이익을 찾아서 포섭되고 모이는 인물 주체의 정당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한국에는 정당이 인물을 내는 것이 아니고 인물이 정당을 낸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러한 제도 밑에 자라난 우리가 제 아무리 동포애니 민족애니 단결이니 하면서 떠들어도, 받은 교육 자체가 배타적인데 무슨 망할 놈의 단결이고 어쩌고 하는 말이냐? 라고 느꼈다.

    나는 문득 고등학교 다닐 때 읽은 이어령 선생의 우리나라의 애국가와 일본의 애국가에 대해서 쓴 글이 생각났다.

    두 나라가 다 영원을 상징하는데 일본사람은 빗방울이 모여서 대해를 이루고 모래알이 모여서 태산을 이루는 기간을 영원으로 표현했으나, 한국 사람은 지금 존재하는 동해물이 말라서 없어지고 우뚝 서 있는 백두산이 다 닳아서 평지가 될 때까지를 영원으로 표현한다는 말이었다. 소모와 파괴를 애국가로 노래하는 국민의 심중에 단결과 협조가 싹틀 수 있을까?

    이튿날 나는 S 형과 이별을 나누고 병원으로 김 군을 찾아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Z 형이 이미 와서 김 군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 측에서 하루 동안 지켜봐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면서 퇴원시켜 주더라고 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뒤스부르크 시로 돌아왔다.

    시금치

    서로가 조심을 하면서 조용히 한다고 노력하지만 한 방에서 서로 다른 작업시간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개인 주택에 방을 얻어서 자취하러 나갔다. 나도 자취에는 경험이 없었으나 방 하나를 내 방으로 쓰면서 조용히 자고 공부하고 싶어, 우리 동네에 있는 문방구점에 가서 부탁을 했더니 다음 달부터 집이 난다고 했다.

    가서 보니, 지은 지 십여 년 되는 이층집으로 각 층마다 방이 셋,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마루가 있었고 바깥에는 넓은 정원이 있는 아주 아담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집이었다. 집주인은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로 아이들이 둘이고, 부인은 집값을 갚는데 돕기 위해서 어느 약국에 청소부로 일한다고 했다.

    오 군은 이미 자기의 독일 대부(代父)의 집에 하숙을 나갔고, 김 군은 기숙사에 편하게 있겠다고 해서 나는 Z형과 의논한 후에 L군과 함께 그 집으로 이사 갔다.

    우리가 이층을 쓰게 되었는데 각기 자기 방이 따로 있어서 개인적인 영역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거침이 없는 개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또 아는 사람이 찾아 왔을 때도 한 방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없음으로 음식을 먹거나 마음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우리 중에는 군대생활을 오래한 Z형이 제일 음식을 잘 하셨다. 내가 밥 끓이는 것을 보신 형님은 부산사람은 정말 음식 할 줄 모른다면서 내가 집에 있을 때는 형님이 내 밥까지 해서 나더러 함께 먹자고 했다.

    하루는 시장에 가니 시금치가 있었다. 고향 생각이 나서 시금치를 한 봉투 사서 데쳐서 간장에 무쳤다. 오래 만에 먹는 시금치. 입속에 향긋한 시금치 맛을 느끼며 나는 일사천리로 고향을 찾아갔다.

    해마다 우리는 한 천평 정도 시금치를 심었다. 겨울에 시금치가 자라서 새파랗게 되면 시금치 장사들이 와서 밭에 있는 시금치를 도맡아 샀다. 1962년 겨울에는 아버님의 병환으로 도거리 장사와 계약을 할 겨를도 없어서 반은 그 사람들에게 떠맡기고 반은 우리가 틈틈이 캐어서 팔았다.

    하루는 어머님께서 차에 다 실려 보내고 남은 두 꾸러미를 내일 새벽에 버스에 싣고 봉래동 시장에 갖다 주겠다고 하셨다. 새벽 네 시 반에 짐꾸러미를 버스 정유소에 가지고 가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는 오지 않고 <아랫서발>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버스가 오다가 고장이 났다고 했다. 새벽 버스 다음에는 아침 첫 버스가 여섯시 경에 있는데, 이 버스는 만원이라서 큰 짐을 실을 수 없었다. 또 늦어도 여섯시까지 시금치를 시장에 갖다 주어야 했다.

    나는 어머님께 내가 시금치를 지게에 지고 시장에 가겠다고 했다. 어머님은 아들에게 시금치를 지게에 지워서 시장에 보내실 마음이 없어 지게꾼을 얻으려고 생각하셨으나 그 새벽에 어느 지게꾼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지게를 어깨에 걸치고 가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신 어머님이 하다못해 허락하셨다.

    나는 시금치를 지고 봉래동시장까지 한 시간 반을 걸어서 갔다. 조금 늦었으나 채소장사꾼들이 아직 헤어지기 전에 도착했다. 짐을 풀어주고는 빈 지게를 지고 시장에서 나오니 어느 사람이 “어이 지게꾼” 하고 불렀다.

    부산 중앙동 인근에 있는 옛날 지게꾼을 표현하는 조형물

    부산 중앙동 인근에 있는 옛날 지게꾼을 표현하는 조형물

    나는 지게꾼이 아니라며 계속 길을 가려고 하니, 어느 중년 남자가 쫓아와서 지게 다리를 꽉 잡은 채 아픈 사람이 있으니 병원으로 지고 가자는 것이다. 나는 지게꾼이 아니라고 하며 택시를 타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환자가 택시를 탈 수 없다고 하며 꼭 나더러 지게에 지고 병원까지 가 달라고 했다. 나는 또 한번 내가 지게꾼이 아니라고 말하고 걸음을 옮기려고 했으나 그 사람은 오랫동안 지게꾼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고는 사람이 다 죽어가니 꼭 좀 져달라고 했다.

    이불에 뚤뚤 말려 어느 집 벽에 기대어 있는 환자가 불쌍했다. 나는 기왕에 지게를 진 김에 도와주자 생각한 뒤 아픈 사람을 지게에 얹었다. 나이 많은 할머니라 무겁지는 않았지만 대청동 병원까지 거의 십리 길을 지고 가야 했다. 가는 도중에 그 중년 남자가 아픈 할머니는 자기의 어머니이고 내장 암을 앓으신다고 하면서 사실 택시 탈 돈이 없어서 지게꾼을 찾았다고 했다.

    나는 무슨 섭리 같은 것을 느꼈다. 병원 입구에 내려주고는 지게를 등에다 걸치고 가려고 하니 그 사람이 품삯이 얼마냐고 물었다. 나는 돈 생각은 말라하며 내어주는 돈을 거절했다. 그는 감사하다고 몇 번 내 손을 잡아주고는 아픈 어머니를 들어 안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벌써 아침 여덟시가 다 되었다. 뱃속에 시장기를 느꼈다. 새벽에 나올 때 돈 한 푼 주머니에 넣지 않고 집을 떠났기 때문에 두 시간 걸어가야 집에 도착할 것 같았다. 새벽 네 시 반부터 무거운 짐을 지고 걸었으니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 친구 영기네 집에 가서 아침을 얻어먹기로 결정하고 그리로 갔다.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영기의 누님이 나오셨다. 누님이 문틈으로 내다보니 어느 지게꾼이 서 있었다.

    “우리는 지게꾼 부르지 않았습니다.”

    누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누님 접니더. 정의입니더.”

    나를 알아본 누님은 지게를 지고 있는 내 꼴이 꿈만 같은 모양이었다.

    “아이고 야야! 니가 우짠 일이고? 와이고 이 사람아! 제대하고 와서 일자리가 없어서 지게질까지 하나?”

    어처구니없는 듯, 꿈을 꾸는 듯, 내 손을 잡으며 대문 안으로 끌어들였다. 부모님께서 아침을 드시다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시며 “누고?” 하고 물으셨다.

    “정의가 왔읍니더.”

    아직까지 지게를 등에 지고 있는 나를 보신 부모님도 아연실색하셨다. 나는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는 일부러 얼버무렸다.

    “새벽 네 시 반부터 짐을 졌더니 얼마나 고단하고 배가 고픈지, 이 근방에 왔다가 영기를 생각하고 아침 먹으러 왔심더.”

    내 신세가 너무도 안 되고 가여웠던지, 어서 앉으라고 하고는 누님이 부엌에서 속히 밥상을 차려서 나왔다.

    친구 영기는 서울 Y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군 복무 중이라서 집에 없었다. 영기와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났고 그가 서울 Y대학으로 간 이후는 방학 때가 되어야 만날 수 있었는데, 내가 군복무를 할 때는 우리가 서울에서 자주 만났다. 내가 제대한 후에 영기 부모님께 제대하고 왔다고 인사하러 갔을 때 그도 외출 나왔다가 만났다.

    자기 아들과 친한 내가 지게꾼으로 돈벌이하는 것을 목격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무척 쓰라린 것 같았다. 나는 더 속일 수 없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해드리고 현재 우리 집안의 형편도 말씀드렸다.

    내 설명을 들으시고는 안심하는 기색을 하셨고 누님은 무척 기뻐하셨다.

    “지게를 지고 길을 걸으니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제가 하고 싶어서 일을 하니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기분이 들었습니더. 그래서 앞으로 할 일 없으면 지게질도 할 용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더.”

    나는 아침을 든든히 먹고는 아버님 드리라는 벌꿀 한 단지를 얻어서 돌아 왔다.

    나는 내가 무친 시금치를 먹으며 내 지게 위에 앉았던 그 할머니를 생각했다. 아마 돌아가셨을 거라고 짐작하면서 가난에 시달리며 죽어 가는 고국 사람들을 생각했다. 얼마나 가난하면 지게에 얹혀 병원에 가야 했나? 얼마나 가난하면 지게를 지는 것을 생업으로 해서 살아가야 하는가? 내가 지게를 진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시던 영기의 부모님과 누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지게 지는 일이 독일까지 와서 외국인의 서러움을 맛보면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다. 욕을 들어도 내 나라 욕을 듣고 업신여김을 받아도 내 민족의 업신여김이 나은 것 같았다.

    이 순간 나는 내 속에 어떤 결정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고향을 등지고 다시는 귀국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마음이 주장할 수 있는 근원을 잃어버렸다. 수만리 머나먼 독일까지 와서 죽기를 무릅쓰고 일할 각오가 있다면, 내 나라 내 조국에서 무슨 일이라도 다 할 수 있는 용의가 있었다.

    나는 이 순간에 삶의 의미를 보았다. 나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렸다. 삶의 뜻은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삶의 가치는 내가 얼마나 내 삶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내 삶이 얼마나 나의 것이냐에 있다. 이제는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하고 얼마나 잘 산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내 삶과 얼마나 동일성을 가지고 사는가가 문제였다. 그렇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공부 마치고 귀국하자! 어머님께로 돌아가자!  <다음 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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