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모순의 신자유주의,
    저항다운 저항 없기에 유지돼
        2013년 05월 28일 05: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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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20-30년 동안 세계사가 전개되어온 궤적을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라는, 지금 우리들을 지배하는 괴물은 참 자기모순적인, 자본주의의 한 유형을 치고도 너무나 괴이한 존재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죠. 역사적으로 17~18세기 유럽 절대왕권의 부국강병적 논리를 계승한 자본주의는, 외형적으로 자유방임을 외치더라도 그 속내, 즉 실질적인 정책은 대개 중상주의적입니다.

    어디까지나 전쟁 등 비상사까지 염두에 두고서 “우리” 국가의 공업을 되도록이면 육성시키고, 수입대체가 가능한 주요 상품들을 되도록 국산화시키고, 되도록 수입의존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는 것-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래” 속성입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정치, 군사상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국가들이-박정희의 한국처럼-산업자본주의로 성장했으며 여러 여건상 중상주의적 정책을 펼 위치에 서 있지 않았던 약한 국가들이 결국 자원공급 내지 완제품 시장의 역할로 그치고 마는 게 자본주의 역사의 논립니다. 즉, “정상”이죠. 저들의 세상의 “정상”.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과연 어떤가요? 주주들의 단기 이익이 중심이 돼 오히려 신자유주의 국가일수록 공업은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단기적으로는 장기투자를 요구하는 공업보다 마진이 조금 더 큰 금융부문 투기가 훨씬 더 유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모범국가인 영국을 한 번 보시죠. 대처가 수상이 됐을 때에 영국은-대체로 지금의 한국처럼-국민총소득 중에서 산업이 30%나 기여하는 대표적인 공업 위주 경제를 보유했습니다.

    그런데 대처와 그 후계자들의 인위적인 탈공업화 정책의 후과는? 인제 공업은 10%도 기여 못하고, 32%나 “금융서비스” 등이 차지합니다. 나머지는 주로 소매업 등 일반 서비스고요.

    이런 “경제”는 증시 투기꾼들의 당장의 배 채우기에는 안성맞춤인지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금융위기가 심화되기만 하면 그저 무너지고 말죠. 엄청난 실업 등 사회문제들을 야기시키고요.

    총체적인 위기가 오지 않더라도 이런 사이비 “경제”는 공업부문의 안정적인 정규직들이 결국 서비스 부문의 하루살이 비정규직으로 전락돼 상대적으로 빈곤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국 같으면 호텔/식당 부문에서 62%의 근로자는, 그리고 소매부문에서 약 48%의 근로자는 각각 저임금 노동력이거든요.

    하기야, 한국 같은 경우에는 탈산업화되지 않더라도 1997년 이후의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비정규직화를 통해서 결국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노동, 특히 하청업체/파견업체들의 노동을 1회용, 쓰고 버리는 상품으로 만들어서 주요 재벌들에게 증시투기꾼과 비교가 가능한 이윤마진을 가져다준 것이죠.

    사회적 후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이건 재벌들과 그들을 대표하는 관료들에게는 하등의 관심이 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단기성”은 그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그런 수준입니다. 예컨대 요즘의 “아베노믹스”를 보시죠. 1년 전만 해도 1달러는 80엔이었는데, 인제는 100엔 넘었습니다. 그저 돈을 마구 만들어서 단기적으로 내수를 늘려보는 것인데, 총임금의 경향적인 인상, 즉 다수 노동자들의 공고한 소득인상 없이는 이건 그저 또 하나의 “버블”을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아베가 그걸 모를까요? 증시 버블, 땅값 버블 등이 터진 것을 다 본 세대인데 잘 알 것입니다. 그래도 미친 짓을 계속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단기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4대강죽이기로 단기적으로 땅값과 건설경기를 올렸다가 장기적으로 그저 환경적 재앙을 낳은 한국의 보수 정객들은 과연 다를까요?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그러면, “미래”가 더이상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 몇개월 이상으로 미래를 보려 하지 않는 이런 미친 구조는 과연 어떻게 살아남나요?

    신자유주의가 도대체 왜 가능할까요? 여러분, 그 비결은 아주 쉽습니다. 저항다운 저항이 아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대의 저항이라고 할 영국 광산부문 총파업 (1984-85)이나 한국의 총파업 (1996-97), 촛불사태 (2008) 등도, 온 나라를 마비시키고 체제 전복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내비치는 수준으로까지 가지 못하고 말았는데, 체제전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저항에 지배자들이 더이상 절대 반응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그리브 전투

    1984년 광산노조 파업 당시의 소위 ‘오그리브 전투’

    96~97년의 민주노총 총파업 모습

    96~97년의 민주노총 총파업 모습

    그리고 특히 조직노동자들의 저항력이 최근 몇십년 동안 경향적으로 저하되는 것은 최대의 문제입니다. 실은 한국만 해도 조직노동자들의 총체적 저항의 피크는 1996-97년이었고, 그 다음 저항은 분산되고 흩어지고 주로 비정규직들의 산발적 투쟁 형태로 남게 된 것입니다. 운동의 총체적인 힘이 많이 빠진 거죠.

    이게 역사법칙이라면 법칙이지만 저항을 가장 잘 하는 노동자/미래 노동자들이 바로 미래가 어느 정도 보장된, 내지 그런 보장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는 이들입니다. 1968년 파리, 1987년 서울의 투석전을 벌이는 학생들은, 미래의 실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동류들과 경쟁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싸우기가 쉬웠죠.

    한국의 1996-97년도는 대대적인 비정규직화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대대적인 비정규직화가 이루어지고 개인 대 개인의 절대적인 경쟁구도로 가면 과연 어떻게 되나요?

    잃을 게 더이상 없고 연대가 가능한 이들, 예컨대 제조업 대공장/중간 규모 공장 비정규직들은 죽을 각오를 해서 싸움에 나섭니다. 그러나 연대가 물리적으로 어려운 중소기업 비정규직, 아니면 잃을 게 많은 정규직, 그리고 정규직 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해도 그래도 그래도 그 가능성에 죽어라 매달리는 대학생들은, 점차 투쟁의 장에서 멀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보수화”가 자리 잡는 것이죠.

    그런데 물론 이 “보수화”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결국 체제가 그 궁극적인 내부적 파멸에 스스로 이르면 절대 다수가 “잃을 게 없는” 위치에 몰릴 것이고, 그렇게 해서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보통 그 실패를 덮어두기 위해서 이런 순간들이 오는 대로 바로 전쟁을 일으켜버리는 것입니다. 1913-14년의 경제 위기가 바로 제1차대전으로 이어졌듯이 말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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