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폭 투하와 세균전을 막아라
    [북일 민중연대의 기억들] 한국전쟁 시기 북일 평화운동, 한계와 의미
        2013년 05월 28일 10: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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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동아시아, 핵무기 전폐 성명 불참하다

    지난 4월 24일 NPT(핵확산금지조약) 2015년 재검토회의를 앞두고 열린 제2회 준비위원회에서 남아프리카와 스위스 등의 주도하에 핵무기 폐기를 호소하는 「핵무기의인도적영향에관한공동성명」(관련 링크)이 발표되었다.

    “핵무기가 두 번 다시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것에 인류의 생존이 걸려 있”으며, 그것을 “보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전면 폐기하는 길밖에 없다”는 내용이 성명의 골자였다.

    2010년 뉴욕에서 열린 NPT재검토 회의, 5년마다 개최된다

    2010년 뉴욕에서 열린 NPT재검토 회의, 5년마다 개최된다

    작년 5월에 열린 제1회 준비위원회 성명(16개국 서명)에 명기되었던 ‘핵무기의 비합법화’(to outlaw nuclear weapons)라는 표현을 삭제함으로써 보다 많은 서명국을 획득하여 실효성을 향상시키고자 한 이번 성명에는 다수의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한 74개국이 찬동했지만, 이른바 핵(원전) 보유국, 혹은 그것을 희망하는 국가들이 거의 동참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대표단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폭투하로 괴멸적인 ‘인도적 영향’을 겪은 피폭국인 일본의 찬동을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세계의 반핵평화운동에서 일본이 가지는 상징성은 그만큼 큰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 측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의 부분이 일본의 안보환경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불참을 표명했다.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에 대한 고려나, 북한 등에 대한 핵억지력 저하를 우려하는 반대의견이 참조된 것으로 보이며, 핵무장에의 의지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이로써 동아시아는 한 나라도 이 성명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 되었고, 이 사실이야말로 이 지역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의 실로 암담한 현실을 극명하게 노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서명을 거부했다는 사실 자체는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특수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에 따른 핵무기 폐기의 이니셔티브를 발휘하여 세계평화라는 보편적 가치 실현에 공헌하자는 목표로 개시된 일본의 평화운동에 있어서도 심대한 위기상황이 초래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NPT가 조약국들을 핵무기국과 비핵무기국으로 나누어 비핵무기국으로의 핵무기 확산만을 금지할 뿐인 ‘불평등조약’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상, 그것을 ‘재검토’하고자 제출된 공동성명이 아무리 핵무기 전폐를 호소하더라도, 어차피 실효성을 결여한 선언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확실히 동아시아를 둘러싸고 복잡하게 전개되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핵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들이, 공동 성명이나 서명 하나만으로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고 상상하기란 이미 불가능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구도를 선명하게 하며 냉전체제로 돌입하기 시작한 60여 년 전으로 이야기를 돌리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1950년 초 동아시아, 핵무기 전폐 성명 동참하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후에도 유일한 핵보유국이었던 미국에 의한 핵실험이 계속되면서 동서 양 진영의 대립이 뚜렷해지고 전쟁 위기가 갈수록 증대되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반전 평화운동이 개시되었다.

    당시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평화의 소중함을 주장하는 이 운동을 실질적으로 리드한 것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참화의 기억이 선명했던 철의 장막 바깥에서도 간결하고도 극명한 이 주장은 거부할 수 없는 지상명제로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해,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감수하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넘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리하여 1949년 4월에 프라하와 파리에서 열린 제1회 평화옹호 세계대회(World Congress of Partisans of Peace)에는 사회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72개국의 대표자들이 참가했다.

    대회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던 프랑스 핵물리학자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Jean Frédéric Joliot-Curie, 1900~1958)는 “우리들은 전쟁 옹호자들에게 평화를 간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평화를 수락시키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고 연설했다.

    더욱이 1949년에 들어서 중국혁명의 성공, 8월의 소련 핵실험 성공, 1950년 1월의 트루먼 수폭 제조 명령으로 핵무기 경쟁 시대의 막이 오르고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핵전쟁이 현실성을 띠게 되자, 이 세계대회 위원회(50년 11월에 세계평화평의회World Council of Peace로 개칭)는 1950년 3월에 스톡홀름 호소문(Stockholm Appeal)을 채택하고 “전세계의 모든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서명을 호소”한다.

    핵무기 절대 금지, 핵무기의 엄중한 국제관리, 먼저 사용하는 정부를 전범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의 이 호소문은 80개국의 찬동을 얻었고, 서명운동에는 전세계 5억 인구가 동참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지역만 보더라도, 이미 핵보유국이 되어 이전과 같은 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핵무기 금지를 주장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던 소련도 참가했고, 중국도 참가했다. 북한에서도 1950년 4월부터 서명운동이 전개되어 약 1개월 사이에 무려 568만 명이 참가했다. 더욱이 이들 사회주의 진영국들뿐만 아니라, 미군정하에 있던 일본도 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피폭체험이 폭넓은 지지를 불러 서명자가 무려 645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운동이 낳은 최대의 성과는, 세계의 많은 논자들이 언급해 왔듯이, 한국전쟁에서 원폭 사용도 불사한다고 공언했던 미국의 의지를 꺾는 무언의 압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논자는 “세계의 인민들이 원폭의 방아쇠에 놓였던 트루먼의 손을 막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후에 미국의 핵외교정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는 키신저마저도, “핵무기야말로 소련의 침략에 저항하는 유효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세계평화운동의 ‘평화 공세’가 핵무기 사용의 비도덕성만을 강조하여 핵전쟁을 시작하는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는 데 성공했다”고 분석했다(Henry A. Kissinger).

    서명은 서명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서명운동에 비사회주의 진영의 일본이 동참한 것의 의의를 강조하자면, 피폭체험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 세계평화라는 보편적 가치와 만나, 핵전쟁으로 인한 또 다른 희생을 저지하는 데 공헌한 것이 된다.

    즉 과거의 희생자가 미래의 희생자와 연대하여 핵무기의 위험성을 호소함으로써 인류의 파멸을 막고자 하는 공통 의식이 일본과 북한, 혹은 일본과 사회주의 진영의 연대의 가능성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북일간의 연대 가능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이 연재의 취지에 맞추어 그 의의를 미리 밝혀두자면, 한국전쟁 휴전 이후부터 본격화하는 일본 진보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북일 우호운동이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와 당 간부와의 교류로 끝났던 반면, 이 운동이 북일의 민간 참가형 연대를 상정하고 또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전후 일본 평화운동의 개시

    일본 사람들이 피해자라고? 그들은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책임을 져야 하는 가해자가 아닌가, 아무리 원폭투하가 일본에 비인도적이고 괴멸적인 피해를 초래했다 하더라도 그 희생만을 강조하는 것이 전쟁책임을 회피하거나 무마시키는 것으로 작용하지는 않는가, 하는 의문의 소리들이 이미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패전 이후 미군 점령하의 일본에서 평화운동이 일어나 광범위한 지지층을 형성하며 급속히 성장하여 친사회주의적 성향의 세계 평화운동과 연계하기까지의 다소 복잡한 우여곡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10년 일본에서 열린 원수폭금지 세계대회의 여러 장면들

    2010년 일본에서 열린 원수폭금지 세계대회의 여러 장면들

    본래 “일본은 아시아의 스위스가 되어야 한다”고 한 맥아더의 유명한 말이 상징하듯이, ‘비군사화(무장해제정책)’를 초기 대일 점령정책으로 삼은 미군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하는 대신에 상징천황제와 전쟁포기 조항을 담은, 이른바 ‘평화헌법’을 부여했다.

    즉 이 시기 일본의 평화주의는 미군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었고, 구세력들이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점령군의 평화주의 정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군대의 최고지휘권(통수권)을 가졌던 천황이, 실은 군부의 압력에 ‘희생’된 ‘평화주의자’였다는 새로운 이미지가 강력히 선전되는 상황은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단적으로 전하고 있다(하야시).

    따라서 이 시기에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전쟁책임 회피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지배층의 순응적인 평화 노선에 회수될 가능성이 컸던 만큼, 사회운동으로서의 평화운동이 성장하기에는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공산당 및 혁명세력들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이라는 밖으로부터의 시점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가해 책임에 민감했던 만큼 천황제의 잔존을 인정할 수 없었고, 침략전쟁은 자본주의의 내부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인 만큼 자본주의 타도를 위한 인민 해방 전쟁은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따라서 스위스 같은 ‘중립평화국가’를 모범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회체제의 변혁이나 제국주의세력과의 투쟁을 통해 세계평화에 적극적으로 공헌함으로써 전쟁의 죄과를 씻어낼 책임을 포기하는 기만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小熊).

    이러한 점령 초기의 위로부터의 평화정책 기조 속에서 일본의 사회운동으로서의 평화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냉전의 심화와 미국의 세계전략 전환에 따라 대일점령정책이 ‘전후 개혁’에서 ‘극동지역 반공의 방파제’로 변화하면서부터이다.

    그 근저에는 순수한 평화 추구라는 계기보다는, 일본의 재군사화·기지국가화를 추진하려는 미국에 대한 저항의식과 친미파로 거듭나서 부활하는 구 전쟁세력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즉 이때의 평화운동은 현상유지적 평화주의가 아니라 전쟁의 위기를 회피하려는 적극적인 평화공세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핵무기, 군사동맹, 제국주의/식민지, 일본-독일 재군사화 등에 반대하는 세계 연대 평화운동과 만났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공산당은 평화운동의 중요성을 그다지 인식하지 못했고, 사회당은 세계 평화운동은 공산진영의 모략이라고 하여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1949년 4월에 평화옹호 일본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진보 정치 세력보다 광범위한 문화인들이 추진세력이 되었고 핵무기 금지 요구도 강령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GHQ는 점령 직후에 보도규제 지령(Press Code)을 내려 원폭 관련 보도를 사실상 금지했으므로, 원폭을 거론하는 평화운동은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탄압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도 미군을 해방군으로 보려는 의식이 남아 있던 탓도 있었다.

    이와 같은 진보세력들의 평화운동에 대한 저조한 인식을 본격적으로 바꾼 것이 1950년 3월에 개시되어 한국전쟁 개전으로 급속도로 전개된 스톡홀름 호소문 서명운동이라는 세계적 통일행동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미군의 군사행동의 발판으로서 일본의 재무장이 현실화되고 일본을 극동 전략 기지로 삼기 위한 미국의 단독 강화 움직임이 급속히 구체화되면서, 민중들은 피점령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평화운동에 대한 탄압에 저항하며 핵무기 반대를 호소하는 자발적 의지를 서명을 통해서 연대의 힘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산당원이나 그 동조자들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공직 추방되어 대개의 간부들이 지하활동에 들어간 공백을 메우며 서명운동을 전개한 중심세력은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회(전학련)의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전몰한 일본 학도병의 유서를 모은 유고집인 『들어라 바다신의 목소리』(東大協同組合出版部, 1949) 등을 출판하여 천황제 파시즘 하에 학업과 청춘을 등지고 전장으로 동원되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학도병들의 인간적인 고뇌를 전하여, 일본사회에 반전적 기운을 고양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지식인이나 문화인들, 노동계가 합류하여 서명운동의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공산당의 경우 정권의 탄압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 이외에 세계평화운동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평화옹호’ 운동은 우리의 ‘무기’?

    스톡홀름 호소문 서명운동으로 민중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서 서명이라는 운동형태가 확립된 후로, 한국전쟁기 북한과 일본에서 각종 호소문에 서명하는 행위는 일상처럼 낯익은 풍경이 되었다.

    북한의 예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미국의 무력 간섭 즉각 중지와 외국 군대 철수 등의 호소를 담은 「조선 인민의 성명서」에 대한 서명운동이다.

    1950년 8월에 남북한 전역에서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전개되어 약 1,300만 명이 서명에 참여했다고 주장되었던 이 성명서는 유엔 안보리 의장과 사무총장에게 발송되었다. 이것은 11월에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제2회 평화옹호 세계대회에서 채택한 ‘유엔에 대한 제안’의 첫 항목으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국내 완결형 서명운동이 국제적 이슈로 연결된 예 이외에, 1951년 2월에 세계평화평의회가 스톡홀름 호소문의 뒤를 잇는 것으로서 세계 규모로 전개했던 베를린 호소문(Berlin Appeal) 서명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 세계 6억 인구가 서명에 참가했다는 이 호소문은 세계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미·소·영·프·중의 5대 강국 간에 평화조약 체결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전시중에 많은 서명운동과 거국적인 참여가 가능했다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이지만, 그만큼 어떻게든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민중들의 의지가 강렬했음을 읽어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명확히 서명운동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또 하나의 ‘무기’로 여기고 있었다.

    북한은 “미제 무장 간섭자들과 싸우는 것은 조선의 민족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각계 인민들에게 필승의 의기로 평화옹호 서명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즉 평화를 호소하는 서명운동은 평화 수호를 위한 전쟁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 전쟁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일본공산당의 방침과도 호응하는 것이었다.

    1949년에 중국혁명이 성공하여 아시아에 인민 해방 투쟁의 기운이 고양되자, 국제적으로는 코민포름이나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일본의 국가 권력은 미제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파적 의회주의를 고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국내적으로는 공직추방 등의 극심한 탄압에 직면한 일본공산당 주류파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체적으로 급진화하여 왼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베이징에 비합법 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한 주류파들은 특히 중국이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한 11월 전후부터 급진적인 반미 무장노선을 내걸었다. 미국을 상대로 조국방위투쟁을 전개했던 재일조선인과의 반제 연대투쟁도 급속히 강화해 갔다.

    1951년 2월에는 제4회 전국협의회(4전협)를 개최하여 군사방침을 결정하고, 전면강화 투쟁을 선언한다. 전면강화 요구는 소련, 중국 등의 사회주의 진영은 물론, 전쟁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아시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미 군사 종속을 해소하고 전쟁책임을 다하여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1951년 9월에 요시다 정권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비준한 후인 10월 제5회 전국협의회에서는 무장투쟁방침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일공은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중국모델의 극좌전술을 모범으로 삼아 중핵자위대나 산촌공작대 같은 무장조직을 만들어 각지에서 파출소 습격, 화염병 투척 같은 파괴활동을 행했다. 이후에 신좌익 무장투쟁의 지침이 되기도 했던 『구근재배법(球根栽培法)』이나 폭탄 제조법을 적은 『영양분석표』 등의 지하출판물도 만들어져 파괴활동에 활용되었다.

    무장투쟁 지침서의 역할을 했던 구근재배법의 표지

    이때 합법투쟁도 병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서명운동이었다. 일공은 군사방침을 결정한 4전협에 앞서 1951년 1월에 사회당 좌파와 노동계와 연계하여 ‘전면강화애국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폭과 미국과의 단독강화”인가 “평화와 전면강화”인가의 이항대립 속에서 평화=전면강화를 위해서는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우선시 되었으며, 서명운동 같은 평화운동은 그것의 일부로 여겨져 경시되었다.

    더욱이, 이 운동을 국내로만 수렴시켜 4전협 개최와 같은 달에 세계평화평의회에서 채택한 베를린 호소문 서명운동과 결합시키려는 국제 연대의 노력은 부족했다(熊倉). 뿐만 아니라, 사회당 중심의 평화추진국민회의나 지식인들이 결성한 전면강화촉진문화인담화회 등의 국내 다양한 단체들에 의한 전면강화 운동과의 연계에도 한계를 드러냈다.

    1952년 아시아태평양지역 평화옹호대회: 세균전(북)과 단독강화(일)

    세계평화운동에서 이 무렵 서명운동 이외에 전개한 것에, 관련 단체에 의해 실시된 한국전쟁중 미군(유엔군)의 전쟁범죄에 관한 3차례의 조사가 있었다. 그 조사 보고서는 전쟁중에 일본에도 번역 소개되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 보고서(『백인은 유색인종을 박해한다』, 三一書房, 1952, 부록에 수록), 국제과학위원회 보고서(『세균전 흑서』, 蒼樹社, 1953), 국제민주부인연맹에서 파견된 국제부인조사단에 의한 보고서(『세균전 흑서』, 부록에 수록)가 그것이다.

    국제민주부인연맹은 평화옹호세계대회나 세계평화평의회에서 중심역할을 맡았던 국제여성조직으로 북한의 여성단체도 일찍이 여기에 가입했다. 51년초에 조선여성동맹은 유엔군의 침략을 호소하며 유엔군 참가국 여성들에게 남편이나 자식들을 조선에 보내지 말도록 연대를 호소했다. 이에 응해 국제민주부인연맹이 51년 5월에 처음으로 조사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보고서에는 황해도 신천군의 양민학살 등의 집단학살, 비전투지역 폭격, 국제법에서 금하는 살상무기 사용 이외에 미군에 의한 전시 성폭력 등의 전쟁범죄 사례가 고발되어 있다.

    또한 이 조사가 이루어질 무렵, 북한은 미군이 세균무기를 사용했다고 공식 항의한다. 한국전쟁기 미군의 세균전에 대한 의혹은, 구일본군 생화학부대에 대해 전쟁책임을 면책하는 대신 정보를 넘겨받은 미국의 전범처리에 비판을 가하고 있었던 소련의 입장에서는 호제였다.

    또한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군을 아시아에 대한 지배야욕을 드러냈던 일제와 연속성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가시물로서 주목되었다.

    미국은 그 대응에 부심하여, 유엔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공산 측에 제의했지만, 유엔을 신뢰하지 않은 공산 측이 독자적으로 실시한 것이 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조사와 52년 6월부터 8월에 걸쳐 행해진 국제과학위원회의 조사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평화옹호 세계대회의 지역적 국제회의로 1952년 10월에 베이징에서 개최된 것이 아시아 태평양지역 평화옹호대회였다. 이 대회는 세계평화평의회가 베를린 호소문 등에서 지역적 국제회의 개최를 주창한 것의 아시아판이었다.

    이 대회에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37개국 대표가 참가했고, 그때까지 GHQ의 불허로 세계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던 일본도 여권 획득을 위한 범야권의 농성 끝에 당시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였던 미나미 히로시(南博)를 단장으로 하는 11명의 대표를 베이징으로 파견할 수 있었다. 북한도 한설야, 정성언, 서춘식 등을 대표단으로 파견했다. 이 회의의 의제는 당시 아시아의 현안이었던 한국전쟁의 평화적 해결과 일본의 단독강화와 일미안보조약 체결에 따른 재군사화(기지국가화) 문제가 핵심이었다.

    미군의 세균전 및 일본의 재무장화를 반대하는 내용의 포스터(1952년)

    우선 일본문제에 관해 보고를 한 것은 공산당 노동운동가이자 이후에 중국 잔류 일본인 귀국문제 등에 진력하는 가메다 도고(亀田東伍)였다. 그는 미일 군사동맹에 대해 비난하며, “한편으로 아시아에서의 침략을 감행하려는 미국 전쟁 상인들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원조하며 일본을 새로운 침략 전쟁의 도구로 전화하려고 기도하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재생을 추구하며 ‘대동아 공영권’의 옛 꿈을 재현하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아시아의 집권자로 군림하고자 미국의 원조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한설야의 조선문제에 관한 보고가 이를 이었는데, 그는 “이 지역에서 평화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서는 미제 침략 전쟁의 연장과 확대를 막아야 하며, 먼저 조선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비인간적 폭력과 세균전의 죄악을 즉시 제거시키고, 합리적인 기초 위에서 전쟁을 즉시 종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회는 미국의 세균전을 견책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종료했는데, 거기에 일본 대표 미나미 히로시와 북한 대표 최삼열이 나란히 서명한다. 북-일의 민간인 대표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처음으로 나란히 선 순간이다.

    세균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러한 세계평화운동의 세균전 공세는 미국 측을 상당히 위축시켰음은 키신저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공산 측이 심리전에 뛰어나다는 것은, 한국전쟁 중에 우리가 세균전을 했다는 비난공격을 한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원폭을 사용하지 못하게, 혹은 중국 영토를 폭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모략이었을 것이다. 즉 이러한 위험을 명확히 언급하는 것은 약점을 고백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공은 우리의 세균전이라는 것을 비난함으로써 미국은 어떠한 비열한 수단이라도 쓸 수 있다는 인상을 부여해 적어도 아시아의 일부 여론을 반미로 돌려 버렸다. 동시에 그렇지 않아도 이미 대량살상무기 사용에 대해서는 상당히 강한 반대론이 있었던 것을 더욱더 조장하게 되었다.”

    세계평화운동의 가능성

    북한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자국과 자국민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냉전을 심화시켜 미제와의 전쟁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는 당초의 목표를 모조리 비껴간 참혹한 후과에 지금까지도 직면해 있다. 북한에 ‘전후’는 아직도 도래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공산당의 무장투쟁도 당원들에게 분열과 상처만을 남기고 거의 아무런 성과 없이 민심의 이반만을 초래하여, 52년 10월 선거에서는 전원 낙선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시의 일본의 일사불란한 대미협력이 미국의 세계군사전략에 강고히 편입된 오늘날의 미일동맹체제의 토대가 되었던 만큼, 일공의 무장투쟁은 그 구조에 균열을 가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당시 너무나도 미숙했던 국제연대의 감각 속에서도 핵무기나 세균전 등에 의한 인류 절멸의 위기를 막기 위해 전후 처음으로 적극적인 평화공세를 전개한 세계평화운동을 추동하는 힘이 되었고 이념이나 국경을 넘어 평화를 추구하는 국제 연대운동의 저력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전쟁이라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반도의 비극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고귀한 교훈이 아닐까.

    <참고한 자료>

    [아세아 및 태평양지역 평화옹호대회 문헌집], 국립출판사, 1953.

    하야시 히로후미, [일본의 평화주의를 묻는다: 전범재판·헌법 9조·동아시아 연대], 논형, 2012.

    小熊英二, [<民主>と<愛国>: 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と公共性], 新曜社, 2002.

    熊倉啓安, [戦後平和運動史], 大月書店, 1959.

    藤目ゆき 편, [国連軍の犯罪: 民衆・女性から見た朝鮮戦争], 不二出版, 2000.

    村上公敏・木戸蓊・柳沢英二郎, [世界平和運動史], 三一書房, 1961.

    Henry A. Kissinger, [Nuclear Weapons and Foreign Policy], NewYork:HarperandBros,1957.

    필자소개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진보신당 당원, [나는 사회주의자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의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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