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삶...로맨스와 해프닝
[파독광부 50년사] 이국에서의 로맨스, 언어의 차이가 낳은 해프닝...<검정밥-7>
    2013년 05월 24일 01: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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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 낯선 땅 독일에서 이어지는 생활이 습관화됨과 동시에 우리들의 삶의 범위도 기숙사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독일인의 삶의 영역과 접촉되었고 여기저기에 독일여인들과의 로맨스가 맺어지기 시작했다.

젊은 청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고향을 멀리 떠나와서 홀로 살면서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에야 있을 수 있고, 있어야 마땅했다.

더구나 우리가 살던 고향보다 성의 개방이 앞서고 저지하는 사회관계와 윗사람의 눈길이 없는 이곳에서 젊은 청춘남녀들의 로맨스가 비록 국적과 피부의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없을 수 없었다.

우리가 살던 기숙사 길 건너편에 사는 독일 사람들은 저녁에 창문을 열고 창틀에 베개나 방석을 걸친 후 거기에 기대어 창밖에 머리를 내어 밀고 바깥구경을 하면서 이웃 혹은 길을 지나가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습관이었다. 우리가 창문을 열면 저쪽 편에 사는 사람들이 “할로” 하면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우리 방 건너편에는 서른 살이 아직 안되어 보이는 젊은 부부가 세 살과 다섯 살 정도 되는 딸아이 둘을 데리고 살았다. 저녁이면 언제나 정답게 부부끼리 창틀에 기대어 바깥구경을 하다가 우리가 창문을 열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남편은 제철공장에서 일하고 부인은 가정주부로서 아이들과 집안 살림을 돌보았다.

우리 옆방에 A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우리처럼 건너편과 인사를 하며 지나다가, 하루는 건너편 젊은 부부의 아이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인형을 선물했다. 이렇게 가까워진 사이가 되자 A는 매일 같이 그 집에 드나들듯 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창문을 열면 저쪽 편에 A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A와 젊은 부인이 정이 들었다. A가 그 집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에 아이들이 나와서 바깥에서 놀았다. 자기들끼리 재미를 보느라고 아이들을 바깥에 내 보낸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이웃사람들도 차츰 눈치를 채게 되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창문을 열면 옆집 영감과 할멈이 우리에게 우리 옆방을 가리킨 후 자기들 옆집 위층을 가리키며 왼손 엄지와 둘째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든 후 오른 손바닥으로 동그라미를 치는 시늉을 했다. 너희들 옆방 사람이 지금 우리 옆집 여인과 자고 있다는 표시였다.

어느 날 오후에 아이들이 또 나와서 집 앞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던진 공을 잡으려다 큰 아이가 차에 부딪혔다. 언니가 차에 받히자 작은 아이가 비명을 지르면서 울었다. 이 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벌거벗은 채로 창문으로 내다보고는 실내에 입는 엷은 겉옷만 걸치고서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서 엄마 품에 안기니, 단추도 천천히 잠글 여유가 없었던 젊은 여인의 벗은 아랫도리가 몽땅 드러났다.

이웃사람들이 이제는 그 젊은 여인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아니했으나, 긴급 구조차가 와서 정확한 진찰을 하기 위해서 병원으로 싣고 갔다. 이 사실을 나중에 집에 와서 알게 된 남편이 A를 찾아왔다. A는 겁이 나서 피해서 숨고 없었다. 남편은 나중에 또 오겠다며 돌아갔다.

남편에게 들켰다는 사실이 두려웠던지 A는 그 날부터 자취를 감추었는데, 후에 들려오는 소문에 네덜란드로 도망을 갔다고 했다. 며칠 후에 젊은 남편은 자살했고, 그 해가 지나기 전에 그 여인은 아이 둘을 데리고 어딘가로 이사를 갔다.

건너편의 창문은 저녁에도 닫혀 있었고 친절하던 인사는 없어졌다.

우리가 사는 기숙사 앞에 약 사백 평 되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기숙사에 사는 사람들이 바람 쏘이러 나가는 곳으로 이용했고, 근처에 사는 늙은이와 부인들이 갓난아기가 든 유모차를 끌고 와서 바람을 쐬며 앉았다간 가곤 했다.

이 공원에 ‘게르다’라는 소녀도 제 여동생과 함께 자주 놀러왔는데 가끔 한국 사람들이 게르다와 이야기도 했다. 이러는 중에 한 사람이 게르다와 특별히 친해지고 게르다의 집에도 초대받아 가서 그녀의 부모와 형제자매와도 친하게 되었다. 게르다는 독일 사람으로서는 키가 작은 편인 약 160cm 정도 되는 열일곱 살의 예쁜 소녀였다.

게르다와 사귀는 한국 사람은 기혼자로서 아이가 둘이나 있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 사람은 게르다로부터 아이를 뱄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낙태를 시키려고 했으나 독일에는 낙태수술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게 된 이 사람은 그 후론 행방불명이 되었다.

게르다는 아버지 없는 아이를 낳았는데, 정말 인형 같이 예쁜 사내아이로 이름을 ‘마틴’이라고 지었다. 게르다의 부모들이 가끔 유모차를 끌고 공원으로 놀러 와서는 아기를 우리에게 보이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한국인과 독일인의 인간성의 차이를 느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양가집의 소녀가 외국에서 돈벌이하러 온 노동자를 사귀고, 감히 부모에게 집에 초대하자는 말을 꺼낸다는 사실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했을 경우 부모의 반응은 어떨까? 아이 밴 소녀는 아버지에게 맞아 죽지 않았을까? 또 아이를 수술해서 버리지 않았다고 할 경우에도, 출생 후 그 아이가 여기처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저렇게 받을 수 있을까? 사랑은커녕 외국으로 양자로 팔려갔을 것이다.

이 외에도 한국인과 사귀다가 아이를 밴 후 배신당한 여인들이 몇몇 있었고 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흔적이 없었다. 또 이런 여인들은 곧 다시 다른 한국 사람들을 사귀고 결혼도 했다.

국경을 넘는 로맨스와는 상관이 없는 우리들의 노동판은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운명을 여전히 꽉 붙든 채 좌우하고 있었다.

한국 남해의 독일인 마을. 파독간호사들과 독일인 남편이 귀국하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 남해의 독일인 마을. 파독간호사들과 독일인 남편이 귀국하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중하고 돈을 벌고 모으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라고 해도 내 주위와 연관성을 맺는다는 사실은 내 주위를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수반하게 됨으로 자연적으로 거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며 이와 반비례로 처음에는 열심히 하던 광산일도 이제는 점차적으로 역정이 날 정도였다.

그동안 팔다리를 잃은 사람도 생겼고 손가락 하나쯤 잃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소식은 우리에게 충격과 좌절감만 길렀지 삶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일을 가지 않고 병을 핑계 삼아 날짜만 보내려고 했다. 병으로 놀아도 첫날만 돈이 없지, 그 후 여섯 주 동안 돈이 계속 지불되었기에 되도록 성한 몸 가지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의사에게 가서 벌어지는 꾀병의 연극은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이 머리를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여서 손으로 받치고 진찰실로 들어갔다. 의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 목과 어깨를 가리키며 목을 바로 세울 수 없다는 시늉을 했다. 목이 아파서 머리를 바로 들 수 없으면 제 아무리 장수라도 일을 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의사가 약 처방전을 써서 주며 병 조리를 하고 일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자기의 꾀가 적중했다는 기쁨에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감사하다며 넓죽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이것을 본 의사가 그 사람더러 다시 돌아오라고 손짓을 한 후 야단을 쳤으나 그의 쇼가 기가 찼던지 그 날 하루만 병가를 허락했다.

그 후로는 이 의사는 한국 사람의 병에 대해서는 잘 믿지 않았고 또 세심하게 진단을 했다.

옛날에 군대생활 할 적에 배워둔 방법도 나왔다. 발을 식초에 담가서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에 껍질이 벗어지게 해서 발이 아프다고 진찰소로 갔다. 의사는 발이 헐어지는 상태를 보고 놀라며 집에서 쉬면서 약을 발라서 조리하라고 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발병을 가진 한국인이 많아졌다. 그래서 의사는 무좀으로 진단하고 처방전을 주었으나 병가는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발이 아파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의사는 무좀은 노동력과 상관이 없으며 무좀이 있어도 일은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고 했고, 동시에 회사에 안(案)을 내어서 한국인들은 무좀에 잘 걸리는 것 같으니 장화는 되도록 주지 말고 구두를 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의사가 영리하고 독하다고 해도 한국 사람의 꾀에는 당하지 못했고 기숙사에는 병가로 노는 사람이 많아졌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언어의 장애로 인한 표현의 어려움도 많았다. 나하고 친하게 지나던 Z형은 나보다 나이가 열세 살이나 많은 분으로, 군대생활을 오래하다가 제대하고 독일로 왔다. 키가 작았으나 군에서 수년 간 단련한 몸이라 아주 단단했다. 어릴 때는 만주에서 살았기 때문에 중국말도 잘 했고, 일본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어에도 능숙했다.

하루는 그 형님이 벙글벙글 웃으면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야 정의야, 이것 봐.”

형은 손에 들고 있던 병가(病暇)진단서를 자랑삼아 내게 보였다.

“형님 왜 어디가 아프십니까?”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저께 국수를 끓여 먹을 때 돼지족발을 넣어서 먹었더니, 그것 때문인지 하루 종일 설사가 나기에 오늘 의사에게 갔더니 병가를 일주간 끊어주었어.”

통역이 없이 자기가 설명해서 받은 병가진단서라서 그렇게도 자랑스럽고 즐겁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설명을 했는가 물었다. 그 대답이 가관이었다.

“의사한테 가면서 어떻게 설명할까 궁리했지. 설사라는 말을 몰라서 논리적으로 독일 말을 구상했어. 설사는 즉 물똥이다. 물똥은 물과 똥이다. 물은 봐싸(Wasser)이고 똥은 솨이쎄니까, “봐싸 솨이쎄” 하면 알아듣겠지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의사 앞에 나오니까 그 사람이 어디가 아프냐고 묻기에, 손으로 궁둥이를 치면서 ‘봐싸 솨이쎄 쏴아 쏴아’ 하면서 뒤에서 무엇이 뿜어 나오는 시늉을 하고 배를 끌어안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아픈 표정을 했어. 내 설명이 기가 막혔던지 대뜸 병가를 끊어주더라.”

이것을 듣고 있던 나는 배를 붙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 후로 우리는 설사를 ‘두르히팔(Durchfall)’ 대신 ‘봐싸 솨이쎄’라고 자주 썼다.

우리 광산촌에서는 어느 독일인 스타이거가 자기 갱에서 일하는 한국인 광부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부인이 정성껏 장만한 저녁 식탁에서 독일인이 음식이 맛이 있느냐고 물었다. 초대받아 갔던 한 사람이 대답인사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대뜸 독일어로 대답했다.

“즈봐이 만 (두 사람) 에쎈 (먹다), 아인 만 (한 사람) 토트 (죽다), 이히 봐이쓰 니힛트 (나는 모른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부인이 손에 들었던 칼과 포크를 접시에 쨍그렁 놓으며 무릎 위에 있던 냅킨을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서 식탁 위에 내동댕이치고는 일어나서 울음 섞인 비명과 함께 옆방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스타이거도 화를 내면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게 아직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들고 있는 손님에게 일어나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독일인들은 ‘두 사람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을지 모른다’ 라고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자기들의 친절과 정성을 모욕해도 이만저만한 모욕이 아니었다. 밀리다시피 그 집에서 쫓겨 나온 두 사람은 후에 통역을 통해서 오해를 풀긴 했지만 정말 기막힌 오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장애로 인하여 일어나는 삽화적인 사실들은 한국 광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우리와 같은 시기에 독일에 와서 일하고 있던 간호원들에게도 있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한 간호원이 일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의사가 동료인 한국 간호원에게 왜 xx 간호원이 일을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간호원은 자기 동료가 식도(食道)에 염증이 생겨서 못 왔다고 설명을 하고 싶었는데, 식도가 독일어로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 간호원은 식도는 음식이 내려가는 길이다. 음식은 에쎈(Essen), 길은 스트라쎄(Strasse), 염증은 훼손된 것이니 카뿌트(kaputt)라는 단안을 내리고 “에쎈 스트라쎄 카뿌트” 라고 대답했다.

의사는 화를 벌컥 내면서 에쎈(Essen)의 길이 망쳐진 것과 xx의 결석이 무슨 상관이냐고 되물었다. 의사는 이웃에 있는 큰 도시가 에쎈이라는 도시인데, 이 도시의 길이 파손되었다고 알아들었다.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던 한국 간호원은 계속 자기 입을 가리키면서 “에쎈 스트라쎄 카뿌트”라는 말을 되풀이했고, 알아듣지 못하는 의사의 혈압은 점점 더 올라갔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었다.

언어의 문제로 생기는 일도 많았지만, 생활습관과 사회제도의 차이점에서 생기는 웃지 못 할 사연도 많이 있었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봄날에 한국인 몇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산보 겸 나갔다가 고속도로로 올라갔다. 한국에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고속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고속도로인 줄 모르고 잘 포장된 찻길을 자전거로 한참 신나게 달리고 있었는데 경찰차가 사이렌소리와 함께 파란 불을 번쩍거리며 뒤 쫓아왔다. 사람과 자전거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기숙사로 왔다.

자전거를 타고 고속도로에 올라섰기 때문에 자기뿐만 아니라 높은 속도로 달리는 차들에게 커다란 위험을 초래했다는 사실로 도로교통법에 의해서 벌금을 물고 또 자전거를 실어다 준 차에 대한 비용을 물어야 했다. 비록 큰돈은 아니었지만 외국의 법과 제도를 몰랐기 때문에 벌금을 물었는데, 실제로 독일에는 몰랐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게 되는 법은 없었다.

이러한 예가 또 하나 있었다. 독일에는 들과 공원에 토끼가 많다. 그래서 토끼가 길을 건너다 차에 치어 죽는 일이 허다했는데, 하루는 어느 사람이 밤일을 하고 새벽녘에 집에 오는 길에 길가에 누워 있는 토끼를 발견했다. 아마 차에 그냥 받히기만 했는지, 상한 데가 없고 아직 체온이 따스했다.

오래 만에 토끼볶음을 맛보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토끼를 자전거 핸들에 매고는 집으로 달렸다. 공교롭게도 오는 길에 경찰차와 마주쳤다. 경찰은 그를 밀렵자로 인정하고 경찰에 연행했다. 그는 손짓 발짓하면서 길가에 죽어 있는 토끼를 주워서 오는 길이라고 변명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독일의 수렵법에는 죽은 짐승을 발견하여 가지고 가는 것도 사냥으로 간주되었다. 통역이 가서 자초지종 사정을 이야기한 후에야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여름에 개를 잡아먹으려다 경찰에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가 이 나라의 제도와 규칙을 몰랐다는데서 기인하기도 했지만 또 그러한 제도와 규칙을 무관심하게 보았고 알려고 하지 않은 데에서 오기도 했다.<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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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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