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제원에서 일어난 미스터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①(윤동주 하숙집터)
        2013년 05월 23일 03: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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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의 여러 독특한 특징 중에 하나는 ‘법정동’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동네는 종로구 행촌동. 권율 도원수가 태어난 집터가 있는 곳이고, 집터에는 사백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아직도 있다. 경복궁역을 중심으로 효자동과 사직동, 그리고 교남동은 골목을 하나 지날 때마다 동 이름이 다르다. 물론 ‘행정동’이 아닌 법정동이다. 이 글은 그 많은 법정동들의 번지수를 둘러싼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문패를 달고 시작한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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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1월, 매서운 겨울바람이 홍제원 화장터에 계속 불어 닥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정오 무렵이 되자 수천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서울뿐만 아니나 지방에서도 올라온 언론사들로 북새통을 이룬 가운데 기자들은 초조하게 연신 애꿎은 시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된 오후 2시가 되어서도 사형집행이 예정된 정국은(鄭國殷)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홍제원의 모인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곧바로 손원일 국방장관 명의의 보도관제가 내려졌다.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였다.

    그런데 언론사 기자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도관제가 사형집행을 함구하라는 의미일 수밖에 없는데, 정작 홍제원에 정국은은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이해할 수없는 것은 집행장소가 변경된 것인지, 집행이 연기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국방부는 답변을 거부했다. 보도관제를 내린 쪽에서 스스로 입을 닫아버린 기묘한 상황이었다. 짧은 해가 안산을 넘어가자 홍제원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 둘씩 돌아가고 정적만이 남아버렸다.

    이튿날 일부 언론사들은 ‘국제스파이사건 주범 정국은 사형집행“이라는 헤드라인을 내보냈다. 어느 언론사도 확인하지 못했고, 국방부조차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은 내용이었다.

    안개가 조금도 걷히지 못한 것은 며칠 후 열린 백두진 국무총리와 출입기자 간담회 자리였다. 홍제원 질문에 대해 국무총리의 답변은 하안거를 마친 스님의 선문답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사형집행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총리는 “변동사항을 보고 받은바 없다”고 답변했다. 기자들이 재차 집행이 되었다는 의미냐고 묻자, “신문에는 그렇게 났더라. 자세한 것은 국방부 소관”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신들이 쓴 추측기사가 부메랑이 되어 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기자들도 할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개란 시간이 흐르면 걷히는 법. 총리가 국방부장관 소관이라는 답변이 발목을 잡았다. 기자들은 국방장관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군사재판의 결정권자가 국방부장관인 것도 사실이고, 국무총리의 발언마저 있는 상황에서 마냥 침묵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정국은의 사형이 집행되기로 한 며칠 후, 마침내 손원일 국방장관이 기자단에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의 답변은 동안거를 마친 스님의 답변이었다. “정국은은 있던 그 자리에 있다”라는 것이 답변의 전부였다. 그 자리가 형무소를 의미하는 것인지, 집행은 연기된 것인지 등에 대해서 손 장관은 또다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법사상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기자들은 기사 대신에 소설을 써야할 판이었다. 동아일보의 가십코너인 공기총은 짤막한 한 문장을 내보냈다.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정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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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국은과 국제간첩사건

    1952년 초, 정국은이 부산에 나타나자 언론계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해방직후, 남로당의 비공식 기관지라고 불린 「태양신문」의 가두판 발행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도피했던 그가 전쟁의 상흔이 자욱한 부산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광복동 한복판에 소리 없이 설립된 「동양통신」이라는 언론사의 편집국장 직책을 가지고 얼굴을 내밀었다.

    언론사로서는 최초로 최신식 텔레타이프(Teletype) 수신 장치를 갖춘 사실이 알려지자, 현역 국회의원이 사장이라는 사실은 주목조차 받지 못했다.

    정국은은 해방직후 재정난에 시달리던 육군본부의 기관지인「철군」의 인수를 주도하면서 서울 언론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 얼마 후, 신문의 이름을 「국방신문」으로 변경하고 군의 주요기관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부와 친분을 쌓기 시작하자 정국은은 연줄을 이용해 경찰까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데 성공했다. 경찰서장보다 한 단계 높은 ‘경무관’이라는 직함까지 손에 넣은 정국은은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행보를 계속했다.

    하지만 남로당이 불법화되면서 ‘좌익언론’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실시되었고, 국방신문과 태양신문은 폐간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좌익언론인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몸을 숨겨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연합신문 서울특파원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일본에 도피하는 것이었다.

    그런 정국은이 갑자기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동양통신」이라는 무기를 손에 넣자 ‘여순사건’과 관련해서 자유당정권에 정면으로 화살을 겨누었다.

    여전히 전시라는 상황에서 정국은의 전면전은 누가보아도 무모한 일이었다. 마치 혈혈단신으로 최후의 전쟁에 나선 전사의 모습과도 같았다. 하지만 없는 죄도 만들어낸다는 김창룡의 특무대가 보기에는 스스로 진술서를 쓰는 간첩이나 마찬가지였다. 국제간첩 및 정부전복음모. 정국은의 짧은 작두춤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정국은의 사형이 집행된 것은 국방부장관의 결제가 난지 한 달도 더 지난 2월이었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요컨대, 국방부장관보다 더 윗선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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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통신의 사장은 자유당 소속의 국회의원인 양우정이라는 인물. 하지만 이때의 양우정은 좌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때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기관지 주간으로 좌익활동을 하였지만, 해방이후에는 줄기차게 이승만을 찬양하는 것이 본업이었다.

    양우정은 정국은 간첩사건으로 국회에서 제명되고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이승만대통령은 즉각 사면하며 그를 비호했다. 양우정이 사면된 이후 정국은의 사형집행 역시 또 다른 비호를 받으며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틱하게 막을 올린 이 미스터리는 언론의 ‘간첩비호’라는 공세에 밀려 ‘조기종영’으로 끝을 맺었다. <계속>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서점<레드북스>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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