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천황와 헌법개정
    그리고 일본 보수층의 반발
        2013년 05월 23일 11: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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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베 일본총리의 망언과 일본사회의 급속한 우경화가 국제적 논란과 이슈가 되고 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일부 우파 정치인들의 발언만이 아니라 천황제라는 일본의 특이한 사회체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천황제와 일본의 헌법개정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다룬 글을 소개한다. <레디앙>의 제휴 매체인 <ㅍㅍㅅㅅ>에 실린 未完님의 글(관련 링크)을 동의를 얻어 두차례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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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닷없이 리승환 수령으로부터 페북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뜬 순간, 나는 원고 의뢰를 직감했다. ‘여왕’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몇 해 전에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여성 천황 논의를 떠올렸다.

    먼저 ‘천황’ 표기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하자. 현재 한국의 언론 보도에서는 ‘일왕’이라는 표현이 정착되어 있다. 필자는 이러한 표현의 의도와 문제의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나, 본 글은 일본 내부의 문제로서 천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천황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오늘날 대다수 외신에서도 ‘Emperor’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천황’과 ‘일왕’ 표기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참조 링크 : ‘일왕’이냐 ‘천황’이냐)

    이번 글은 크게 둘로 나누어서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일본의 여성 천황 문제와 최근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일본의 헌법 개정 문제를 이어서 쓰려 한다.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두 문제 사이에는 최근 일본 국내정치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흐름이 존재한다.

    여성 천황론의 논쟁 배경 : 천황의 씨앗은 남자를 통해…

    여왕이 있는 영국을 비롯해, 많은 입헌군주제 국가는 여성 역시 왕이 될 수 있다. 이와 달리,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남성만이 천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절대적 규정에는 항상 반발이 따른다. 일본 역시 예외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정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키워드가 ‘여성 천황’이었다. 그렇다면 왜 여성을 천황으로 즉위시키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래 그림을 보자.

    일본 천황 가계도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일본 천황 가계도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한자로 쓰여 있는 이름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 가계도의 포인트는 분홍색으로 표시된 인물이 모두 ‘여자’라는 점이다. 가장 윗대로 표시된 다이쇼(大正) 천황 이후 3대에 걸쳐서 태어난 황족은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더군다나 1965년에 현 천황의 둘째 아들인 후미히토(文仁)가 태어난 이후, 천황가에는 장장 4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남자가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다. 후사가 끊길 것을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여성 천황론을 둘러싼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일본의 여성 천황론이 단순히 즉위하는 천황의 성별을 문제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천황으로 즉위한 여성 황족이 다른 남성 황족과 결혼한다면 그 자손 역시 황족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일반인 남성과 결혼할 경우 그 자녀의 아버지는 황족이 아니게 된다. 2000년대 초 당시, 천황의 첫째 아들 나루히토(徳仁)의 자녀는 2001년에 출생한 아이코(愛子) 한 명뿐이었으며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가 결혼할 수 있는 남성 황족은 없었다.

    아버지가 황족이 아닐 경우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일본 황실은 전통적으로 ‘남계(男系)’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어느 대의 천황이든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면 제1대 천황에 도달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이 될 경우, 여성 천황이 일반인 남성과 결혼하는 순간 남계 혈통이 끊기게 된다.

    결국 일본의 여성 천황론은 여성으로도 혈통이 이어지는 ‘여계(女系)’천황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역사적으로 일본에는 8명 10대(2명은 중복 재위)의 여성 천황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남계 황족이었으며 배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2000년대 초반 여성 천황론이 대두된 이유였다.

    한국과 같이 왕실을 갖고 있지 않은 나라에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여계 여성 천황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마이니치 신문이 2005년에 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의 71%가 여계 천황에 찬성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인사들은 전통을 끊는 일이라며 여계 천황론에 강하게 반대했다. 일본 미디어의 보도가 연일 이어졌으며 각 진영의 입장을 담은 서적들이 잇달아 출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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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이나 천황에 오른 고교쿠 천황(皇極天皇)

    여성 천황론의 배경: 천황가의 자식이 줄어든 이유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왜 이러한 문제가 생겨났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쇼와(昭和) 천황은 ‘종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무조건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당시 발표된 조서(詔書)에서 관련 내용은 “짐은 미영중소 4개국에게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겠다고 일본 제국정부에 통고했다”는 부분뿐이다. 이후 일본은 연합군(실질적으로는 미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된다.

    이듬해 1월 1일에 천황은 이른바 ‘인간선언’이라 불리는 조서를 발표하게 된다. 보통 항복을 선언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인간선언이 함께 이루어졌다고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8월 15일의 방송에는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천황의 ‘인간선언’ 조서는 이 날 관보에 실림으로써 효력을 가졌다.

    이로 인해 메이지(明治) 천황 이후 60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신격화되어 ‘인간의 모습을 한 신(現人神)’으로 불리던 천황이 자신의 신격을 부정한다. 여기에는 당시 연합군 총사령부(GHQ/SCAP)의 의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으며 원문은 영문으로 작성되었고 그 뒤에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민주주의의 도입과 함께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적 파시즘의 청산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일본의 황족 역시 이러한 변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1946년 11월에 제정된 현행 일본 헌법에 따라, 47년 1월에는 황실의 규범을 담은 새로운 ‘황실전범’이 법률로서 제정된다. 이 황실전범에 의해 11개 분파 51명의 황족이 민간인이 되었는데 이를 ‘황적이탈(皇籍離脱)’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황족의 수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분파가 사라짐에 따라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와 함께 후궁(측실) 제도 폐지의 영향도 컸다. 다이쇼 천황(재위 1912-26)이 후궁 제도를 폐지한 이후 4대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황족의 숫자와 더불어 남성 황족의 출산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패전 이후에는 일부일처제가 바뀔 가능성도 완전히 사라졌다.

    최후의 다처를 거느린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뭔 컴플렉스인지 자신의 실물을 우측처럼 미화했다고 한다. 포샵의 기원일지도…

    최후의 다처를 거느린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뭔 컴플렉스인지 자신의 실물을 우측처럼 미화했다고 한다. 포샵의 기원일지도…

    황실전범 개정을 둘러싼 논쟁

    2001년 여자아이를 출산한 첫째 며느리는 이후 남자아이를 출산하지 못했다는 점과 함께 계승 문제에 과도하게 주목하는 일본 언론으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입원까지 하게 된다. 어찌 한국 드라마 같다. 이에 남편인 나루히토는 ‘아내의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예외적인 발언을 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임기 2001-2006)는 2004년 말 ‘황실전범에 관한 지식인회의’를 자문기관으로 발족시켰다. 정부 차원에서 남계 남성 황족만을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는 황실전범에 대한 재검토를 시작한 것이다. 이 회의는 이듬해에 여성・여계 천황을 용인하는 방향을 제시한 최종보고서를 제출했고, 고이즈미 내각은 이를 바탕으로 황실전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한 일본 보수층의 반발은 거셌다. 2006년 3월에는 ‘황실의 전통을 지키는 국민의 모임’이 1만 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하여 개정 반대 운동을 펼쳤으며 언론에서도 이른바 보수 논객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옛 황족을 복귀시키거나 그들의 남자아이를 입양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현 천황의 사촌동생이며 조금 특이한 인물로 알려진 황족 도모히토(寛仁)는 여계 천황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남계 계승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예전처럼 측실(후궁)을 둔다. 나로서는 대찬성이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조금 어려울 듯 하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여계 천황을 둘러싼 이러한 논의는 2006년 9월 천황의 둘째 며느리가 남자아이를 출산함으로써 물밑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현 천황의 첫째 아들(계승서열 1위), 둘째 아들(2위), 첫째 남자 손자(3위)라는 세 명의 남성 황족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 역시 황실전범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둘째 며느리의 리즈 시절.

    둘째 며느리의 리즈 시절.

    이렇게 해서 천황 자리의 계승 문제는 해소되었으나 결코 해결된 것은 아니다. 황족의 수 자체가 적은 것은 물론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역시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여성 여계 천황 문제는 언제고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주변 국가인 한국인에게 일본의 왕위 계승 문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 문제는 일본의 보수화 정도를 측정하는 일종의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논하고자 한다.

    필자소개
    <ㅍㅍㅅㅅ>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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