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귀신에 잡혀갈 뻔한 사연
[파독광부 50년사] 아델하이드와 P군 이야기...<검정밥-6>
    2013년 05월 21일 03: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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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 정원에서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 겸 판데스트라트씨 가정을 방문하고 싶었다. 한국 사람들 한번 초대했더니 감사하다고 인사도 오지 않더라는 말을 할까 싶어서였다. 나는 함께 초대받아 갔던 조 군과 배 군에게 그 뜻을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반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나혼자 가라고 했다.

그 동안에 독일 노동시간이 한 주에 40시간으로 줄어졌기에 주말에는 시간이 있었다. 주말에 근무를 하면 더 많은 돈을 받았지만 대부분 가정을 가진 독일 사람들이 맡았고 사람이 부족할 때면 우리에게도 물었다. 나는 건강을 생각해서 주말에는 전적으로 쉬기로 작정하고 일을 가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전에 꽃을 사 들고 나 혼자 판데스트라트씨 집으로 찾아갔다. 아무 사전 연락 없이 방문하는 것도 실례라는 것을 나는 그때에는 아직 몰랐다. 내가 그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온 가족이 시장에 가려고 문을 열고 나왔다. 30초만 늦게 왔더라도 우리는 다시 못 만났을 것이고, 한번 찾아갔다는 핑계로 나는 그 사람들의 가정을 다시 한번 방문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경영은 하느님께서 하신다.

나를 알아본 마리아와 게르하르트 부부는 아주 반가워했다. 자기들이 지금 막 상점에 무엇을 사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면서 돌아오면 함께 커피를 나누자고 했다.

나는 차 뒷자리에 아델하이드와 함께 앉았다. 아델하이드는 나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면서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독일어로 대화할 수 있어서 아델하이드 부모님들도 아주 기뻐했다. 서투른 내 발음과 문장 구성에 폭소를 터뜨리는 일도 있었다.

물건을 산 후 나를 그들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오후에 커피만 마신다는 것이 저녁까지 대접을 받은 후, 게르하르트씨가 자기 차로 기숙사까지 바래다주면서 2주 후 주일에 자기 집에서 점심을 같이하자고 나를 또 초대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격주마다 주일을 그 집에서 보냈고, 매 주일은 아델하이드와 함께 그가 다니는 교회에서 예배를 보았다. 우리는 또 예배 후에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 때에는 헤어졌다. 그러니까 아델하이드는 매주 만나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의 독일어도 급진적인 발전을 했고 이제는 한 주에 한번씩 서로 편지도 쓰기로 했다.

땅귀신

초여름에 나는 휴가를 받았다. 작업일 18일을 휴가로 받으니 공휴일과 주말을 합치면 거의 한 달을 휴가로 보낼 수 있었다. 이 기회에 유럽 구경을 하기로 결정하고 북으로는 함부르크에서 시작해서 베네룩스 3국과 서독 전역을 돌아서 집에 오니 꼭 25일을 보냈다.

여행 중에 프라이부르크와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대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도 물어보았다. 두 군데 다 공부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만 내가 학생자격으로 독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장학금을 부여할 수 없으니, 1~2년간은 자비로 살면 그 후에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선할 수 있다고 했다.

통역이 내게 말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나더러 당신이 광부로 왔기 때문에 광산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광산을 떠나 다른 일을 하면 체류허가가 없음으로 강제송환된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학생신분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체류허가가 부여된다고 했다. 그때부터 공부하겠다는 결정이 섰다. 그래서 첫 해에 버는 돈은 여행과 유럽사회를 보고 배우는데 쓰고, 남은 2년 동안 버는 돈은 저축해서 공부하는데 쓰기로 작정했다. 앞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전망에 나는 한없이 기뻤고 다시 막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힘이 들지 않았다.

나는 휴가를 마친 후에 P군과 함께 한 짝이 되어 막장 도급을 했다. 정신력으로서는 그 어려운 일을 쉽게 견디고 넘길 수가 있었지만, 일 자체는 여전히 내가 가진 전 체력을 요구했고, 일하는 도중에는 항상 주의와 긴장을 전제하고 있었다. 일하는 동안 천반에서 작은 돌이 떨어져 어깨와 가슴 혹은 등을 찢어도 조그만 상처를 돌볼 겨를도 없었다.

우리가 일하던 막장은 탄층이 2m 정도 되어서 몸을 구부리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았으나 워낙 지압이 크게 작용하는 막장이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갑자기 ‘쿵 꽝’하는 벼락같은 소리가 나고, 가끔 이 폭음과 함께 세워둔 동발이 한두 개 넘어질 때도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일을 할 때는 위쪽에서 넘어지는 동발에 부딪히지 않도록, 그리고 일을 쉴 때는 항상 동발을 등에 기대고 앉아서 넘어지는 동발에 맞지 않도록 조처를 했다.

P군은 몸도 뚱뚱하고 차분한 사람이면서도 겁이 많았다. 우리가 앉아서 빵 먹는 시간에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나면 껑충 뛰어 일어나서 적어도 십 미터는 도망을 갔다. 그래서 나와 우리 곁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폭소를 자아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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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는 석탄을 깎는 철대패와 중간 아래에는 깎인 석탄을 운반하는 운송철판, 그리고 왼쪽에는 막장의 천반을 바치고 있는 지주(쇠동발 = 스템펠)와 천반에 받치는 받침대(사진=이정의)

하루는 갑자기 일어나는 벼락소리가 아니고, 계속 터뜨리는 대포소리 마냥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위에서부터 들려오는데,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니 천반이 한 뼘씩 폭음과 함께 푹푹 내려앉았다. 생각하고 뭐하고 할 여유가 없었다.

“야! 달아나자!”

외치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석탄을 운송하는 철판으로 뛰어 들어가 아래로 달려갔다. 뒤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천둥소리는 나보다 빨라서 나를 추월해서 지나갔다.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나는 달리는 철판에서 나와서 P군을 돌아보았다. 그가 없었다. 나는 머리끝이 쭈뼛하는 것을 느꼈다. ?! ?! 심장이 망치질을 하기 시작했다. 두 다리에 힘이 빠지며 주저앉을 것 같았다.

서 있는 동발을 움켜잡으면서 정신없이 내 일자리로 올라갔다. 너무도 순간적인 일이라 오래 걸린 것 같았으나 나는 기껏해야 20m 정도 밖에 달아나지 못한 것이었다. 자리에 돌아오니 P군이 철판 옆에 기대어 돌바닥에 앉아 있었다. 안전모자가 벗겨진 체 “귀신, 땅 귀신…” 하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실신한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귀신, 땅귀신”이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몸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어이! 박 군! 정신차렷!”

고함을 지르면서 혹시 다쳤는가 하고 그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만졌다. 아무 데도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냄새가 났다. 구린내였다. 다시 한번 검사를 해보니 틀림없이 똥냄새였다. 겁에 질리면 생똥을 싼다더니 정말 P군은 겁에 질려 생똥을 쌌다. 그는 쇼크 상태에 있었다.

나는 고함을 질러서 스타이거를 불렀다. 누가 다쳤다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서 스타이거와 막장의 마이스터가 급히 달려와서 웬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앉아 있는 P군을 가리키며 일어났던 사실을 말했다. 경험이 있고 훈련을 받은 그들이 P군이 쇼크 상태에 있는 것과 똥을 싼 것을 알아차리고 나더러 P군을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나보다 무거운 그를 끌다시피 그의 팔을 내 어깨에 걸치고 막장을 나왔다. 그는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신, 땅 귀신 …”

주갱도까지 나오니까 벌써 연락이 되어 부상자 운반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상에 나오니 의사가 잠깐 P군을 검토하더니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상세히 말하라고 했다. 나는 통역을 통하여 사실의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통역이 나더러 몸을 씻고 집에 가라고 하면서, 오늘은 반나절만 일을 했어도 하루임금이 나온다고 했다.

P군은 구급차로 병원으로 실려 갔고 나는 집으로 왔다. 나는 방에 들어 와서 침대에 쭉 뻗었다. 팔을 머리 밑에 받치고는 땅속에서 있었던 그 일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천반이 푹푹 주저앉던 그 순간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위험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처음 당하는 일이라 정말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막장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도망가거나 동발에 기대어 몸을 움츠리고 주저앉았다고 했다. 경험에 따라 놀람의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겠지만, 기겁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만큼 위험했던 것 같았다.

‘얼마나 놀랐으면 P군이 똥을 쌌을까?’

그 이튿날 일을 마치고 도서를 맡고 있던 K형에게서 책을 두 권 빌려서 병원에 입원한 P군을 찾아갔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자는가 싶어 가만히 그의 침대 곁에 있는 의자를 당기고 앉으니 그가 눈을 떴다.

자지 않았다고 했다. 자기가 왜 병원에 누워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오늘 통역이 오면 알아봐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면서 나더러 잘 왔다고 했다. 그는 다시 한번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나에게 물었다.

“정의, 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자초지종을 그에게 알려주면서 똥을 쌌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기억을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띠우며 눈을 떴다.

“제길 헐. 돈벌러 왔다가 땅귀신한테 잡혀가는 줄 알았다.”

그는 어제의 장면을 연상하듯 눈을 감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그를 따라 가만히 그의 침대 곁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그는 눈을 다시 뜨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네가 고함을 지르며 운반철판에 올라탈 때 나도 동시에 자네를 따라 철판에 올라타려고 했지. 그런데 무엇이 나를 뒤에서 꽉 붙잡고는 놓지 않기에 놓으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몸을 빼려고 버둥거리는데, 쿵쿵하는 소리가 천반을 내리 앉히며 막 다가오지 않겠나. 이제는 땅귀신에게 잡혔구나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더라. 독일 사람들이 왜 땅귀신 있다는 말 자주 했잖아.”

“이 사람아 자네가 겁결에 귀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지, 땅귀신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네가 철판에 넘어타려고 했을 때 자네의 축전지의 줄이 동발 쐐기에 걸려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으니까, 자네가 귀신에게 잡힌 것으로 착각했단 말이야.”

“x할 것, 살다보니 별일 다 보는구나.”

한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는 그의 눈언저리에는 눈물이 방울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함께 눈물을 지었다. 이것이 운명을 같이하는 자들의 정인지, 나는 그와 이 일 후로 아주 친해졌다.

며칠 후에 그는 퇴원을 하고 또 집에서 한 이 주 쉬고 난 후 휴가를 받았다. 휴가 중에 그는 어디에 가지 않고 항상 집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계속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곧 누워 자고 밤중에 독일어 공부를 했다. 이것을 아는 그는 토요일이 되어서야 나를 찾아서 내방에 왔다.

하루는 P군이 통역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자기가 생똥을 쌌다는 것이 정말이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면서 또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라인강변에 자주 갔다. 물이 너무도 더러워서 수영은 할 수 없었으나 강가 잔디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며 고향생각과 더불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기에 참 좋았다.

P군은 전라도 여수에서 자라다가 13세에 목재상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인천으로 올라와서 그 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J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대학시절에 군대생활을 했기 때문에 대학졸업을 늦게 하고, 졸업 후 부친의 목재상을 돌보며 이 년간 사업을 늘이면서 재미를 많이 보았는데, 1964년 정초에 불이 나서 모아둔 것을 다 날려버린 후 독일로 오기로 결정했다.

화재 후에 조그맣게 다시 차린 사업은 아버지께서 맡아서 하신다고 했다. P군은 버는 돈의 절반은 아버지께 보내고, 다른 절반은 그의 약혼녀에게 보냈다. 돌아가면 조그만 셋방이라도 얻어 집을 나가서 독립한 후에, 아마도 중학교 접장생활을 할 궁리라고 했다. 세금도 절약하기 위해서 독일에 오기 전에 혼인신고를 하고 왔지만, 그의 약혼녀하고는 하룻밤도 함께 잔 일이 없었다면서, 세상에 결혼한 사람치고 자기처럼 숫총각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해가 강 건너 저쪽 지평선에 내려갈 무렵에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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