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증 이기려 시작한 청소 일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
    [노동자의 구술생애사②-2] 개개인의 등 뒤에는 저마다의 삶과 이야기 있어
        2013년 05월 20일 02: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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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자 구술생애사 두번째 노동자의 인터뷰 1회 부분

    ***

    남편이 갑작스레 떠난 뒤, 이경순 조합원은 3년 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했지만 우울증은 낫지 않았고, 이경순 조합원은 집을 벗어나 밖으로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경순 : 우리 아저씨 돌아가시고 나서 3년 동안 우울증이 생겨가지고, 아이고, 내가 뭐래도 집중을 해야지 안 되겠다 싶었어. 집에서 놀면 자꾸 병이 오고 우울증이 와. 마음을 어디다 의지할 데가 없더라고.

    그래서 이래선 안 된다, 나도 어디 직장을 나가야지 이러고 동네친구한테 말했지. 근데 친구가 “야, 니가 무슨 직장을 댕기냐, 남이 보더래두 흉본다. 집에서 놀던 사람인데 어떻게 가서 하겠느냐” 이래서 “남이라고 하는데 내가 왜 못햐?” 그랬더니 갸가 그럼 같이 하자구 그랬어. 근데 1년 동안 얘기가 없는 거야. 기다리다가 안 되겠어서, “야, 너 왜 학교 간다더니 안 가냐? 그럼 나허구 같이 가자” 그래서 데리고 갔어, 그 친구를.

    그래서 소장한테 말해서 이력서 한 통 해 가지고 전화번호도 적고 그랬더니 일주일 뒤에 연락이 오드라구. 마침 사람이 빈 데가 있으니까 여기 3공대로 오라구. 그래서 나가서 여태까지 다닌 거지. 친구도 여기(시작교실)에서 공부하다가 졸업하구 지금두 1공대에서 일하는 애야. 걔가 새벽잠이 많아서 잠을 못 깬대. 그래서 내가 “전화로 깨워줄게. 댕겨라” 그랬더니 지금까정 잘 다니구 있잖아.

    이경순 조합원은 2006년 6월 21일부터 3공대 5층을 맡고 있다. 평일 오전 6시까지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데, 중간에 쉬는 시간 2시간을 빼면 총 8시간 일한다.

    이경순 : 여섯시부터라 그래도 다섯 시 반부터 시작해요. 늦는 날은 여섯 시에 시작하는 날이 있고, 평균 따져서 보면 다섯 시 반에 시작하고 다섯 시 삼십오 분에 할 때도 있고 사십 분에 할 때도 있고. 그러려면 집에서 네 시에 일어나야 돼요. 네 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구 어쩌구 저쩌구 허다보면 금방 한 시간이 얼렁 가. 그러면 다섯 시 전에 나올 때도 있구, 아주 늦는 날은 다섯 시 이십분에 나와. 근데 늦게 나와두 여기 오면 여섯 시가 안 돼. 집이 가까우니까.

    여섯 시 넘어본 적은 없어요. 그 안에는 와두, 넘어본 적은 없어. 그거 넘으면 큰일 나. 그니까 그 안에 와야지. 그니까 항상 잠을 자도 신경이, “내일 아침에 일어나야지…. 네시에 일어나야지….” 이러구 신경을 쓰고 자지 사람이. 근데 금요일, 토요일에는 마음 놓고 자는 거지. 안 나올 때는.

    일찍 깨기 위해서 보통 저녁 10시면 잠자리에 들지만, 가끔 새벽 1시, 2시쯤 깰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잠이 더 이상 오질 않아 일기를 쓰며 새벽시간을 보낸 뒤 출근한다. 잠을 3,4시간밖에 못 잤으니 그런 날은 퇴근하자마자 저녁도 거르고 곯아떨어지기도 한다.

    이경순 : 그러구 가면 피곤하지. 그니깐 막 졸음이 막 오는 거야. 며느리가 “저녁 잡수세요” 그러면은 “아이구, 나 깨우지 말어라. 밥 안 먹으면 안 되겠냐” 그런다니깐. 나중엔 내가 “나 자는 거 보면은 자게 나둬라, 깨우지 말구” 그랬어. 근데두 애들은 밥 먹으라고 깨우는 거여(웃음).

    좋게 만들어준 노동조합과 귀찮게 하는 활동 사이

    그렇게 2년 동안 학교청소노동자로 살아가다가 2008년 1월 연세대학교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이경순 조합원도 가입을 하게 된다.

    이경순 : 나도 첨엔 잘 몰랐는데, 노조를 가입을 허면 편허니, 좋은 것도 있다니, 그러더라구. 그 조합 만들려는 사람들이. 아, 식구들이(3공대 청소노동자들) 다 하는데 어떻게 나만 빠져나와. 그러면 안 되는 겨. 다함께 해야지.

    학교나 용역업체에 딱히 불만사항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가입할 때는 투쟁을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데모하는 게 뭔지도 몰랐”다. 그래도 막상 조합을 만들고 나니 일하는 환경이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경순 : 조합하니까 아주 좋아졌지. 요구가 다 되잖아(들어주잖아). (임금을) 올려달라면 올려주잖아. 처음에만 좀 힘들었어. 맨날 새벽에 분회사무실에 와서 시위하는 거(피켓) 만드는 걸 한 달을 넘게 그랬어. 그래도 힘들어도, ‘우리가 이겨야지’ 하는 맘으로 한 거지. 사람은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고, 300명되는 사람들이 뭉치니까 그 힘이 무섭드라구. 이런 데 안 댕겼을 때는, 아, 맨날 테레비에 나오잖아. 왜 빨간띠를 두르고 왜 저러나 했는데, 시청이네 어디네 왜 모여서 저러나 했는데, 내가 여기 댕겨보니까 내가 그러고 있는 거 아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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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 청소노동자 집회 모습(사진=레프트21)

    하지만 좋은 결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경순 : 어떨 때는 귀찮을 때도 있지, 솔직히 말해서. 어떨 때는 시청으로 가라, 어디로 가라, 이런 데 다 쫓아가야 하잖아. 그만큼 애쓴 거야 우리들이…. 대학이라는 대학은 몇 군데를 갔는지를 몰라. 노조에서 시위하러 댕기느라구. 대학 여러 군데 댕겨봤어. 그래도, 귀찮고 하기 싫을 때가 있어도, 다만 얼마라도 올려준대니까 그런 맘으로 댕긴 거지.

    인터뷰를 했던 2012년에 이경순 조합원의 직책은 3공대 대표운영위원이었다. 운영위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회의를 하고, 공지사항을 3공대 조합원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 직책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는지, 이경순 조합원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이경순 : 이걸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여. 돌아가면서 하는 거여. 3공대에 7명이 있잖아요. 7명이 하나씩 돌아가면서 하는 거여. 허기 싫어도 해야 되는 게 이 조합운영위원이여. 나는 다음 달이면(12월) 끝나요. 1년 됐어. 2013년에는 딴 사람이 하는 거여. 이거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여.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나는 올해 했으니까,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에는 이제 안와. 아유 이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추워도 와야지, 나와라 하면 나와야지. 학생들 서명 받아야 되는데, 나는 운영위원이라서 매일 나가야돼요. 고놈의 감투가 뭔지.

    ‘살림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굳이 힘들게 일을 하나요?’

    자식들은 험한 일 하지 마시고 집에서 쉬시라며 이경순 조합원을 말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은 아들 대로 회사 다니고 딸은 딸 대로 벌”었고, 또 매달 세가 나오니 살림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니 우울증부터 나았다.

    이경순 : 나는 처녀적부터 노는 게 싫어. 내 활동을 가져야 돼. 남편 살아있을 때는 나 일을 못허게 했는데, 우리 남편이 별안간에 갈 줄 알았어? 그렇게 돌아가는 바람에, 인제 내가 집에서 안 놀구 나온 거지. 첨에는 적응을 못헐 줄 알았더니 해보니까 적응이 되더라구. 내 성격도 여기에 맞고. 원래는 육십 오세에 그만 두는 건데, 노조가 생기는 바람에 칠십까지 하게 됐으니까 그때까정 해야지.

    우리집 살림이 어려운 건 아니지. 그니깐 남 덜이 왜 댕기냐고 그래. 근데 나보다 더 부자고 다니데? 없이 살아서 여기 나오는 게 아니야. 용돈 받아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애들 주고 싶으면 주고. 나는, 뭐래도 조금씩 해야 돼. 몰두를 해야 아픈 것도 잊어먹고 신경쓰는 것도 좀 잊어먹고…. 여기 안 나왔으면 나 우울증 걸려서 어떻게 됐을지도 몰라. 그래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이렇게 다니는 거야. 이렇게 해야 내 건강을 지킨다는 걸로 댕기는 거지. 진짜 몸이 좋아요. 또 학생들이 엄마덜 공부 못한 거 다 가르쳐주고 그러니깐, 젊은 사람들 만나서 대화도 하고 기분이 너무 좋은 거야. 즐겁고. 젊어지는 것 같구. 어머, 진짜 생각해봐요. 얼마나 좋은가(웃음).

    이경순 조합원은 지금 일하고 있는 3공대 5층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만족이 컸다.

    이경순 : 학생들 허구 지내는 게 너무 좋은 거야. 3공대에는 전부 대학원 학생들이야. 아유, 점잖고, 얼마나 학생들이 인사도 잘하고, 빵도 사다주는 학생도 있고, 음료수 사주는 학생도 있고, 자기 것 사러갔다가 내 것도 사다주는 사람도 있고. 내가 지금 일하는 층이 좋아. 우리 층에 있는 교수님도 친절하시고.

    일을 시작하고 비로소 느낀 못배운 억울함

    하지만 집안에 있을 때와는 달리, 밖에서 일을 하니 한글을 모르는 설움이 더 크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한글을 몰라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조합운영위원으로서 그게 문제가 될 때도 있었다. 문자메시지로 온 공지사항을 3공대 조합원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면 다른 조합원들이 이경순 조합원의 휴대전화를 가져가서 마음대로 뒤져본 적도 있다고 했다.

    이경순 : 내가 직장생활을 하니깐은, ‘아…배운 사람하고 못 배운 사람하고 여기서 이렇게 차이를 두는구나. 공부 안한 것을 저것들이 무시를 허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 집안에 있을 때는, 그냥 밖에 나가면 떳떳하지 못하고, 누가 쓰라고 할까봐 겁났지만 그래도 남편을 믿고 살림만 하고 살았어. 근데 여기 와서 직장생활을 하니깐 그런 수모라는 게 있어요. 그럴 땐 못 배운 게 많이 후회가 돼.

    그래도 이경순 조합원은 한글을 모른다 뿐이지 언제나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했다. 어렸을 적부터 성격이 활달해서 사람들과 잘 어울렸던 것이다.

    이경순 : 나는 처녀적이고 시집와서고,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어. 동네 사람들이. 시댁이고 뭐고 나 싫다는 사람 하나도 없었어. 지금까정도 동네에서 그래. 사촌 오빠덜이고 언니덜이고, 다 내 성격은 알아주는 거야. 아무개(이경순 조합원) 좋다고, 저런 애 없다고. 내가 못 배워서 그렇지, 마음이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남편과의 추억이 묻어있는 집과 재개발

    이렇게 언제나 활발한 이경순 조합원도 자신을 “너무도 골 아프”게 만드는 일이 있다고 했다. 45년째 살고 있는 남가좌동 구역이 재개발 지역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이경순 조합원이 남편과 함께 지은 집도 사라져갈 것이었다.

    이경순 : 그것 때문에 미친다니까…. 건물이 다 무너지는 거지…. 그게 우리 노후대책 해놓은 건데… 그것만 가져도 나는 그냥 좋은데… 그게 그렇게 되는 바람에…그런 생각하니까 영감한테 편지를 쓰는데 눈물이… 북받치구… 너무나…아쉬워. 그 고생해서, 아파서 맨날 병원에 다니고 …그렇게 만든 집인데. 보상도 별로 없어요. 보상은 없어. 보상이라고는… 없어. 우리가 상가가 있었기 때문에, 상가 하나하고, 아파트 몇 평수, 그거지. 아휴, 골 아파요.

    재개발 결정은 났지만 실행은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었다. 월세가 100만원씩 떨어지면서 살림살이에도 타격이 컸다.

    이경순 : 빨리 재건축이 돼야 하는데, 안 되고 질질 끌고만 있잖아. 그래서 아주 골 아파. 구역정리 한다니까는 상가 가진 사람들 손해가 아주 막심하다니까. 가게가 들어왔다, 나갔다 해야되는데, 얻으려고 했다가도 “여기 재건축 된다면서요?” 이러고 또 안 허구. 그것 때문에 아주 속이 상해. 가게도 안 나가고. 2층이 지금 비어 있는데. 아휴, 그것만 아니면…. 우리 가게가 6개야. 아래 5개에다가 2층 홀이 50평이고. 근데 10년 전에는 보증금에다가 월세 170, 180받던 게 지금은 그것 때문에 깎고 깎아서 지금은 70만원밖에 못 받아. 근데도 비어있어요. 되려면 되고 말라면 말지… 지금 빌딩을 팔지도 못해요. 근데 남들은, “언니 그렇게 부자라면서 왜 일하러 다니냐”고 그러는데, 남 속도 모르고… 그냥 무산돼 버렸으면 좋겠어. 근데 또 무산이 되도 걱정이야. (재개발)조합에서 쓴 돈을 우리가 갚아야 한다네. 아이구.

    인터뷰를 마치며

    지난 연재 글에서 밝혔지만, 이경순 조합원과 인터뷰를 시작하며 이런 짐작을 했었다.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은 대부분 소극적이고, 밝지 못한 면모를 갖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경순 조합원은 다른 학강들에 비해 특히 더 수다스럽고 활발하다. 혹시 이경순 조합원이 언제나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그의 남편, 이경순 조합원을 극진히 아꼈다는 그의 남편과의 사랑 덕분은 아닐까?’

    하지만 이경순 조합원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활달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그런 성격에 남편분의 영향은 있지 않냐고 물어보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대답이 다시 돌아왔을 뿐이었다. 한글을 모른다고 누가 무시하는듯한 기분을 느낀 것도 연세대에 청소노동자로 취직한 다음이었다. 그 전에는 한글을 모른다는 것을 누가 알아차릴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남편과 항상 함께 했기 때문에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한 인간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내가 짐작했던 것-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의 여부-이 어떤 이에게는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필요할 때면 남편을 기다렸다가, 혹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아주 큰 불편함 없이 지내왔다. 다만 그저 가끔 글을 못읽는다는 사실이 불편함을 줬을 뿐이었다.

    내가 한글교실을 하면서 조합원과 함께 공부를 할 때 내가 그에게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정도일 것이다. 결정적이진 않지만 간혹 불편함을 주는 한글을 가르쳐주는 내 몫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개개인의 등 뒤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배경처럼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통념에서 비롯한 막연한 추측과 선입견이 그 이야기들을 다 지워왔다. 그러나 직접 만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주름 하나하나를 포함한 조합원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동안 감춰진 수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인 이경순 조합원의 삶에 조금이나마 귀를 기울이면서, ‘다른 조합원들의 삶은 또 얼마나 다채로울 것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자 연세대학교의 청소노동조합원들을 얼굴이 지워진 하나의 덩어리로 보지 않고, 각자 마다의 삶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으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우리의 인터뷰가 노동자와 대학생간의 만남 이전에 구체적인 얼굴을 지닌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듣고 깨달을 수 있었던 부분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온전히 만날 수 없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었다. 노동조합 활동과 농성과 관련해 나는 조합원이 (어느 정도로) 절실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그렇게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학교와 파견업체에 대해 그와 그의 동료들이 느끼는 분노를 나는 그 정도로 느끼지는 못한다. 이런 어긋남이 우리의 위치가 다름을 이해하도록 요구했다.

    우리는 마지막 인터뷰를 끝낸 뒤, 함께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먹은 후 연대 앞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둘 중 한 명이 먼저 버스를 탈 때까지 우리는 건너편에 서 있는 서로를 계속 바라보며 손 인사를 했다.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며, 2012년 3월부터 연세대 노동조합원들과 에서 한글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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