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자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GLOBAL 진보] 슬라보예 지젝 글 / 서정연 옮김
        2012년 06월 05일 06: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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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로존과 그리스의 경제위기에 대한 유럽의 연구자나 활동가의 글을 실을 예정입니다. 첫번째로 슬라보예 지젝이 그리스 위기와 관련하여  쓴 글을 서정연 선생이 번역하여 보내주었습니다.(편집자)  

    ▪ 이 글의 원본을 보려면 여기를
    Slavoj Žižek, “Save us from the saviours”, London Review of Books, vol. 34, No. 11, 7. June 2012:

    가까운 미래의 우리 사회를 그린 디스토피아적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해보라.

    밤이 되면 제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이민자들, 범죄자들, 그리고 부랑자들을 찾아다니며 반쯤은 텅 빈 도심의 거리를 순찰한다. 그들과 마주친 사람들은 짐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할리우드의 공상적 이미지처럼 보이는 이러한 장면이 오늘날의 그리스 현실이다. 지난 5월 7일 총선에서 총투표수의 7%를 얻었으며 아테네 경찰의 50%의 지지를 받았다고 얘기되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네오 파시스트들인 ‘황금새벽운동’ 출신의 검은 셔츠를 입은 자경단원들이 한 밤에 거리를 순찰하면서 자신들이 찾아낸 아프가니스탄인, 파키스탄인, 알제리인 이민자들을 몽땅 두들겨 팬다. 이것이 바로 2012년 봄 유럽이 지켜지는/방어되는 방식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민자의 위협으로부터 유럽 문명을 지키는데 따르는 문제는, 이 방어의 흉포함이 어떠한 이슬람인들 보다도 ‘문명’에 대해 더 위협적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자신에게 호의적인 방어자들 덕분에, 유럽은 적을 둘 필요가 없어졌다.

    백 년 전, [영국의 소설가 겸 작가인] G. K. 체스터턴은 종교 비판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교착상태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한 바 있다. “자유와 인간다움을 위해 교회와 싸우기 시작한 사람들이 교회와 싸우기만 하다가 결국엔 자유와 인간다움을 팽개쳐버리고 만다….세속주의자들이 신성한 것들을 파괴시키진 않았다; 그렇지만 세속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위안삼아 세속적인 것들을 파괴시켜 버렸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반민주적 근본주의와 싸우기를 그리도 열망하는 많은 자유주의 전사들은 테러와 싸우기만 하다가 결국엔 자유와 민주주의를 없애버리고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또 다른 사랑을 위해 이 세상을 파괴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테러와 싸우는 우리의 전사들은 이슬람 타자에 대한 증오로 인해 민주주의를 파괴할 각오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인간의 존엄성을 사랑한 나머지, 이를 지키기 위해 고문을 합법화할 각오까지 하고 있다. 이는 광신적인 종교의 방어자들이 현대의 세속적 문화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자신들이 증오하는 세속주의 양상을 근절시키길 열망하면서 결국엔 자신들의 종교적 자격들을 희생시키고야 마는, 과정의 전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반-이민 방어자들이 위험의 장본인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그리스의 곤경을 야기한 긴축정책의 정치라는 진정한 위협의 부산물이다. 그리스의 다음 총선이 6월 17일에 있을 예정이다. 유럽의 기존 세력은 이 선거가 단지 그리스의 운명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운명까지도 걸린 매우 중요한 선거라는 경고를 보낸다.

    그 선거가 가져올 하나의 결과, 즉 그들이 주장하는 올바른 결과는 긴축을 통해 고통스럽긴 하지만 불가피한 회복 과정을 지속할 수 있게 될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결과, 즉 ‘극좌파’인 시리자가 승리할 경우의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유럽이라는 세계의 종말, 혼돈에 대해 찬성하는 게 될 거라는 것이다.

    운명의 예언자들이 옳긴 하지만 그들이 의도한 방식대로 그런 건 아니다. 우리의 현행 민주적 장치들에 대한 비판가들은 선거가 진정한 선택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우리에게 대신 주어진 건 거의 구별이 불가능한 프로그램들을 지닌 중도우파당과 중도좌파당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는 6월 17일, 한편으로 기존 세력인 ‘신민주당’ 및 ‘범사회주의 운동’과 다른 한편으로 ‘시리자’ 사이에서 진정한 선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선택이 주어질 경우에 늘 그렇듯이, 기존 사회세력은 패닉에 빠져 있다. 그들은 선택이 잘못될 경우 혼돈, 궁핍, 그리고 폭력이 뒤따를 거라고 말한다. 시리자가 승리할 단순한 가능성만으로도 전세계 시장에 걸쳐 공포의 파문이 일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데올로기적 의인법이 판을 치고 있다.

    즉 시장은 마치 자신이 사람인양, 선거에서 EU-IMF의 재정 긴축과 구조개혁 프로그램을 유지시킬 권한을 지닌 정부를 선출하는데 실패할 경우 일어날 일들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그리스의 시민들은 이러한 예상에 대해 걱정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유럽에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된 자신들의 일상을 걱정하기에도 충분하다.

    이러한 예측들은 패닉을 초래하고, 따라서 그들이 경고해온 바로 그 이변들을 야기함으로써 스스로를 충족시키고 있다. 시리자가 승리할 경우, 유럽의 기존 세력은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의 테크노크라시와 반-이민적 대중주의 사이의 상호 연루된 악순환을 끊으려는 시도가 불러올 일들에 대해 우리가 값비싼 대가를 치루기를 기대할 터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시리자의 당대표인 알렉시스 치프라스는 최근 인터뷰에서 시리자가 승리할 경우 자신이 해야 할 최우선 순위는 패닉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밝혔다.

    “인민들은 두려움을 이겨낼 것이다. 인민들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인민들은 협박당하지 않을 것이다.”

    시리자는 거의 불가능한 과제를 떠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극좌파의 ‘광기’의 목소리가 아니라, 시장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대항해 말하는 이성의 목소리다. 그들은 정권을 인수할 준비상태를 갖추면서 좌파가 정권을 잡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켜왔다. 반면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저질러 놓은 난장판을 깨끗이 쓸어버릴 용기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그들은 원칙과 실용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약속과 필요에 따라 신속하고 단호하게 행동할 준비상태 사이의 만만치 않은 결합을 경험하는 게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최소한의 성공의 기회라도 가지려면, 전 유럽인의 연대의 표시가 그들에겐 필요할 것이다. 즉 다른 모든 유럽 국가 측의 적절한 조치뿐만이 아니라, 올 여름 연대를 위한 그리스로의 단체관광의 촉진과 같은 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들 말이다.

    <문화의 정의에 대한 노트>에서 T. S. 엘리엇은 이단과 종교를 버리는 일 사이에서 유일하게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즉 종파를 분열시키는 것[이단을 선택하는 일]만이 종교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순간이 있다고 언급한다. 이것이 오늘날 유럽이 처한 상황이다.

    지금 시리자에 의해 대표되는/재현되는 새로운 ‘이단’만이 구원할 가치가 있는 유럽의 유산, 즉 민주주의, 인민에 대한 신뢰, 평등주의적 연대 등을 구원할 수 있다. 만일 시리자가 노련하게 압도당할 경우[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우리가 마주하게 될 유럽은 ‘아시아적 가치를 지닌[유럽의 가치가 사라져버린] 유럽’이다. 물론 이 말은 아시아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민주주의를 저지하려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경향과 완전하게 관련이 있다.

    여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자유 투표’를 떠받치고 있는 역설이 존재한다. 즉 사람들이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조건에서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일랜드가 EU 헌법을 거부했을 때처럼 잘못된 선택이 벌어질 때 그 선택은 실수처럼 취급되며, 또한 기존 세력은 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민주적’ 절차의 반복을 즉각적으로 요구한다.

    지난 연말 당시 그리스의 총리였던 게오르게 파판드레우가 유로존의 2차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했을 때, 이 국민투표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라며 거부되었다.

    언론에는 그리스 위기와 관련해 주되게 두 가지의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즉 그리스인들은 무책임하고 게으르며 지출을 낭비하고 탈세 등을 일삼으며, 따라서 이들을 통제해야하고 이들에게 금융의 규율을 가르쳐야 한다는 독일-유럽 쪽의 이야기와 자신들의 국민/국가주권이 브뤼셀의 유럽연합이 강제한 신자유주의적 테크노크라시에 의해 위협받는다는 그리스 쪽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리스 인민들의 곤경을 무시하기가 어려워 졌을 때, 세 번째 이야기가 등장했다. 즉 마치 전쟁이나 자연재앙이 그 나라를 덮친 것 마냥, 그리스인들을 현재 도움이 필요한 인도주의적 피해자로 비추고 있다. 이 세 이야기 모두가 잘못되었지만, 말할 것도 없이 세 번째가 가장 밥맛없는 이야기다.

    그리스인들은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유럽의 기존 경제 세력과 전투를 치루는 중이며, 또한 이는 우리의 투쟁이기도 하기에 그들의 투쟁에 있어서 우리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스가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용도의 신 사회-경제 모델, 즉 은행가들과 기타 전문가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도록 허용한 탈정치화된 테크노크라시를 위한 주요 시험 장소들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이른바 그들의 구원자들로부터 그리스를 구원함으로써 또한 우리는 유럽 그 자체를 구원해야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및 정신분석 이론가다. 헤겔의 독일관념론과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을 바탕으로 한 많은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오늘날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현황과 정세에 대한 나름의 이론적 개입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에서 출간된 주요 저서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시차적 관점>,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인터뷰집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등이 있다. 지젝은 올 6월 말 서울을 방문할 예정이다.

    옮긴이 서정연은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뉴욕에서 대중운동의 정치적 주체화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공부 작업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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