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광주,일베 그리고 486과 20대
    [짤방칼럼] 기고- 486 세계관의 복제가 아닌 우리식의 기억하기
        2013년 05월 20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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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5월 18일 토요일. 대학생인 나는 평일에 못 잔 잠을 청하며 느긋하게 일어나 밥을 하면서 평소처럼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녔다. 딱히 오늘이 5.18이라고 인식하고 있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니 ‘아 그렇구나’ 싶었다. 과 새내기들이 광주를 가서 올리는 여러 가지 글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33년 전의 5월 광주를 기리는 글들이 마구마구 올라오고 있었다.

    얼마 전에 함께 자취하는 친구가 그런 얘길 했다. 5.18 관련 교양사업을 대학 내에서 하는데 답답하더라고. 그저 당위적으로 광주를 계승해야 한다는 얘기 이외에, 분노해야 마땅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내용도 고민도 없었다고. 그래서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고.

    그 친구의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은 것도 있었고, 내가 성격이 못 돼 먹은 탓에 오늘 올라오는 광주에 대한 글들이 매우 불편하고 거슬렸다. 이전부터 나는 ‘당위론’이 항상 사람들을 괴롭히고 세상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사회에선 구체적인 이유나 동기가 없이 그저 ‘해야 한다’는 말들이 담론을 지배하며 합리적 성찰을 가로막는다. 그리하여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로 사회가 극단화된 채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죽이기에 바쁘다.

    이런 맥락 속에서 나는 페이스북에 온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과감하게 올렸고, 의외로 반응이 있음에 조금 놀랐다. 그래서 그 글을 다시 차분하게 정리하여 기고해본다.

    일베는 ‘괴물’인가?

    소위 ‘일베’에 대한 얘기로부터 글을 시작해보자. 오월 광주에 대한 ‘일베 게이(게시판 이용자)’들의 생각은, 이른바 조중동이 뿌려대는 프레임과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한다. 5월 광주 항쟁은 ‘폭도’들의 ‘폭동’이었으며 북한의 지령을 받았거나 혹은 북한 간첩들의 공작과 선전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광주 및 현대사에 대한 일베의 입장이나 그들의 과격한 언어들에 대해 혹자는 그들을 ‘파시즘’으로 규정하고 바라보기도 한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일베

    이에 대해 나는 ‘파시즘’이라는 용어가 남용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그들을 그렇게 규정해버리는 것이 그들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점을 짚고 싶다. 예컨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주류 사회 내적 논리로 재단·규정해버리는 것과 무어가 다른가. 판단하기 이전에 그들을 존중하고서 이야기를 듣는 게 우선이라 생각된다. 그들을 ‘파시즘’이라 규정하는 것은 그저 그들을 ‘적’으로 삼으려는 이분법적·진영론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 그 이상이 아니라 생각된다.

    사실 난 일베’만’ 괴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일베를 만든 것이 한국 사회이고, 본질은 한국 사회가 이미 괴물인 데 있을 것이다. 현재 일베 내에서 공유된 문화와 생각들은 2008년의 촛불시위나 2009년의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같은 일들을 겪으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비록 그 시절에  ‘깨시민’이라는 용어가 2012년만큼 쓰이지는 않았겠으나, 자기 진영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그 외의 모든 이들을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문화가 강하게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왜 촛불에 참여하지 않느냐, 왜 보수진영을 비판하지 않느냐, 왜 정치에 관심이 없고 투표를 안 하느냐. 당위론에 근거한 도덕적 이분법은 많은 2030대의 청년세대들을 겨냥했다. 이에 대해 혐오를 느끼거나 반발을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비약을 담은 해석을 해보자면, 예컨대 ‘20대 개새끼론’이라는 오만한 시선에 대한 대답이 일베였던 셈이다.

    486으로 대표되는 민주진보진영은 과거 ‘절대악’을 무찔러야 하는 소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가 보수적으로 귀결되면서 지금까지도 절대악과 절대선의 동거가 지속되고 있으며, ‘민주’를 자청했던 이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적을 닮아버린 지 오래다.

    결국 87년 이후에는 그 두 진영 사이의 소모적이고 공학적인 낡은 대립만이 지속되어갔다. 특히 민주진보진영은 자신들을 ‘선’이라 전제하는 80년대에 성립된 세계관 속에 갇힌 채, 그들 리그 내에서 통용되는 도덕을 다른 집단들에게 강요했다. 세대구분으로 단순하게 보자면 노년층에 대한 경멸과 청년층에 대한 훈계였다고 할까.

    나는 청년세대에 대한 민주진보진영의 도덕적 훈계를, 그들 기득권의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이해한다. 이른바 ‘깨시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선과 악의 이분법적 진영론,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니 청년 깨시민이란 곧 80년대 민주화 세력의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인 셈이고, 이는 민주진보진영의 ‘표’를 위해 동원될 주체의 생산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 20~30대의 청년 깨시민들 역시 편을 갈랐다. 보수진영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상관치 않고, 자신들의 편이 아닌 모든 세력들을 ‘깨어 있음’이라는 이상한 도덕적 척도로 비난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집권 1~2년 간에 특히 온라인 상에서 벌어진 이런 일련의 흐름은 그에 반발하는 ‘일베’라는 집단을 탄생을 가져오게 되었다.

    문제는 일베가 486으로 대표되는 민주진보진영의 낡은 모습들을 현명하게 지양해내기보다는 그 이전의 더 낡은 전통에 기대었다는 데 있으며, 또한 자신들의 적을 비판하면서 그 적을 닮아버렸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 혹은 부모였던 양 진영에서는 일베를 ‘파시즘’으로 낙인찍거나 ‘이용’의 대상으로만 삼을 뿐이다. 증오와 적대만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내용 없는 당위, 광주의 계승

    나는 일베 식으로 말하자면 ‘종북 저장소 성공회대’를 다니는 ‘좌좀’이다. 그리고 일베의 그런 비난을 수용할 생각은 없지만, 내 주위 많은 이들이 광주에 대한 80년대의 이해를 답습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일베나 보수진영을 절대적인 악으로서 이해해 그들을 무찔러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광주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그들에게서 작동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무지 불편하다.

    80년대에 광주는 금기였고 광주가 진실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국가가 억압했다. 그렇기에 대학에 들어와서야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대학생들은 당연하게 세계관의 붕괴를 경험해야 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광주사진을 보고 ‘깨달았다’는 식의 전형적 레파토리가 그렇다.

    486들이 광주에 대해 느꼈을 감정은, 지금까지 알아왔던 세계가 ‘거짓’이라는 깨달음, 그렇기에 ‘금기시된 진실’을 추구하고픈 욕망과 광주에 대한 죄의식, 국민을 학살한 정당성 없는 국가에 대한 분노 등이 뒤섞인 ‘충격’이었을 거란 추측은 어렵지 않다. 분명 그 시절 그들에게 ‘적’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신군부가 자신들의 통치의 안정성을 가져오기 위해 저질렀던 국가폭력, 제노사이드를 상기할 때, 국가와 지배세력들을 전복해야 한다는 사고로 나아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87년 민주화가 이뤄지고, 광주의 적자였던 고 김대중은, 이름 뒤에 ‘전 대통령’이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민주당은 10년의 집권경험을 가진 야당 중에 가장 강한 정당이 되었고, 진보정당 역시 의회나 민주노총 등을 통해 일정한 기득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런 민주진보진영을 놓고, 누가 아직도 7,80년대의 ‘야당’으로 바라보는가? 그들은 그저 기득권일 뿐이다. 진보정당들은? 마찬가지로 보여지고 있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믿음의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들은 이미 기득권이 되었다. 그들 모두를 기득권으로 일반화할 순 없지만 그러나 사회적으로 이미 그렇게 비춰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청년세대들이 80년대 학생운동이 의미화했던 오월 광주의 의미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세대들 다수는 ‘존재 이전의 존재’로서 ‘존재의 이전’을 감행해야 하는 계층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계급적 질서에 뿌리 박힌 ‘존재’다. 게다가 광주는 그들에게 ‘먼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광주의 희생에 부채의식을 가지고 광주를 계승해 사회를 ‘진보’시키겠다는 그런 말들은 결국 ‘말’일 뿐이다. 자기 성찰을 통해 나온 ‘말’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옳다고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말.’ 이는 486을 흉내내어 도덕적 우월감을 성취하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기득권이 된 그들의 표와 세력으로 동원됨을 자처하는 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달라진 ‘토대’와 ‘세계관’ 위에서 자신들의 사유와 언어를 정립하며 새로이 광주와 만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주를 왜 계승해야 하는지 광주가 도대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내용으로 다가와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허나 이들 깨시민 혹은 운동권 청년세대들의 언어를 따라 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게 된다. 그 속에 내용은 없고 당위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일베냐 깨시민이냐 좌파냐 하는 진영론만이 있을 뿐이다.

    박제화된 기억과 관계 맺기

    ‘진영’ 외부에는 광대한 벌판이 있다. 그러나 조직화되고 기득권을 가진 각 진영들이 담론 권력을 쥐고 있기에, 그들이 광주에 부여하는 의미 외에 다른 담론이 유통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많은 청년세대들이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있다.”

    허나 이러한 상투적인 언술은 극히 제한적인 의미화이다. 비록 광주에 대한 기억을 두고 자기 진영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용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결국 ‘광주’에 다가가기보다는 당위론을 한번 주억거리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그저 “기억합시다.”를 외치지만 그 기억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80년대와 달라진 오늘날에 광주를 어떻게 기억할지, 그 기억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우리는 고민하지 않는다. 기억은 박제화되어 박물관에 혹은 교과서에 처박힌 지 오래다. 5.18은 SNS에 “기억합시다.” 하고 올려주는 정도로 도덕적 비난을 면하면서 ‘좋아요’를 받을 수 있는 날, 뭘 기억하고 계승하자는 지 모르겠지만 매년 마다 내용 없는 당위를 다시금 읊어보는 날일뿐이다. 최근 일베로 말미암아 자신보다 도덕적으로 못한 멍청이들을 공격할 수 있어 자기의 도덕성을 재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박제화란 대상화이며 결과론적인 망각이다. 박제화된 기억은 박물관에 찾아가야만 존재하는 기억이며 우리의 일상과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죽어서 고이 모셔진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물관에 찾아가야만 기억과 만날 수 있다. 박제화된 기억은 우리 삶의 외부에 있는 망각되어 죽어버린 기억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오늘”을 되새기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과거의 기억에 대한 의미화가 필수적이다. 그것은 기억을 오늘로 생환시켜 우리 삶 속 깊숙이 그 기억이 존재했음을 성찰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이는 박제화되어 단절된 광주의 기억과 오늘날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새로운 세계관을 정초하기 위하여

    위에서 지적했듯 광주에 대한 의미화는 각 진영들의 담론권력의 자장 속에 갇혀있다. 이는 박제를 넘어 기억을 복원하는 것에 큰 방해물이 된다.

    일베는 이 지점에서 매우 극적이다. 그들은 민주진보진영에 대한 반감과 혐오로부터 출발해 극단적으로 입장을 밀고 나간 우리 세대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나에겐 이따금 자화상을 읽히곤 한다. 그리고 보수에 대항한 민주진보에서도 80년대의 낡은 세계관 속에서 광주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그친다. 다시 말하지만, 거기엔 도덕적으로 상대를 비난하는 당위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당위를 통해 적대적-이분법적 세계관을 성립시켜 상대를 공격하기에만 바쁘다.

    하지만 오늘날 새로운 기억의 가능성, 기억의 생환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례로 전라도가 현재 민주당을 버리고 있음을 지적해볼 수 있다. 현재 민주당의 독점이, 전라도라는 강고한 지역기반에 근거한 민주당의 기득권이 깨지고 있는 와중이다. 진보정당이 전라도에서 선전하거나 당선됐고, 또한 전라도는 현재 안철수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세대에게 광주의 아픔에 공감하라는 것은 무리다. 486들과는 살아온 삶과 시대가 다르다. 그렇기에 독자적인 기억화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것은 486들, 민주진보진영이나 혹은 더 보수진영의 낡은 세계관, 그 거대담론들과 지금의 우리들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정초해야 한다는 자기 중심으로부터 광주에 말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광주도청 철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해관계들로부터 바래어지기도 했던, 광주 시민들의 아픔에 직접 다가가보자. 해석된 기억, 저들 진영들의 자기 기득권을 위한 해석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직접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보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분노하고 끔찍했는지, 아직도 무섭고 답답하지는 않은지 그저 조용히 듣는 것 말이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이 당선되는 것이 아니잖은가. 광주를 기억한다는 것은 생존자들의 아픔을 수용하고 그들을 위로함으로써 그들과 관계 맺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독재정권의 계승자들과 그들을 닮아버린 비판자들을 넘어, 온전히 과거의 아픔을 달래 미래로 나아가는 길일 것이다.

    필자소개
    20대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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