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삶의 최후 보루, 휴머니즘
[서평]《사람아 아, 사람아》(다이호우잉/ 다섯수레)
    2013년 05월 18일 01: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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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 나는 마치 열한개의 삶을 살아낸 것만큼 피로했고 버거웠다.

돋보기를 집어 들고 열한개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그 어떤 하나의 삶조차도 감히 비난할 수 없음을, 세상에는 그 어떤 삶도 감히 가볍다 이야기할 수 없음을 확인해나가는 과정이었다.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의 삶은 사회의 변동을 오롯이 몸으로 견뎌내야 한다. 사회 변동 속에서는 “겹치고 겹친 재난이 인간관계와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기도 한다.

사람의 몸통을 반으로 댕강 잘라보면 그 단면에는 분명 개인이 겪어온 시대정신의 역사가 겹겹의 나이테로 새겨져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변동의 역사는 개인의 삶을 그 증거로 삼는다.

감히 가볍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사회 변동으로부터의 영향에는 이토록 참을 수 없이 무력한 것이 개인의 삶이다.

린뱌오에게 반대하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이제 막 감옥에서 나온 사람은 이렇게 외친다. “역사여, 역사는 우리들에게 거대한 장난을 쳤다!” 그러나 무력하다 하여 손을 놓고 끌려가는 대로 둬서는 안 된다.

사회변동에 있어서는 무력한 존재에 그칠지라도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이어나가고 한다면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될 가치는 그 어떤 사상도 아닌, 바로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으로 완성되는 사상을 위하여

이 소설에서 사상과 휴머니즘의 대립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을 연구하고 있다는 말에 놀라는 손유에에게 호젠후는 “금기라고 하고 싶나요? 부르주아 계급과 수정주의가 신물 나도록 써먹어서 낡아 빠진 제목이라고 말하려는 가요?”라고 묻는다.

이처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중국 사회에서 휴머니즘이란 말은 쁘띠 부르주아와 우파진영을 대변하는 말로 여겨진다. 이는 “계급투쟁을 늦추자마자 부르주아 사상의 범람이다. 몇 십 년 동안이나 비판해 왔는데도 지주, 부르주아 계급의 휴머니즘을 아직도 사는 자가 있다니.”라는 시류의 말에 의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정말 마르크스사상과 휴머니즘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건가라는 의문이 무르익어갈 때쯤 시왕의 입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은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휴머니즘을 포용할 뿐 아니라 가장 철저하고 가장 혁명적인 휴머니즘이라는 것이죠”라는 호젠후의 생각이 등장한다.

그렇다. 어떤 사상이든 그것이 건강한 사상이라면 결코 휴머니즘을 배제할 수는 없다. 모든 유효한 사상은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하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르크스사상이 휴머니즘을 배제하고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앞서 인간으로서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될 가치는 그 어떤 사상도 아닌 휴머니즘이라는 문장을 썼다. 이는 사상의 중요성을 일부러 깎아내리려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휴머니즘이 배제된 사상은 온전히 건강한 사상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분명 휴머니즘과 공존할 수 있다. 허젠후의 말에 의하면 “그(마르크스)의 이론, 그의 실천은 모두 이 ‘인간’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 인간을 ‘인간’일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모든 현상과 그 원인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허젠후의 중학시절의 선생님은 “혁명의 목적은 인간의 천성을 파괴하는 것인가. 혁명은 가정을 파괴하고 인도를 질식시키는 것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지.”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마르크스가 주창한 혁명이 과두화된 지배층에 의해 휴머니즘의 반대말로 오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인된 마르크스주의가 마치 정답인 것처럼 여겨져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통치의 ‘도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상은 사람의 삶과 같아서 그 맥락을 읽어야만 한다. 그러나 사상이 통치의 도구화가 되었을 때에는 사상의 맥락이 읽히기 보다는 그 일부분만이 통치자의 입맛에 맞게 발췌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어떠한 사상이든 지배계급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순간 그 생명력을 잃는다.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도구화되어 쓰이는 사상의 일부는 온전한 본래의 의미대로 이해되기 어렵다.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증명되는데, 시류가 직접 자신의 언어로 인정하기도 한다. “나는 일관해서 계급투쟁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며, 핵심만 장악하면 지엽적인 것들은 그것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는 말을 통해 통치의 수단으로써의 사상은 그 맥락을 잃고 만다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나 스스로 인정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주의 저작 같은 것은 그다지 읽지 않았다. 나의 마르크스주의는 위로부터 하달되는 지시로 배운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발췌되어 읽히는 사상은 이미 그 본연의 가치를 잃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결국 생명력을 잃은 사상은 무고한 생명들을 처참히 잘라내고 마는 무기가 되었다. 도구화된 사상의 “뒷면은 피해자의 피와 눈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무기를 휘두르는 자, 허젠후의 표현을 빌자면 “그 수단만을 기억하고 그 목적은 망각하거나 간과해버리는 자”, 다시 말해 “마치 혁명의 목적이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인간의 가정을 파괴하며 사람들을 갖가지 울타리로 서로 격리시키는 것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나는 사상을 빙자해 휴머니즘을 짓밟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인간에게 어떠한 울타리도 치지 않고 애정 어린 시선을 던지자는 휴머니즘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봐야만 한다고 제언한다.

사람아 아 사람아

휴머니즘의 확장, 인간의 수성마저도 이해하려는 노력

개인에게는 문화혁명이라는 사회변동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 격변의 시기라도 살아야만 했기에 누구는 ‘반대파에 붙는 일격’을 가하기도 하고, 당 지도부의 지령을 따르기 위해 동급생의 삶을 짓밟기도 한다. 이는 부부관계라 해도 예외가 될 순 없다.

실제로 리이닝은 문화혁명 당시 ‘분리시켜 무너뜨리’는 ‘활로를 부여한다’는 정책에 순응한 남편으로부터 배반당하질 않았는가. 살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최우선의 욕망이다. 또한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욕구도 누구에게나 당연한 욕망이다.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은 그 자리를 내려놓기 힘들고,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절차의 올바름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인간의 본능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따지는 것은 본능에 뒤따르는 이성의 힘일 뿐, 삶에 대한 욕구나 권력에 대한 욕구라는 본능마저 부정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시류, 요뤄쇠, 그리고 성공을 위해 딸과 부인을 버린 자오젠호안을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사람들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나는 사실 소설의 초장에서 그들의 행적을 알게 되자마자 올바름을 따지고 있던 내가 소설의 말미에서는 그들에게 모종의 연민과 동정을 느끼게 된 것이 행여 죄악일까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내가 느낀 연민과 동정의 근원이 휴머니즘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머니즘은 거창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내가 상정하는 휴머니즘은 각자의 삶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은 시대의 흐름, 그리고 권력과 명예와 재산을 향한 인간의 수성에 가까운 탐욕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내는 것이다. 비난받아 마땅한 자마저도 끌어안는 것, 그것도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결과가 아니라 시도로 완성된다.

휴머니즘이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적 시도는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한다.

용기를 내 “용서해 다오!”라고 쓴 자오젠호안의 편지가 그랬고, 편지를 읽자마자 “어쩌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어, 자오젠호안! 내가 한창 두 번째 공격을 받고 있을 때 당신은 기를 쓰고 이혼을 재촉해왔어”라며 증오 가득한 혼잣말을 내뱉던 손 유에가 시간이 흐른 뒤에 마침내 “당신과의 관계는 내게 있어서 중요한 역사가 되어 있”다며 “우리들의 비극의 책임을 맨 먼저 져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며 결코 당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써 내려간 답장이 그랬다.

자오젠호안과 손유에의 편지는 이 책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악하면서 휴머니즘을 실현하고자 손길을 내민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맞잡아줄 손이 등장할 것임을 보여줬다.

자오젠호안이 내민 손뿐만이 아니라 허젠후가 내민 손 역시도 그랬다. 허젠후의 휴머니즘에 대한 확신은 결국 몇 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손유에로 하여금 “그 사람(허젠후)을 홀로 폭풍우와 싸우게 둘 수는 없”게 만들어 “마음의 둑은 점차 무너”뜨리고 만다.

행여 휴머니즘의 실천으로 내민 손길이 끝끝내 마주잡는 손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실제로 허젠후는 휴머니즘을 추구하다 젊은 날의 대부분을 유랑생활에 써버리고 말았고 그 지난 시간이라는 것은 시간을 돌이키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허젠후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휴머니즘을 져버렸더라도 당위원회나 고위직으로서 부족한 것 없이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살아온 시류나 자오젠호안이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허젠후가 유랑생활로 젊은 시절을 다 써버렸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휴머니즘의 완성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휴머니즘은 맞잡아줄 손의 등장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손길을 내미는 최초의 시도만으로도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을 품은 인간들의 세상은 복잡하다. 동정과 멸시, 애정과 증오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인간들의 군상은 “가장 단순한 일이라 할지라도 복잡해”지도록 만든다. 또한 “선인과 악인이 빙글빙글 돌면서 바뀌”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휴머니즘을 품은 인간들의 세상이어야만 “낡은 것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될 수 있고 “잃어야 할 것을 잃고 되찾아야 할 것을 되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휴머니즘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휴머니즘 위에서만 “생활은 반드시 생활 자체를 위해서 길을 연다” 허 젠후의 믿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털실이 엇갈려 엮여있는 것처럼 복잡한 인간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휴머니즘을 고수해야만 하는 이유가 열한개의 삶으로써 증명되었다. 감히 단언컨대,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는 휴머니즘에 대한 열망이며 동시에 휴머니즘의 완성이다.

필자소개
학생. 연세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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