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쌀밥과 감자의 차이?
    [파독광부 50년사] 힘든 막장생활 쉬려고 자해하는 사람도 있어<검정밥-5>
        2013년 05월 17일 04: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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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후에는 굴진반에 편입되었다. 같이 왔던 동료들도 다 뿔뿔이 헤어져 다른 작업장에 배치되었고, 내가 일하는 굴진반에는 나 혼자 떨어졌다. 독일인 두 사람과 스페인 사람과 나. 이렇게 네 사람이 한 반을 이루었다. 굴진반은 아침, 점심, 저녁, 밤 반으로 매주 번갈아 교대를 했다.

    우리 반의 선임광부는 이름이 안톤이었으나 나더러 토니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는 생기기도 잘 생겼고 신체도 단련되어 우리가 옷을 벗고 짧은 팬츠만 입고 일을 할 때면 마치 영화에서 보던 타잔 같았다. 다른 독일 사람은 쿠어트라고 했는데, 이는 일본 씨름꾼 같았다. 키는 거의 2m 가까이 되고 배가 부잣집 절구통 같았다.

    내가 이 사람들과 일하게 된 첫날이었다. 폭파시킨 돌을 삽으로 퍼내어야 할 때는 두 명씩 나누어서 앞 사람이 퍼낸 돌을 뒤 사람이 다시 퍼서 운반철판에 넣었다.

    나는 쿠어트 뒤에서 그가 넘겨주는 돌을 퍼내야 했다. 쿠어트의 삽은 돌을 퍼내는 작은 돌삽이 아니고, 석탄을 퍼내는 커다란 석탄삽이었다. 힘이 장사 같은 그는 그 커다란 석탄삽으로 돌을 퍼내어 내 앞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렸다.

    내가 아무리 작은 돌삽으로 번개처럼 일을 해도 도저히 그가 넘겨주는 돌을 그와 같은 속도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자기 뒤에 쌓이는 돌무더기를 보면서 쿠어트는 무어라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나더러 삽질을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 솨이쎄 소리가 그의 입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연거푸 나왔다.

    나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그가 넘겨주는 돌무더기를 그와 같은 속도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일하는 속도가 굴진에 규정된 속도라면 나는 이 일을 감당해 낼 실력이 없었다.

    어떤 일이라도 감당하겠다고 결심한 내가 또 하나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들이닥친 것을 느꼈다. 왜 이렇게도 독일의 광부생활이 내게 힘이 드는지, 나는 절망상태에 이르렀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삽을 본래 있던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는 내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욕을 하고 화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지상에 가서 통역과 함께 항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나에게 다른 일을 시키든지 아니면 귀국시키라고 말할 예정이었다.

    그제야 마이스터 토니가 나를 쳐다봤다. 내 눈치를 알아차린 그가 나에게로 왔다. 자기 손바닥을 펼쳐서 아래로 누르는 시늉을 하면서 나더러 진정하라는 표시를 했다. 시계를 가리키면서 한 시간만 있으면 다음 반이 온다고 하면서 지상에 가서 통역을 데리고 자기와 말하자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입던 저고리의 소매를 당기면서 벗겼다. 토니는 쿠어트에게 몇 마디 나무라는 듯 말했고 쿠어트는 또 고함을 지르면서 대꾸했다.

    지상에 나와서 통역을 데리고 탈의장에 갔다. 토니가 쿠어트와 함께 앉아서 담배를 태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왜 내가 일을 하지 않고 도중에 나가려고 했는지 설명했다. 토니도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나와 바깥에서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이었다.

    그는 쿠어트의 성격이 원래 그렇다고 했다. 자기 반에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쿠어트가 항상 그렇게 해서 골탕을 먹인다면서 나더러 너무 화내지 말고 자기는 내가 일하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니 계속 자기 팀과 함께 일하자고 했다.

    나는 절대로 화가 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적재적소의 원칙에서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랬다고 했다.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이 옆에 앉아서 담배만 태우던 쿠어트가 허허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쌀밥을 먹지 말고 감자를 먹으면 힘이 난다고 하면서 자기 팔의 위통을 자랑스럽게 들어내면서 통나무와 같은 근육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오해를 풀고는 한 팀이 되어서 의좋게 일을 했다.

    막장

    굴진이 끝나자 나는 탄을 캐는 막장에 배치되었다. 막장에서 하는 일은 위험하고 힘들었다. 막장 전면에 끌 같은 것이 박힌 기계가 굵은 쇠사슬에 매달려 왔다 갔다 하면서 대패처럼 석탄을 깎아내면, 깎인 석탄은 그 옆에 있는 철판에 실려서 막장 끝에 있는 갱도로 운반되었다. 이 갱도까지 운반된 석탄은 갱도에 설치된 컨베이어로 넘어가고 이 컨베이어는 실린 석탄을 탄차(炭車)에 넘겨주었다.

    철 대패가 석탄을 깎을 때마다 옆에 붙어 있는 철판이 탄층 쪽으로 밀려가면서 막장 전면에 다시 공간이 생기게 하면 우리는 막장 뒷면에 있는 스템펠(Stempel)이라고 부르는 동발을 쳐서 무너뜨리고 그 동발과 또 동발 위에서 천반을 바치고 있던 1,20 m 되는 캎페(Kappe)라고 하는 받침대를 앞으로 끌어다가 천반에 있는 받침대의 코에 끼어서 걸고는 그 밑에 동발을 세웠다.

    석탄을 깎아낸 천반을 빨리 지주로 받쳐주지 못하면 천반이 내려앉기 때문에 미리 뒤에 있는 스템펠을 빼어서 대기하고 있다가 앞에 공간이 생기자마자 캎페를 걸고 스템펠을 세워야 했다.

    지압에 눌려 있는 막장 뒤쪽의 스템펠의 쇄기를 꽝 치면 쿵 땅 하면서 스템펠이 넘어지면 스템펠을 앞으로 옮겨 놓고, 그 다음에는 걸려 있는 천반의 캎페의 쇄기를 때리면 캎페 막대기가 쿵 꽝 하면서 떨어졌다.

    장성갱 막장

    지하 970M의 한국 장성갱 막장의 채탄 작업 모습 자료사진

    그러나 이 일은 힘 드는 일이기도 했지만 또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광산의 사고 중에는 막장에서 일어나는 사고가 제일 많았고 또 여기에서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는 사망을 초래하기까지 하는 거의 중상이 되었다.

    스템펠의 쇄기를 치면 동발만 넘어지지 않고 천반을 받치고 있던 받침대와 함께 그 위에 무겁게 놓여있던 몇 톤이나 되는 천반의 암석이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기 때문에, 항상 뒤쪽의 스템펠을 칠 때는 내려앉는 돌무더기에 깔리거나 뛰어오르는 돌덩이에 맞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했다.

    앞쪽에 천반의 받침대를 걸때에도 천반에서 보드라운 모래 같은 돌먼지가 솔솔 내리면 이것은 경고 제 1호였다. 이때에 빨리 받침대와 동발을 받쳐주지 않으면 천반의 돌이 떨어졌다. 이렇게 떨어지는 돌에 깔려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천반의 돌을 곽뚜껑이라고 불렀다.

    떨어지는 돌에 맞아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은 항상 하지만 탁한 공기와 더불어 섭씨 30도 이상이 되는 무더운 막장에서 일을 할 때는 팬츠만 입고 일을 하기 때문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어린아이 주먹만한 돌덩이가 떨어지면서 어깨, 팔, 가슴과 등을 치고 긁는 것은 예사였다. 긁힌 상처에 땀이 들어가 피와 땀이 함께 엉겨서 흘러내렸다.

    말로만 듣던 피땀이 내 몸에서 흘러내렸다. 막장에서 한 달쯤 일을 하고나니 내 어깨와 등은 칼로 난도질을 한 것처럼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그 상처에 석탄이 들어가서 시커먼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막장에 편입되면서 나는 매주 다른 시간에 일하러 가게 되었다. 채탄은 아침, 점심, 저녁 반으로 나누어서 아침 반은 아침 여섯 시, 낮 반은 열두 시 그리고 저녁 반은 저녁 여섯 시에 출근했다. 밤 반은 밤 열두 시에 들어와서 수리작업과 다음날을 위한 준비작업을 했다.

    나는 아침 반을 할 때는 오후에 기숙사에 와서 밥을 먹은 후 곧 잠자리에 들어갔다. 아침반의 경우에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했는데,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이리저리 뒹굴다가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몸이 몹시 고단했다.

    그러나 작업하고 난 후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는 오후 네 시경 고단할 때에 누우면 잠이 곧장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잠이 든 후 밤 열두 시 경에 일어나면 한 여덟 시간 잘 수 있었다.

    밤 12시 경에 잠이 깨면 식당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는 우리 방에서 가까이 있는 TV실로 갔다. 거기서 혼자 조용하게 새벽 네 시까지 독일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한 방에서도 모두 일자리도 다르고 근무시간도 달랐기 때문에 낮에 잠잘 때는 방해도 있었지만 서로가 다 당하는 처지라 되도록 조심해서 조용히 했다.

    막장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한 달 후에 우리는 도급으로 들어갔다. 도급은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개인 계약이었다. 한 갱에 석탄을 캐기 시작하면 며칠동안 작업능률조사반에서 나와서 작업시간을 쟀다.

    예를 들어 뒤에 있는 동발을 쳐서 앞으로 끌어당겨 놓는데 00 분 xx 초, 천반 받침대를 쳐서 앞으로 당겨 놓는데 00 분 xx 초, 또 앞에 거는데 00 분 xx 초, 동발 세우는데 00 분 xx 초 등등, 우리가 지상에서 수갱에 올라 탈 때부터 작업 후에 수갱을 떠날 때까지의 모든 거동과 거기에 소요되는 시간을 쟀다.

    이렇게 한 주 동안 검사를 하고 난 후에 도급량을 책정하는데, 이때의 기준 작업량은 지금까지 우리가 달성한 하루 작업량의 약 85% 정도 되었다. 그래서 하루 열심히 일하면 기준임금의 15%를 더 벌게 되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은 20%도 더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작업량은 한국인들만의 작업량이 아니고 막장인원의 태반이 넘는 경험 있는 독일 사람들의 능률을 합쳐서 평균치를 낸 것이었다. 황소라고 별명을 가진 강원도 출신 Y 군 같은 사람은 돈을 잘 벌었으나 나와 같이 평균 한국인의 몸집으로는 기껏해야 5~10% 정도 기준량 이상 올릴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이러한 조사방식을 아는 독일 사람들은 도급 이전에는 일을 천천히 했다. 내가 일을 빨리 하면 도급 망치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 그러고는 나중에 도급계약이 체결되면 죽을 줄 모르고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려고 했다.

    우리나라 속언인 “날일하면 장승될까 두렵고, 도거리하면 죽을까 겁난다” 라는 말이 여기에도 적중했다. 내 육체의 힘을 자본으로 돈벌이를 하는 곳에는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어떻게 해서든 일하지 않고 돈 많이 받는 방법을 모색했고, 고용주는 고용주대로 어떻게 해서든지 돈 적게 들이고 노동량을 올리려고 애를 쓰며 노동자를 착취하려는 욕심에는 독일이나 한국이나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그렇게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일이 몸에 뱄다고 해도, 몸이 약한 한국 사람에게는 30~40 Kg의 동발을 하루에 아흔 번 앞으로 옮기고, 아흔 번 들어올려 세우고, 또 이와 같이 무거운 천반의 받침대를 아흔 번 옮기고, 아흔 번 들어올려서 걸어야 하는 일이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막장에 편입된 사람은 그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예생활이었다.

    이러한 힘든 경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 곧 아파서 쉬는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손가락을 들고 있던 망치로 두들겨서 부러뜨렸다. 얼마나 일이 힘이 들었으면 그런 짓까지 했는지 짐작이 갈 정도다. 동료 한 사람은 차마 보이는 손가락은 때리지 못하고 구두 안에 있는 발가락을 치고는 아파서 데굴데굴 굴렀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할적(自割的)인 행위는 다만 임시적이었지 장기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우리 앞에는 아직 근 삼 년이라는 기나긴 노예생활이 젊은이의 아름다운 시절을 꽉 붙들고 있었다.(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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