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박해의 역사 (1)
[빵과 장미] "타인 존중을 배우지 못한 자의 자유란 늘 타인에 대한 폭력"
    2013년 05월 14일 02: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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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개신교의 빗발치는 공격에 무릎을 꿇고 차별금지법 발의를 자진 철회하는 모습을 보며 그 의지박약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보수 기독교의 배타적인 차별의식이 단연 심각한 문제지만, 그만큼이나 답답한 태도를 보여주는 건 바로 민주당이다.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갈등을 조절하고 대화를 이끌어나갈 ‘능력’도 ‘의지’도 없다. 나아가 군대 내 동성애를 처벌하자는 소리까지 들락날락 하는 대한민국 국회는 정말 당혹스러운 인권의식을 전시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차별할 자유(?)를 종교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로 이해하고 꾸준히 온갖 궤변을 쏟아낸다. 언제나 기득권의 차별의식은 ‘표현’이 되고 ‘견해’가 된다. 이 차별을 거두라고 하면 ‘다른 소리’도 들으라고 하거나, 관용을 베풀라고 억지를 부린다.

억압과 차별이라는 집단 폭력을 ‘다른 소리’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면 총체적으로 문제가 심각하다. 타인에 대한 존중을 배우지 못한 자의 자유란 늘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너의 자유는 알 바 아니고 나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이기심. 차별방지법을 거두고 처벌법을 만들겠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반대와 지지를 떠나 동성애가 여러 문화권에서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 짚어볼 필요를 느낀다. 동성애는 과연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금기시 되었을까.

고대 : 최고의 사랑은 남성애?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수메르 문명의 신화를 보자. <길가메시의 서사시>는 기원전 2700~3000년 즈음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우르크의 왕이었던 길가메시를 노래한 서사시로 오랜 세월 고대근동(오늘날의 중동)에서 ‘베스트셀러’였다.

거칠고 호전적인 길가메시에 대항할 인물로 창조의 여신 아루루는 엔키두라는 강한 남성을 만든다. 이들의 싸움에서 이긴 길가메시는 그 후 엔키두와 오히려 강한 ‘우정’을 만들어 나간다. 그런데 이 우정은 어떤 성격일까.

<길가메시의 서사시>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꽤 섬세하게 담겨있다. “그들은 서로 껴안고, 손을 잡고 우르크 거리를 거닐고, 침대 위에서 함께 잔다.”

이 작품에서 동성애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암시를 준다. 길가메시는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의 구애를 거부하여 그녀의 화를 이끌어내는 반면 엔키두에게 보인 열정은 평범 이상이었다.

신들의 분노로 엔키두가 죽은 후에 길가메시는 “그가 떠난 후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며 삶의 의욕을 잃는다.

이들과 비슷한 관계를 역시 성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분분한 의견이 있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그러하다. 사무엘 상 18장 1절은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를 거둔 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고 전한다. 이들은 서로 입을 맞추기도 한다.

길가메시가 여신 이슈타르를 거부하며 엔키두와 친밀했듯이 다윗도 자신의 부인(들)보다 요나단을 더 중히 여겼다. 사무엘 하 1장 26절에서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라며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런데 스위스의 성서학자이며 <고대 근동과 성서 속의 동성애 L’homosexualité dans le Proche-Orient Ancien et la Bible>의 저자인 토마스 로메르Thomas Romer는 “오늘날의 동성애 개념을 당시의 문학 속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오늘날의 동성애 개념’은 이성애의 ‘반대’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당시에는 동성애가 오늘날처럼 이성애의 반대 개념이었다는 증거를 문헌을 통해서는 찾을 수가 없다. 역시 오늘날의 개념으로 이들을 ‘동성애자’라고 섣불리 정의할 수도 없다.

이슬람교가 지배하기 전 고대 근동에서는 남성 간의 성적 관계가 딱히 금기시되지 않았다. 남성 간에도 인사나 애정표현으로 입맞춤을 했다고 한다.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관계가 처음 그러했듯이 신화, 문학, 역사 등을 살펴보면 남성간의 동성애는 젊은이의 교육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남성 영웅 사회에서 남성간의 강한 동지애가 가장 숭고한 사랑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켈트, 라틴, 게르만,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의 문화권에서도 남성 동성애는 이렇게 일반적이었다.

로메르에 따르면 주로 “두 남자의 관계에서 둘 중 한 사람은 ‘수동적 여성성’을 보여준다”. 한 쪽은 강한 남성성을, 또 다른 남성은 통념적 여성성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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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메데스를 납치하는 제우스>, 그리스 고고학 박물관 소장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제우스는 인간 가니메데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를 천상으로 납치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제우스가 ‘주인’이 되고 가니메데스는 그에게 복종하는 입장이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 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에 나이가 더 많은 남자에게 복종하는 관계를 가져야 했다. 이러한 관계는 사회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었고 이 관계에 있어 나름의 의무와 권리가 있었다. 소홀히 하면 사회적 비난이 따른다. 두 남자 관계는 언제나 비대칭적이었다.

이 또한 오늘날과의 동성애 개념과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 사람은 반드시 나이가 훨씬 많아야 했다. ‘윗 사람’ 남자의 욕망을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며 ‘아랫 사람’ 남자는 관계를 배우는 입장이었다. 남자들에게는 사랑과 우정을 ‘배우며’ 남성다움을 습득하는 필수 과정이었다. 남성다운 ‘주인’이란 모두를 복종하게 해야 한다. ‘젊은 남자, 여성, 아이, 노예 등’.

이런 그리스 모델은 어느 정도 로마에도 계승된다. 젊은 남자 안티누스에 대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사랑에서 이런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의 백부장 이야기에서, 이 백부장과 어린 노예의 관계가 애인 사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가능하다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결혼과 함께 이 남성애가 공존할 수 있었다. 청소년이나 노예와 어떤 관계를 맺던 간에 여성과의 관계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동성애는 지와 덕을 습득하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에게 남성애는 (미와 선을 배우는) 진정한 사랑으로 향하는 단계이며 이성간의 사랑보다 상위에 있다고 한다. 이성 간의 결혼은 ‘재생산’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인식되었다. 여자는 재생산을 위한 존재이기에 결혼이라는 결합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졌다. 스파르타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독신은 아예 법으로 금지되었다.

대부분 남성애에 대한 기록이 있을 뿐 여성애에 대해서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교육적 관계를 위해서만 여성동성애가 허용되었다. 여성 간의 사랑은 음악과 미술 등 예술을 배우는 관계로 이뤄졌다.

오늘날 여성동성애자를 뜻하는 레즈비언의 어원이 된 레스보스(Lesbos) 섬의 시인 사포가 그 대표적 예다. 사포는 결혼을 했고 엄마이기도 했다. 또한 많은 젊은 여성들과 예술적 교류를 하며 밀접한 사이였다. 그러나 그들이 육체적 관계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데 그리스와 라틴 문화권. 고대 근동의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동성애 그 자체가 금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만 그 개념이 오늘날과 다르다. 결혼과 상관없이 남성들은 동성애를 했고, 또 해야 했다. 그리고 개인적이기 보다 사회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수평적이지 않고 종속적이었다.

<향연>에서 언급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간의 우정 혹은 사랑이 더 우월한 연대로 받아들여졌다. 동성이냐 이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우월한’ 사랑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남성간의 연대 혹은 사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애에 ‘관대’했다기 보다 사랑의 위계가 오늘날과 달랐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동성애라는 개념이 ‘특별하게’ 등장했을까. <계속>

필자소개
이라영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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