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젊은 외교관의 죽음
    [산하의 오역] 1905년 5월 12일...책임 질 사람은 그가 아니었는데
        2013년 05월 13일 04:3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1905년 5월 12일 영국 런던의 얼스코트 트레브로드 4번지. 이미 본국으로부터 경제 적 지원이 끊긴 지 오래에다가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빼앗긴 젊은 외교관 한 명이 어두운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영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 서리 공사 이한응이 그였다.

    그는 3등 참서관, 즉 서기관으로 런던에 왔지만 민씨 척족으로 별로 외교관에 취미도 능력도 없던 민영돈이 귀국해버린 후 공사 서리를 맡아 왔었다. (이즈음 한국 외무대신이 단시간 내에 수십 번 교체되는 사태가 벌어져 신임 공사는 영국에 오지도 못하게 된다.)

    고종 황제는 그 이전까지 일종의 이이제이 외교를 구사했다. 한쪽이 강하면 다른 쪽에 붙고 그쪽이 너무 노골적이면 다른 쪽에 접근하는 등 나름의 외교적 생존책을 모색했다.

    후일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하는 민영환도 유럽을 순방하며 러시아 독일 프랑스와 밀약을 맺으려 한 바 있었고 고종 자신도 미국에 그치지 않는 친밀감을 표하는 등 양다리 또는 주꾸미다리 외교를 펼친 바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내치(內治)의 개혁과 스스로를 지킬만한 힘이었다. 고종은 외국의 힘을 철석같이 믿고 싶어했지만 자신을 군주로 모시는 백성들의 역량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전제 군주’로 남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힘없는 나라의 외교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세계 최강국 영국의 관심은 대한제국의 안녕이 아니라 러시아의 남하 저지에 있었고 이에 일본과 굳건한 동맹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미국은 필리핀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싶어했고 프랑스 역시 대한제국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판에 고종 황제가 러일전쟁에서 우리는 중립임!을 선언한들 거기에 관심있는 나라가 있을 리 없었다. 이한응이 영국에 온 것은 바로 1904년 1월 초였다.

    그는 국내 최초의 공립 교육기관이라 할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운 엘리트였다. 영어에 능숙했고 국제정세에도 밝았다. 그는 민영돈이 홀가분하게 떠난 자리를 맡아 영국 주재 대리 공사로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한다.

    이한응

    이한응. 사진 출처는 독립기념관

    1904년 1월 13일 공사서리를 맡자마자 그는 한반도 정세에 관하여 10페이지의 서한과 메모를 전달한다. “영일 동맹, 러프 동맹은 동양 평화를 위협할 수 있으므로 두 동맹을 해체하고 영,프,러 일의 4개국 조약을 맺어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골자로 영국이 한반도 문제에 주목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는 동남아에서 독립을 유지한 샴과 같은 방식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열강의 판세는 이미 일본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영일동맹은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미국의 대통령 테오도어 루즈벨트는 대단한 친일파였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는 걸 보고 싶다.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할 것이고 일본은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입장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영국 외무성이 보기에 이한응 대리공사의 노력은 가상하면서 불쌍한 것이었다. 영국 외상의 답변은 이랬다. “한국 서리공사에게 영국의 극동정책은 영일동맹에 근거하며 또 다른 ‘양해’는 있을 수 없음을 납득시킬 것.”

    1904년 8월 한일 1차협약에서 고문 정치가 시작되면서 본국과의 통신은 완전히 차단됐다. 그리고 쥐꼬리만큼 이어지던 공사관 운용 비용도 끊겼다. 영국 외무성은 이 가련한 나라의 공사관을 어찌 처결할지를 한국 정부에 물은 게 아니라 일본에게 묻고 있다. 일본은 그를 귀국시키라고 요구하지만 이한응은 홀로 영국 공사관을 지키며 고군분투했다.

    여러 차례 영국 외무성에 서한을 보내고 면담을 요청했으나 무시당했고 영국 외무성 차관보는 이한응의 문서에 이런 메모를 남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일본 외교관들은 그를 ‘미친놈’으로 매도했고 이한응의 호소에는 대답은 커녕 메아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국권이 반쯤은 남의 손에 들어갔고 제대로 된 나라로 취급받지 못하는 나라의 외교관으로서 고민하던 그는 1905년 5월 12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 순간에 꼭 11년 전에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의 손에 죽었던 관군 지휘관, 아버지 이경호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이경호는 전주 감영군과 보부상군을 이끌고 황토현에 진을 친 동학군을 공격하다가 야습을 당하고 포위를 뚫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이한응과 함께 했던 영국인 명예 총영사는 한국에 이런 보고서를 보냈다.

    “5월 12일 주런던 한국공사대리 이한응이 별세했습니다. 그분은 지난 몇 달동안 극동 전쟁(러일전쟁)에 대한 일로 상심을 많이 했고, 한국의 이익관계로 더욱 노심초사했습니다. 본국으로부터 반갑지 않은 기별을 들을때마다 비분강개했습니다. 이씨는 가장 공명정대한 분으로서 학문에 가장 부지런한 품성을 발휘했고 그가 영국에 주재하는 동안 그 지위를 잘 보존하였던 것입니다. 영국 외무성이나 그 밖에 다른 사회에서도 그를 잘 대우하였고, 이씨와 다른 나라 대표와 조그만한 차별도 없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대황제 폐하께 주달해주기 바랍니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다. 영국 외무성이나 그 밖의 다른 사회에서 이한응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잘해 봐야 대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망해 가는 나라의 가련한 외교관에 불과했다. 그것도 본국의 고위 관료가 아닌 나이 서른의 3등서기관 출신의 공사 서리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나라는 주권이 없고 국민은 평등을 잃었으니,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하다. 종묘와 사직이 무너지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니, 구차히 산다 한들 욕됨이 더할 것이다.”

    책임을 질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나이 서른의 말단 외교관, 본국으로부터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외교 활동을 수행하던 이가 죽음으로 속죄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책임을 자임하고 생을 단절한다.

    오늘날 그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새로이 독립한 조국, 나름 잘 살게 됐다고 어깨 깨나 펴는 나라의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 일을 굽어본다면 무슨 심경이 될지 궁금하다.

    대통령의 입이요 얼굴이라 할 사람이 벌이고 또 도망쳐 나와서는 제 근무하던 곳과 나라의 격을 완전히 걸레로 만들어버리는 저 후안무치함 앞에서 이한응은 또 한 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리라. 그리고 오늘에라도 윤모씨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호령할지도 모르겠다.

    “어서 처먹어라. 이게 내가 100년 전에 다 먹지 못하고 남긴 독약이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