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방인의 성탄절
    [파독광부 50년사]독일의 교회, 성탄절, 독일인 가정 <검정밥-3>
        2013년 05월 10일 01: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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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독광부 50년사]를 연재한다. 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 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파독광부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았을 것이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몇마디 필설로 다하기는 어렵지만 파독광부들중에 몇 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한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이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정리한다.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란다. <검정밥>은 2005년 독일 ‘교포신문’에 연재되었다.  파독광부 50주년사에 이정의 선생의 허락으로 연재한다.<파독광부 50년사 필자들>

    * [파독광부 50년사] 앞 연재 글(검정밥-2 기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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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 노동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지상에서 하루에 네 시간은 언어교육, 네 시간은 각개 작업장에 배치되어 독일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잡일을 했다.

    언어교육은 교육장의 지하실에 지하작업장의 모양을 본 따서 설치된 막장과 갱도에서 지하에서 쓰이는 도구들의 이름과 지하작업장의 이곳저곳의 명칭과 ‘무엇을 하라’ 혹은 ‘무엇을 어디에 놓으라’는 식의 간단한 회화를 배우는 것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무척이나 많은 시간을 고향생각에 시달렸고, 유별난 입맛을 독일의 빵과 버터와 치즈에 적응하게 만들었다.

    워낙 잠자기를 좋아하는 나에겐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고되고 싫었다. 또 비가 잦은 독일의 새벽길을 자전거로 약 반시간 달려서 회사에 도착하면 전신이 흠뻑 젖어서 옷이 몸에 감길 정도였다.

    오자마자 물과 음식이 다른 관계로 설사에 걸렸는데 이제는 감기까지 들어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아프다고 쉴 수는 없었다.

    당시 서독의 탄광 갱내 모습

    당시 서독의 탄광 갱내 모습

    이렇게 새 시대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도 이국에서 처음 맞는 성탄절이 닥쳐왔다. 25일과 26일 이틀을 성탄절 공휴일로 지냈다. 그래서 나는 김 군, 오 군과 함께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바깥에서 지내기로 하고 뒤스부르크 시내로 전차를 타고 갔다. 겨울 저녁의 다섯 시는 벌써 어두움 속에 잠겨 있었다.

    쌀쌀한 저녁기운과 함께 낱송이 눈이 여기 저기 희끗희끗 날리고 있었다. 역 앞 광장에는 큰 성탄목이 서 있어 성탄절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으나 시가는 공동묘지처럼 조용했다. 크리스마스 노래가 울려나오는 곳도 없었고, 상점도 벌써 다 문을 닫아버렸다. 상가를 따라 걸으면서 우리는 문이 닫힌 상점의 진열장만 실없이 쳐다보다가 여섯시 경에 주막을 찾았다. 그러나 술집이나 식당도 다 문이 닫혔고 우리가 들어갈 곳이 없었다.

    눈이 떨어지는 것이 자주 보였다. 하는 수 없이 기숙사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전차 정유소로 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전차가 오지 않았다. 우연히 지나가던 터키사람이 전차통행시간표를 가리키면서 오늘은 저녁 여섯 시 이후에는 전차가 없다고 하면서 택시를 타고 가라고 했다.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로 나갔으나 오가는 택시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기숙사까지 걷기로 하고, 가다가 택시를 만나면 잡자고 했다. 이제는 눈이 제법 많이 내려서 얼마 동안은 옷에 붙어 있기까지 했다. 우리는 걸어가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흘러나오는 창문 앞에 섰다.

    방안을 들여다보려고 해도, 이 사람들은 방에 불을 켜면 불투명한 이중 커튼을 걸기 때문에 방안을 볼 수가 없었다. 한참 걸어가니 불빛이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이중 커튼이 쳐지지 않은 거실이 보였다. 창문 쪽에 성탄목이 서 있었는데 젊은 아버지가 서너 살 먹어 보이는 어린 딸아이와 함께 성탄목을 장식하고 있었다. 직장에서 늦게 와서 이제야 성탄절 지낼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행복스럽게 보였던지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고 있었다. 24일 저녁 고향의 교회에서 성탄준비를 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어이, 정의! 창문 밖에 서서 방안을 들여다 보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김 군의 고함소리에 나는 발길을 돌렸다.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려서 이제는 눈송이가 길 위에 깔리기 시작했고 우리의 머리와 어깨에도 눈이 하얗게 내려앉았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고 있었다. 이중으로 닫쳐진 커튼 뒤에는 복된 사랑 속에 선물이 나누어지고 가족끼리 사랑의 입맞춤이 있겠지만, 이역만리 머나먼 타향에서 저녁도 먹지 못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쓸쓸하고 차가운 길을 걸어야하는 우리는 이 축하연에서 쫓겨난 이방인들이었다.

    밤 열한시 경이 되어서야 기숙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먹을 것은 없었다. 오후에 기숙사를 나갈 때에 식당에서 저녁을 먹지 않는다고 신고를 하고 나갔기 때문이다. 먹지 않는다고 신고하면 밥값을 계산하지 않았다. 찻물로 뱃속에 출렁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배를 채운 우리는 외국에서 처음 맞는 예수님의 생일을 눈길에 젖어서 지치고 배고픈 몸으로 외롭게 넘겼다.

    이튿날 성탄절 저녁 여섯 시에 내가 다니던 독일교회의 장로님이 나를 데리려 오셨다. 내가 이 장로님의 교회를 다니게 된 사실은 우연이었다. 독일에 온 그 다음 주일에는 교회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독일 사람에게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무엇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그 중에서 알아들은 말은 다만 ‘왼쪽’이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일찍 조, 배 군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회사 정문까지 와서 거기서부터 왼쪽으로 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기숙사 바로 근처에도 카돌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있었고, 우리가 왼쪽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갔을지라도 얼마 안가서 교회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직 그러한 것을 몰랐다. 얼마 가지 않아서 교회를 보았다. 십자가 위에 닭이 꽂혀 있었다. 독일어회화집에서 닭이 있는 교회는 카톨릭교회라고 읽은 기억이 나서 조금 더 가니까 정말 닭이 없이 십자가만 서있는 교회가 나왔다.

    이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틀린 말이었다. 옛날에 지은 교회는 거의 모두가 십자가 위에 닭이 꽂혔는데 더욱이 신교 예배당에서는 철저하게 닭을 십자가 위에 얹었다고 했다. 이것은 예수가 잡혔던 밤에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한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우리는 신교 교회를 발견해서 기쁜 마음으로 예배당에 들어가니까 교회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날이 마침 예수 강림절 첫 주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메웠고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동양인들이 나타나자 어떤 친절하신 늙은 분이 우리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 후에 강림절 잔치가 위층에서 있었는데 이 늙은 분이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셨다. 그 분이 그 교회의 장로였고 그 후론 매주일 자기 차로 우리를 태우고 교회로 갔고 예배 후에는 다시 기숙사로 데려다 주었다. 이 장로님이 우리 셋을 성탄절 저녁 축제에 초대해서 우리는 그와 함께 축제장소로 갔다.

    십자가도 달리지 않은 조그만 예배당이었다. 이 예배당은 자기가 소속된 교회와 관계없이 여러 교회의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보았다. 여기에서 오늘 저녁 장로님의 친척과 친지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성탄절 잔치를 했다. 예배당 안에는 하얀 보가 덮인 식탁이 네 줄로 가지런히 있고 그 위에는 접시와 칼, 포크,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

    올 사람은 거의 다 참석한 것 같았다.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장로님을 따라 그의 형제자매들이 앉아 있는 식탁의 빈자리에 앉았다. 곧 예배가 시작되었고 예배 후에 2부 순서로 들어가 성가대의 합창이 여러 곡 있었고 청소년부의 성극도 있었다.

    2부 순서가 끝나자 먹을 음식이 들어왔다. 식사를 하면서 친척들의 소개가 있었는데, 우리 앞에 앉은 가족이 장로님 막내 여동생 ‘판데스트라트’ 가정이었다. 부인은 ‘마리아’, 남편은 ‘게르하르트’라고 불렀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아델하이드’가 함께 앉아서 우리 사이에 영어로 통역을 했다. 밤늦게 헤어질 무렵 판데스트라트 씨 부부가 다음 주일 신년 초이틀에 우리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는 판데스트라트 가족의 점잔하고 친절한 인상이 마음에 들어 감사하면서 쾌히 승낙했다.

    새해 초이튿날. 조 군과 배 군과 나, 우리 세 사람은 판데스트라트 씨 가정을 방문했다. 4층 집인데 판데스트라트 씨 가정은 이층에서 살고 나머지 층은 세를 주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독일 가정에 초대된 우리에게 모든 방과 부엌과 화장실까지 보여주었다. 후에 들으니 독일 사람은 처음 온 손님에게 집의 모든 방을 보여주는 것이 상례라고 했다.

    방은 넓은 거실과 거기에 따른 서재 비슷한 「헤른 짐머(남자 방)」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에 남자들이 식사가 끝난 후에 모여서 담배와 시가를 피우거나 트럼프를 치면서 포도주 혹은 코냑을 마셨다.

    그 건너편에 부엌과 식사하는 방이 있고 그 옆에 화장실과 욕실이 붙어 있었다. 복도의 끝 양쪽에는 부모의 침실과 아델하이드의 방이 있었는데, 아델하이드 방에는 또 집 뒤에 있는 정원 쪽으로 넓은 창이 달린 큰 베란다가 있었다.

    베란다에는 둥근 테이블과 의자 두개가 놓여 있고 창가에는 아름다운 화초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아델하이드가 독서실 겸 공부방으로 쓰고 있었는데 성숙하는 처녀의 아기자기한 마음을 방에서 느낄 수 있었다.

    게르하르트 씨는 약종상(藥種商)을 경영했으나, 근래에 대규모의 슈퍼마켓 같은 약종상이 이곳저곳에 생겼기 때문에, 상점을 정리해서 팔아버리고 2년 전부터 가까이 있는 제철회사에서 사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부인 마리아는 가정부인으로서 집안 살림을 맡았다. 우리는 이 가정에서 즐거운 오후를 보내고 새해에 우리에게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다 소원해주는 이들과 헤어졌다.(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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