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의 별, 아니 스승 전규삼
[산하의 오역] 2003년 5월 8일, 우리 선생님, 우리 할아버지 농구 선생님 가다
    2013년 05월 09일 10:02 오전

Print Friendly

제목을 한국 농구의 별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 별은 자신이 빛나는 별이 아니었다.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른 별을 반짝반짝 빛나게 도와 주는 별이었고 그 반짝임의 뒤안에서 흐뭇하게 미소를 그리는 빛나기보다는 따뜻한 별이었다.

그의 이름은 전규삼. 그는 거의 평생을 농구와 함께 했지만 태극마크는 고사하고 선수로 뛴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2003년 5월 8일 돌아갔을 때 한국 농구의 별들이 그 앞에서 열을 지어 머리를 조아렸다. 김동광 유희형 이충희 강동희 신기성 등등 헤아리기조차 힘든 별들이.

그 대부분은 인천 송도중,고 농구부를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전규삼은 그 학교 교사였다가 농구가 좋아 농구부를 맡아서 무려 30년이 넘도록 선수들을 길러낸 코치였다.

그러나 그는 코치님이나 감독님으로 불리지 않았다. 김동광 세대까지는 그냥 아버지로, 그 이후에게는 할아버지로 일컬어졌다. 그가 돌아간 뒤 2005년 농구대잔치 MVP가 됐던 신기성도 이렇게 말한다. “고 전규삼 할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내게 농구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기는 농구가 아니라 즐기는 농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생님도 아니고 코치님도 아니고 할아버지.

신기성이 말한 즐기는 농구란 무엇이었을까. 이건 요즘 불미스런 일에 휘말려 농구 인생이 접혀 버리기는 했으나 한국 농구의 가드 계보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강동희의 설명을 인용해 본다.

송도중학교 입학한 후 경기를 지켜보던 강동희는 송도중 선수의 말도 안되는 플레이에 경악한다. 3점 라인 훨씬 밖에서 슛을 쏴 버리는 것이다. “저런 미친 놈이!” 강동희는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사태를 이해하게 된다.

“미국 아이들은 다 하는데 니들이라고 못 할 게 뭐 있냐.” 할아버지는 남들 다 하는 뻔한 농구 말고 창의적인 기술을 익히라고 항상 강조했다. 그래야 농구가 재미있고 실력도 는다고 했다. 실수해도 괜찮으니 남들보다 세 단계 높은 기술을 연마하라고 주문했다. 노룩패스, 훅슛, 비하인드 백드리블 같은 미국프로농구(NBA) 선수들이 쓰는 기술을 몸에 익히라고 했다. 이러니 경기 중에 3점슛 라인보다 먼 곳에서 훅슛을 날리는 일이 생길 수밖에….” (2012.6.8 동아일보)

전규삼은 다른 학교에서는 거들떠보지 않을 단신 선수들의 소질을 눈여겨보았다. 강동희며 김승현이며 한국 농구의 명 가드들은 전규삼이 아니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선수들에게 전규삼은 드리블이면 드리블, 리바운드면 리바운드 등 자신의 장기에 맞는 교육을 시켜 그 소질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고 다른 학교 코치면 눈을 부라릴 NBA 흉내도 웃으며 넘겼다.

그렇다고 그가 기본을 소홀히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슛도사 이충희는 송도고등학교에 와서 2학년 때까지 게임을 거의 뛰지 못하고 기본 훈련만 받아야 했다. 천재를 알아본 스승의 단련이었을까 아니면 그때까지 이충희의 기본기가 탄탄하지 못했던 탓일까.

“농구의 꽃은 속공”이라는 신조 하에서 송도고등학교 팀은 기둥같은 센터로 떠받들어지는 플레이 아닌 민첩하고 날카로운 패스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팀웍으로 한몫보는 팀으로 성장한다.

“공이 림을 맞은 후 발이 바닥에 닿기 전에 유희형(김동광과 비슷한 시대를 뛴 선수)에게 패스가 나갔고, 유희형의 손에 닿은 공은 곧바로 상대 골대까지 연결되어 득점으로 이어졌다” (서상철 전 산업은행 감독)는 회고는 그 유려한 플레이를 상상하게 한다.

전규삼 선생

전규삼 선생

그러나 전규삼이 가장 강조한 것은 농구의 기본이 아니었다. 그는 무조건 학생들에게 수업을 들어가게 했으며 위에서 말한 유희형의 경우 졸지 않으려고 맨 앞줄에 앉기도 했고 신기성의 경우는 “농구 못한다고 혼난 적은 없는데 숙제 안했다고 혼난 기억은 있다,”고 회고한다.

무엇보다 그는 대한민국 체육계에서 우뚝 서서 내뿜는 빛은 36년의 지도자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제자들을 때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서장훈을 두들겨 패다 보니 코트를 한 바퀴 돌고 있더라는 모 감독의 회고나 매를 피하려다가 선수들이 2층 숙소에서 뛰어내려 다리를 접질리기도 했던 모 감독, 기타 ‘사랑의 매’를 휘두르고 선후배들끼리도 그게 당연했던 우리 문화에서 그는 별종이었다.

“아이들은 때려서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정 때려서라도 가르치고 싶다면 때리는 선생은 같이 울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때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느끼는 게 하나도 없고 그렇다면 아무 쓸짝에 없는 가르침이 되는 거지.”

1915년생이니 이미 이충희를 신입생으로 맞았을 때는 환갑 무렵이었던 전규삼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면서 항상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가 특히 화를 낸 것은 경기에 졌을 때보다는 점프하고 내려오는 상대 선수 발 아래 다리를 슬쩍 집어넣는 악의적 반칙을 하거나 상대방을 가격하는 폭력 행위를 일으킬 때라고 했다.

농구 이전에 사람이 되어야 하며, 기계적으로 농구 기술을 배워서는 성공할 수 없고 같은 팀이든 상대 팀이든 농구를 하는 동료로서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당연히 송도고등학교에서 후배들에게 못되게 구는 선배는 거의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 쫓겨나서 문 밖에서 울며 사죄해야 했으니.

그는 1961년부터 1997년까지 송도중고등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후 은퇴한다. 그 36년 동안 아니할말로 그 덕에 대학을 간 사람도 수백 명이었을 터이고 스타 하나 보내 달라고 명문 대학이나 프로팀이 인사를 온 것도 수십 번은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세월을 보낸 전규삼은 학교를 떠난 후 생활고에 시달릴만큼 가난했다. 물론 가난이 자랑은 아니겠지만 그는 허다하게 많았을 유혹 앞에서도 그렇게 초연했던 것이다. 그 살림에도 그는 어려운 학생들을 몰래 돕기도 했고 농구화를 건네기도 했다. 물러난 뒤에도 가끔 나와 아이들의 활기찬 경기를 보며 활짝 웃었고 옛 제자들이 찾아오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는 전규삼은 2003년 5월 8일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떴다. 아마도 송도고등학교에서 농구를 한 이들에게 이날은 특별한 어버이날이리라.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긴 했지만 그 제자들이 장례식에서 읽은 조사만 할까. 그 일부를 소개해 본다.

“독기 서린 승부정신과 스파르타식 강훈련만이 유일한 살 길인양, 비인간적인 매질과 욕설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보편적인 지도자들의 지도 방법을 잘못된 것이라 판단하시고 선수들을 사랑으로 교육시키셨습니다.

매를 드시기는커녕 화를 내시는 법도 결코 없으셨던 선생님. 더 나아가서 선수들의 학과시간 출석상황과 학업성적까지도 일일이 챙기시며 수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셨던 선생님.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큰 경기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고 주위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시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교육자다운 대도(大道)를 걸으셨던 선생님.

그러나 결과는 선생님의 승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냥 승리가 아니고 그야말로 완벽한 대승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교육자로서 ‘참스승’이 되셨고 스포츠 지도자로서 ‘위대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모교 송도중고교가 한국 최고의 농구명문교로 우뚝 서게된 것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저희들이 오랜 세월 이 나라 농구를 이끌어 간 괜찮은 선수 또는 지도자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희들 모두는 마음의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숙여 존경하는 선생님께 감사의 큰절을 올립니다. 금전적으로 형편이 별로 좋지 않으신 줄을 우리 모두가 잘 아는데도 선생님께서는 남모르게 어려운 처지의 선수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형편에 따라 농구화를 사 주시기도 하셨고 병원비까지도 부담해주셨습니다.

농구화나 병원비처럼 눈에 보이는 그것이 큰게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선생님의 사랑이 더 값지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그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좋은 학벌과 해박한 지식, 높은 철학, 성실하신 자세 등을 지니셨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적인 영광의 길을 추구하셨더라면 더 화려한 위치에 서실 수도 있었던 선생님.

그러나 때로는 무보수로, 때로는 임시직으로의 척박한 가시밭길을 걸으시면서도 오로지 농구지도자로 만족하셨던 고마우신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가장 위대하게 보입니다. (후략)”

 이만하면 한국 농구 아니 한국 체육계의 큰 별 아닐까.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