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전 처음 만난 독일이라는 나라
    [파독광부 50년사]고향 물 맛과 너무나 다른 독일의 물 맛 <검정밥-2>
        2013년 05월 07일 10: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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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독광부 50년사]를 연재한다. 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 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파독광부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았을 것이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몇마디 필설로 다하기는 어렵지만 파독광부들중에 몇 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한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이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정리한다.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란다. <검정밥>은 2005년 독일 ‘교포신문’에 연재되었다.  파독광부 50주년사에 이정의 선생의 허락으로 연재한다.<파독광부 50년사 필자들>

    * [파독광부 50년사] 앞의 연재 글(관련 글 링크)

    ***

    근 스무네 시간의 지루한 여행이 끝나고 비행기가 덜컥하고 독일 뒤셀돌프 공항에 착륙한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우리의 앞날을 알려주는 듯 이른 겨울의 찬 기운은 넓은 비행장 벌판 위에 안개를 덥히게 했고, 창밖으로 내다보는 눈앞에는 부옇게 느리어진 어둠뿐이었다.

    아! 여기가 독일인가!

    나는 갑자기 속이 뭉클해지면서 눈앞이 흐리는 것을 느꼈다.

    어머님이 그리웠고 고향이 그리웠다.

    내가 왜 여기에 왔나? 이 비행기가 또 한국으로 가나?!!!

    “야, 일어나! 다 왔어!”

    김 군이 내 어깨를 치면서 “여기가 독일이다!” 고함쳤다.

    나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려서 공항의 넓은 홀로 인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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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는 모습(사진=이주노동자방송)

    거기에는 우리를 마중 나온 독일 광산회사의 대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한다는 인사가 있은 후 아헨(Aachen) 광산과 함보른(Hamborn) 광산으로 가는 사람들을 나누었다. 나는 김 군과 함께 함보른 광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면서 우리의 현대식 노예의 삶의 첫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버스가 지나가는 길옆에는 안개 속에 틈틈이 넓은 잔디밭이 보였다.

    “하! 이놈의 나라 잘 살기는 잘 사는구나. 이렇게 많은 골프장이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지나가는 집들도 신기하듯 쳐다보았다.

    약 한 시간 후에 우리는 조그만 광산촌 뒤스부르크-붸호펜이라는 마을에 있는 기숙사에 도착했다. 한 방에 셋 혹은 네 사람씩 방 배정을 받았다.

    나는 김 군과 오 군과 함께 창문이 두 개나 있는 밝은 모퉁이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방은 깨끗하게 도배가 되어 있었고 침대 세 개와 옷장 세 개 그리고 방 중앙에는 책상 겸 식탁과 의자 네 개가 있었다. 다른 방들처럼 네 사람이 들지 않고 우리 셋만 있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했다.

    김 군은 경상도 안동사람으로 국회의원 K 씨의 주선으로 독일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결혼한 지 아직 한해도 넘기지 못한 새신랑으로 임신한지 얼마 되지않은 아내를 부모님 밑에 홀로 두고 왔다. 목소리가 컸으나 입이 무거웠고 바르고 직선적인 성질로 불끈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 군은 우리 두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들었던지 한 방에 들자고 따라 붙은 친구로 전라도 광주 사람이었다. 사람이 아주 얌전하고 싹싹해서 정이 붙게 되는 성품을 가지고 입에 욕설을 오르내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한 방에서 몇 년을 함께 지날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것이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날과 다음 날이 쉬는 날로 정해졌다.

    며칠 동안 잠을 붙이지 못했던 나는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졌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나 심한 갈증 때문에 잠을 깼다. 김 군과 오 군은 벌써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목이 너무도 말라 통역이 일러 준대로 기숙사 지하실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독일에는 수돗물도 끓이지 않고는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식당에 24시간 마실 찻물이 음료수로서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식의 오차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시큼한 맛이 나는 독일 차를 마실 수 없었다. 우선 입술 축임만 하고는 우리보다 한 달 전에 왔던 이 형을 찾아갔다. 목이 말라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 나와 함께 식품점으로 가자고 부탁 했다.

    나는 상점에 들어가자마자 물병부터 먼저 찾았다. 이 형이 찾아서 쥐어주는 물병의 병마개를 따고는 상점 안에서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첫 모금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나는 물을 캭 뱉어낼 지경이 되었다.

    사이다 외에는 탄산가스가 든 물을 마시지 않았던 사람이 가스가 든 물을 마실 수 없었다. 그러나 병마개는 땄으니 돈을 지불하고 병을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내 평생에 처음으로 독일 돈을 주고 산 물병을 내던지자니 어쩐지 이상했다.

    나는 그 물병을 들고 보면서 ‘네가 내가 독일에 와서 내 삶을 영위하는 처음으로 접촉하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구나. 어찌하여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첫걸음이 이렇게 어렵게 시작되냐?’ 생각하니 앞날의 독일생활이 비참할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못 마실 물을 내가 어떻게 마시나 하면서 물병을 팽개치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독일에서 시작되는 내 삶 첫 페이지의 첫 줄을 보았다.

    그렇다! 이 나라에는 육천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 사람들이 마시는 물이 이것이며, 이 물을 마시는 독일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나보다 크고 살도 쪘으며 뱃속에 해충없이 사는 건강한 사람들이다. 내가 무엇이라고 육천만이 마시는 물을 못 마신다고 허나? 내 목구멍 하나를 위해서 육천만이 물맛을 바꾸어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나는 물병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서 한 모금 한 모금 우리 집 샘물의 냉수처럼 마셨다. 갈증을 해결한 나는 웃으면서 빈병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나를 지켜보던 이 형은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저렇게 못 마실 물을 다 마셔치웠느냐 하면서 며칠이 지나면 독일 찻물도 차츰 차츰 맛이 들게 된다고 나를 위로했다. 나는 그에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 형, 음료수는 이제는 문제가 아니요.”

    나를 의아해하며 쳐다보는 이 형에게 공원으로 산책을 가자고 했다. 나는 새벽에 버스 창문 밖으로 보았던 공원의 잔디와 골프장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형은 이 동네에는 공원은 고사하고 골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옆 동네에 있는 숲으로 가자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십분 걸으니 주택지에서 벗어나서 저쪽 건너에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확 트인 넓은 들판으로 나왔다. 새벽에 보이던 공원과 골프장의 잔디밭은 온데 간데 없고, 들판 보리밭에는 보리가 한 뼘 가량 자라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안개 속에 본 잔디밭이고 골프장이었구나, 생각하면서 꿀과 우유가 흘러넘치는 부유한 나라 독일에 대한 첫 실망을 맛보았다.

    독일에도 보리밭이 있다는 것은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이토록 나는 독일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 나는 속마음으로 내가 독일에서 일을 하고 살려고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독일이라는 나라를 알아야 되겠구나 생각하고 이 형에게 책방에 가자고 했다.

    독일어를 모르는 내가 책방으로 가자는 것이 이상했던지 이 형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독일에 온지 하루도 안 되는데 책방은 무슨 책방이냐면서 다음에 시간 있으면 가자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걸음을 계속했다.

    저녁에 우리는 모두 기숙사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 모였다. 기숙사에는 약 이백 명의 광부들이 사는데 한국인이 백여 명, 그 외에 터키, 유고, 체코슬로바키아,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칼, 모로코 등에서 온 독신 광부들이 살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일년 전에 왔던 일진 파견 광부들의 환영인사가 있었고, 그 다음엔 기숙사 내에서 지켜야할 규칙사항과 우리가 앞으로 근무할 회사에 대한 소개가 있은 후, 우리보다 일년 먼저 온 일진 광부들이 그동안 당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과 우리가 궁금한 것을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이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신문에 발표된 것과는 전혀 달리, 광산의 일이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너무 힘이 든다는 것과 아주 위험한 작업장이라고 말했다.

    “X할 놈들 왜 그렇게 거짓보도를 했나?”

    김 군이 금년 봄에 보도된 신문기사에 대하여 욕을 퍼부었다.

    우리는 금년 말까지 한 달은 지상에서 언어교육을 받고 내년 일월 초부터 지하에 내려가게 된다며 지하작업장은 천 미터나 되는 땅속에 있고 온도가 30도에서 40도까지 된다고 했다. 일진 중에는 벌써 다리를 잃은 사람도 있고 손가락을 한두 개 잃은 사람들은 몇이나 된다고 했다.

    독일에 왔다는 기쁨보다는 닥쳐올 앞날이 참담하게만 보였다.

    모두들 우울한 표정을 하고선 한숨과 함께 일어나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걸음을 방으로 옮겼다. <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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