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과 사별 후 청소노동자되다
    [노동자의 구술생애사 ②-1] "맏딸은 살림 밑천?"
        2013년 05월 06일 11: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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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자의 구술생애사> 두번째 노동자의 이야기 글 첫회분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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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교실은 학강과 강학이 일대일로 공부한다. 처음 시작교실에 갔을 때는 내가 과연 한글을 잘 가르쳐 드릴 수 있을까, 말실수라도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함께 공부를 하게 된 이경순(가명) 조합원 덕분에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엔 말을 잘 안 하는 나와는 달리 이경순 조합원은 말씀도 구성지게 잘 할뿐더러 밝고 웃음이 많으며 수다스런 분이라 나와 아주 궁합이 잘 맞았다.

    이경순 조합원은 숙제로 매주 일기를 써오는데 작문실력이 정말 뛰어났다. 그래서 매번 감탄하며 일기를 읽는 재미에 수업하는 것도 즐거웠다.

    이경순 조합원은 60대 후반의 나이에 비해 키가 아주 큰 편이고(조합원들 사이에서 키 큰 언니로 불린다), 이목구비도 뚜렷해서 외모도 나와 닮은 면이 많았다. 그래서 이경순 조합원은 항상 “우리 선생님을 보면 내 젊었을 때 생각이 나~”라며 내게 친근감도 자주 표현했다.

    조합원님의 따님이 직접 만든 필통도 선물해 주시는 등 나를 아주 예뻐해 주셔서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친밀해졌다. 지금까지 1년이 넘도록 함께 공부를 하고 있다.

    이경순 조합원의 남편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 시작

    이경순 조합원과 함께 공부를 한 지 6개월 즈음이 지난 2012년 9월, 학교청소노동자 구술생애사 프로젝트가 진행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당장 이경순 조합원이 떠올라 그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한글공부를 하다가도 이경순 조합원님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간간히 듣곤 했었다.

    세상을 떠난 남편 분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내가 못 배웠는데도, 단 한 번도 그거 가지고 무시한 적이 없었다”라는 말이나, “내가 깨지기라도 할까봐 조마조마 하셨다”라는 말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남편 분이 이경순 조합원을 매우 사랑하셨던 듯 했다. ‘그 덕분에 조합원님이 이토록 밝으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한국처럼 남의 학력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사회에서 ‘한글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은 특히나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자존감이 매우 낮을 수 있고, 혹여나 무시라도 당할까봐 감히 어디에 나서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시작교실 내에서만 보았을 때는 이경순 조합원은 다른 학강들에 비해 더욱 더 활달하고 수다스러우며 강학들에게도 꽤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내가 겪어온 어린 시절 때문인지 ‘무시를 받는 것’에 대해 매우 예민한 편이었기에, 그 점에서 그동안의 이경순 조합원의 삶이 궁금했다. 두 달여간 구술생애사 모임원끼리 세미나를 가진 뒤 2012년 11월 28일에 첫 인터뷰를 가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경순 조합원은 1947년 생으로 올해 67세이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태어났으며, 45년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거주하고 있다. 2006년부터 연세대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2008년에 연세대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청소노동자로 일하기 전까지는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고, 남편과는 2003년에 사별하였다.

    아무리 우리가 그동안 서로 친밀함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지만, 막상 인터뷰를 하려고 하니 이경순 조합원도, 나도 서로가 너무나 어색했다. 사전조사의 첫 질문이 이름을 묻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굳이 물어보지도 않아도 됐었다.

    하지만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마치 연극을 하는 듯 “처음 뵙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라며 첫 질문을 시작했다. 이경순 조합원은 그에 동조하여 “저는 이경순이라고 합니다~”하며 깔깔깔 웃었고,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초등학교 중퇴와 유똥치마의 기억

    사전조사표에 조합원의 최종학력을 적는 문항이 있었는데, 그 질문 하나로 조합원의 어린 시절과 왜 국민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는지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경순 조합원은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많이 말하는 편이라서 질문 하나에 다양한 대답이 나오곤 했다.

    이경순: 나는, 국민학교는 입학은 했어. 우리 할아버지가 나 데리고 간 생각이 나. 여덟 살이지, 그때가. 성남국민학교라고, 성남시에 남한산성이 있어갖고 그 이름을 따서 성남국민학교로 이름을 졌어요.

    할아버지가 입학을 시켰는데, 운동장에 들어간 생각이 나. 할아버지가 하얀 두루매기 입으시고 내 앞에 가고, 나는 할아버지 뒤를 쫓아갔어. 하얀저고리에다가 곤색 깡똥치마 입고. 까만치마가 아니고 곤색, 유똥치마야. 장미꽃마냥 무늬가 이만큼 박힌 거예요. 그걸 엄마가 해서 입혀서 학교에 입학을 시켰는데, 내가 1학년 1학기부터 학교를 안 간거에요. 그니까 아무것도 모르지..

    유똥 혹은 뉴똥 등으로 불리는 뉴텐은 비단과 비슷하고 화려한 무늬를 넣을 수 있으며 세탁이 용이해 식민지 시기부터 70년대까지 고급원단으로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 전쟁 중이던 1952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의 ‘휴지통’에서 유똥치마에 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공무원들의 양담배 금지령은 잘 준수되고 있는지?(중략) 베루벳도 유동치마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바람에 피난주부들은 큰 걱정. 피난 올 때 가지고 온 의복이란 전부가 사치품의 등속. 이래노니 뉴동 베루벳도 치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피난주부의 짐.”

    관촌수필

    이문구의 소설 ‘관촌수필'(휴이넘)의 삽화 장면

    이는 이경순 조합원이 꽤 유복하게 자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발표된 채만식의 소설 <맹순사>에서도 유똥치마에 관한 언급이 등장한다. 횡령이나 갈취로 착복을 하던 다른 순사들과 달리 순박했던(?) 맹순사는 이렇게 한탄한다. “칼자루 십 년에, 집안 여편네 뉴똥치마 하나 못해준 주변에, 헐 말이 무슨 헐 말이우?”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에 유년시절을 보낸 이경순 조합원에게 유똥치마는 그냥 ‘까만치마’와 구별되는 특별한 의복이었을 것이다. 이경순 조합원은 다음과 같이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이경순: 나는 어려서 밥은 안 굶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자수성가를 했어. 아버지가 전부 산에 가서 서까래 할 거, 기둥 할 걸로 소나무를 다 잘라다가 모아놨다가 집을 지으신 거야. 그리고 아버지가 남의 논 다섯 마지기를 얻어서 벼농사를 지신거야. 그걸로 일어나신거야. 조금씩, 조금씩 해서.

    나는 어릴 때 겨울에는 쌀밥 먹고 그랬어. 여름에는 쌀밥은 못 먹었어도 보리밥 그런 건 배불리 먹었어요. 나는 굶지는 않았어. 근데 내 친구들은 감자로 끼니를 때우고, 고구마로 끼닐 때우고, 아침만 밥을 조금 먹고, 점심 저녁은 다 죽이야. 그래도 나는 그런 생활은 안 해봤어요.

    아버지는 나무도 갖다 해서 팔으시고, 소한테 죽 줄 때도 콩을 다 삶아서 넣어서 먹이고. 그래서 소가 살이 번들번들 하면 그걸 팔아. 그럼 그게 돈이 많잖우. 옛날엔 은행이 어딨수? 그걸 그냥, 나무 같은 걸로 만든 책상에 열쇠를 해 가지고 거기다 돈을 넣고 잠궈놔. 그리고 봄에는 씨앗을 심궈 갖고 여름에는 고추, 참외, 수박, 토마토 그런 걸 시장에 팔았어. 청량리 시장까지 가는 도라꾸(트럭)가 동네마다 들어와.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서 아버지가 차곡차곡 여름내 모으고, 벼농사를 지으니까 가을에는 벼가 많이 나오잖우?

    그럼 겨울 쌀밥 먹을 거 냄겨 놓으시고, 나머지는 다 공출을 해서 팔아. 팔면 돈이 또 생기잖우? 그 돈을 그 담 봄에 땅을 사. 밭 한 뙈기. 논을 한 번에 아홉 마지기를 사신 적도 있어. 그 다음에는 또 다섯 마지기 사고, 또 밭 사고, 또 논 사고….

    그러니까 내가 22살에 결혼을 했을 때, 우리 아버지가 막 우셨어. 여름에도 쌀밥을 먹을려던 차에 시집을 온 거야. 그때는 부자가 된 거였지.

    생활력 강한 아버지 덕분에 다른 친구들보다는 잘 사는 편이었는데도, 이경순 조합원은 왜 입학까지 한 학교에는 나가지 않게 된 것일까?

    이경순: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는 왜 학교를 못 다닌 줄 아냐?” 그래서 “왜요?” 그랬더니, 그 동네에 나보다 3살 더 먹은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자기가 학교가기 싫으니까 맨날 나 데리고 놀러 다녔다는 거여. 나는 그거는 기억이 안나. 엄마 얘기가 그래.

    그러다가 인제 여름방학이니까, 여름에 바쁘잖아요. 그니까 엄마가 학교를 못 가게 한 거예요. 애기 봐주라구. 응, 내 동생들. 그래서 거기에 발목이 잡혀 갖고 공부를 못한 거여. 우리 엄마가 아홉을 낳았어. 딸 일곱에 아들 둘. 그 맏이가 나야. 9남매 중에 맏이가 나여.

    지금 나보다 두 살 아래, 육십 넷 먹은 동생, 육십 둘 먹은 동생만 안 길러주구, 그 밑으론 다 내가 기른 거여. 그러니 얼마나 고생했어요. 고 밑으로 지금 쉰여섯 먹은 애서부터는 내가 기르기 시작한 거여. 그래서 학교를 못 다닌 겨. 나만 못 배웠지. 내 동생들 다 배웠어. 다들.

    ‘맏딸은 살림밑천’이란 속담의 힘

    조합원의 어머님과 아버님은 두 분이 함께 농삿일을 하셨고, 식모를 둘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안일은 맏이였던 이경순 조합원이 도맡았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속담이 널리 쓰일 만큼 1960년 전후의 농촌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도시에서는 맏딸에게 가족부양의 역할도 맡겨졌다. 1970년대 가발공장에서 일을 했던 최순영은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에서 자신이 이른 나이에 일을 해야 했던 것이 ‘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속담과 관련이 깊다고 말한다.

    한국여성의 역사

    그녀는 남동생 셋의 학비를 보태야했기에 가발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여공’들은 주로 17~18살이었으며 15살 먹은 어린 노동자도 있었다고 말한다.

    한글 해독을 어려워하는 여성들의 경험을 연구한 백종주의 연구(‘저학력 비문해 여성의 경험세계에 관한 연구’)도 참고해볼만하다.

    일반적으로 의무교육이 도입되면 딸들이 가사노동을 맡게 되는 시간이 줄어드나, 한국의 경우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백종주는 특히 농촌이나 도시 저소득층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다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백종주가 인터뷰했던 이들이 주로 70년대와 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라는 점이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속담의 힘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경순: 엄마는 아부지랑 농사일 하시고, 나는 그 뒷바라지를 다 한 거야. 엄마, 아버지는 밭에 나가서 김 매시고, 나는 밥 해가지고 댕기면서 엄마, 아버지 점심 다 해다 바치고, 아침도 해먹어야 되고 저녁도 해먹어야 되고. 점심은 해서 갖다드리고. 그것도 아주 동생들 맨날 업고 댕기면서 했어. 거기다가 소도 밥을 먹어야 하잖아요. 풀 베다가 손으로 한 움큼씩 쥐고 작두로 썰구 그래서 소 밥을 이고 엄마, 아버지 밥을 이고 다닌 거여, 동생은 뒤에다 업고. 말도 못해. 그 일을 어떻게 했나 그런다니까. 그때는 젊으니까. 아무리 일을 해도 자고나면 거뜬거뜬허구. 근데 이제 지금은 나이가 먹으니까 그런 거는 없잖아.

    꿈이 많았을 어린 나이에 오로지 집안일에 몰두했어야만 했을 때, 어린 이경순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하였다.

    이경순 : 그놈의 동생들이 나한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아유, 나 집에서 살기 싫어서 도망을 갈라고 했었다니깐. 동생들 기르다보니까 서울이 어딘지 (궁금하고) 서울도 좀 가보고(싶고).

    친구 하나가, 서울 신림동에 친척이 있어서 걔가 거길 가서 있었어. 그것이 (서울 갔다가) 오면은 별의 별 얘기를 다해. 그러면 “야아… 우들도 서울 가서 좀 살아보자” 이러다가 친구들 허고 도구니 있지, 싸릿대로 만든 거. 거기다가 옷들 넣어놓고 “몇 시에 나가자” 이렇게 하고 있다가 들켜서 못 나갔어. 엄마덜한테 들켰지. 보구니에 넣어 놓은걸.

    그런…도망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다니까…그때가 열네 살이었나, 열다섯 살인가 그랬을 거야. 그니까 그때가 말하자면, 사춘기였던 것 같애. 그래서 그냥 친구들허고 “다 고만두고 집에 있자” 그래서 그냥 집에서 살다가 결혼해서 이렇게 여기까지 온 거 아니유(웃음).

    그렇게 동생들을 열심히 키우고 난 뒤, 22살의 이경순은 중매로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결혼, 그리고 시골이나 별다를 것 없던 남가좌동

    이경순 : 중매로 만났어. 남가좌동에 살던 사람이었지. 우리 외숙모하고 우리 아저씨(조합원의 남편)네 이모하고 이웃친구였어. 그 이모가 나를 보고 우리 아저씨랑 중매를 논거야. 말 나온 지 얼마 안 되서 음력 1월에 바로 선을 봤어. 그러곤 약혼을 해 놨다가 가을에 결혼을 했어. 그때 시절에 또 약혼을 했어요. 아유, 나 그때 생각만하면 참 우스워(웃음).

    서대문에서 선을 봤는데, 나중에 우리 아저씨가 하는 소리가, “내가 느이 동네에서 선을 봤으면 결혼 안 했지” 이래. “그 산골에서 선 봤으면 내가 안 했어” 이래. 그렇게 맨날 위세를 했어. 그래서 내가 “아따구, 지금은 거기가 여기보다 더 좋아” 그랬지. 나두, 서울이라고 시집을 오니까 남가좌동이 무슨 내가 살던 산골이랑 똑같아. 산은 없었어두 뭐 우리 동네랑 별로 차이가 없더라구. 그래서 내가 아버지한테 “아버지, 서울이라고 해도 별로 우리 동네랑 차이도 없수.” 그랬더니, 웃어죽는다고 우리 아버지가 그러셔. 어쨌든 그러다가 10월 27일날 결혼했어. 봄에 약혼해가지구.

    그러면 약혼 뒤 결혼 전까지 연애를 죽 하신거냐고 물으니, 연애 이야기는 쏙 빠지고 슬쩍 본인의 젊었을 적 외모에 대한 자랑을 하기도 했다. 이경순 조합원은 지금도 얼굴이 하얗고 키가 160대 중반 정도로 아주 크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이다

    이경순 : 연애했지. 약혼시절이 좋기는 좋았어. 집에서 음식을 해가지고 약혼을 했는데, 우리 사촌오빠가, 나 시집보내기가 너무 아깝다구. 그래서 내가 “왜 오빠?” 그러니까, “야, 너 약혼식 때 보는데 어디서 그런 목단 꽃이 내려와 앉았냐 했다” 이랬어. 너무 이쁘다는거야, 우리오빠가.

    내가 그때 연분홍색 한복 입구. 내 손으로 화장 하구 그랬었지. 그 오빠네 친구가 나를 얼마나 자기 마누라 삼을라고 그랬었다구. 우리 오빠가 나한테, “야 너 아무개 알지, 걔가 왜 그렇게 우리집에 자주 왔는 줄 아냐?” 그래서 내가 “왜 ?” 그랬더니 “니가 약혼해서 말이지, 그것이 널 달라고 얼마나 날 쫓아온 건 줄 아냐” 이러더라구. 니 동생 나 주라, 니 동생 나 주라, 이러구. 난 오빠가 나중에 말해줘서 알았지. 이름도 안 잊어먹어. 이름이 흥수야 흥수. 그래서 내가 오빠한테 “진작 얘기하지 왜 그랬어?” 이러니까 작은 엄마 작은 아버지한테 맞아죽을까봐 얘기를 못했다 그러대. 그때는 연애 걸면 큰일 나는 줄 알았거든.

    당시에는 자유연애에 엄격해서, “맞아죽을까봐” 관심 있다는 친구를 소개해줄 수도 없었던 모양이다. 한편, 이경순 조합원은 이렇게 발랄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일찍 죽은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냈다.

    이경순 : 아유 근데 내가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흥수)하고 결혼했으면 남편이 지금까정 살았으려나… 싶어.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짧게 살았나… 결혼생활이 참 행복했어요. 우리 아저씨가 속 안 썩이고. 뭐든지 감싸주고. “힘들었지?” 하는 그 말 한 마디가 너무 좋은 거야. 맨날 “애썼어, 수고했어.” 말 한 마디라도 꼭 그렇게 하더라구.

    인터뷰를 하기 전 한글 공부를 하다가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자주 표현하던 조합원이었다. 아픔을 건드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지만 자연스레 조합원이 먼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어서 조금은 다행이었다. 어쩌다가 일찍 돌아가셨는지를 물었다.

    ‘대들보’였다는 남편의 빈자리

    이경순: 12월에 돌아가셨어. 3월부터 아파갖구. 우리 아저씨가 12월 23일에, 추울 때 돌아가셨어. 내가 이렇게 청소를 하다가 저기 운동장 같은 데를 내다보면, 낙엽이 막 이렇게 떨어져 있잖아.

    그 때두 11월이 되니까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선 한 가닥 두 가닥 남은 것들이 있어요. 그렇게 안 떨어지는 게 있어. 그 나무 이파리가 대롱대롱 매달려서 그냥…내가 병원에 있을 때 그런 걸 내다보면은 참 그게 안 좋아. 하… 저 나뭇잎이 저렇게 혼자 있다가 똑 떨어지겠지. 그러구 병원에서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우리 아저씨가 그렇게 돌아갔어. 진짜 나뭇잎 모냥 대롱대롱대롱 하다가 그냥 세상을 끝을 마친 거여. 병원에서. 아우,

    마지막 잎새

    누가 그렇게 돌아갈 줄 알았나. 생각도 못했는데… 생각도 못했는데… 아파갖구, 폐암으로 가신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아유, 별의 별 생각이 다 나는 거야. 아우, 남들은 결혼해서 저렇게 부부들이 정말 백년해로하고 사는데 나는 이게 뭔고… 하고. 저래 보지도 못하고.

    아우, 진짜 사는 동안에는 사느냐고 그냥 재밌는 것도 몰랐는데 우리 아저씨 가고 나니까 그런 게 다 새록새록 생각나는 거야. 못 헌게. 놀러도 못 다녀보고, 같이 구경도 못 다녀보고. 그니까 그런 다 못하고 간 게 후회가 나. 그니까 사람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고 나니까 어우… 그것이 참 좋은 걸 알겠어. 특히 남자들, 남자들이 있어야 돼, 집안에는. 대들보가 있어야지, 대들보가 없으니까. 아유, 그렇다고 애들이 속 썩이는 것도 아니고, 애들두 다 착하게 잘 살고 있는데. 집안에는 대들보가 있어야 돼. 허물어지고 나니까 아니여. 영 아니여.

    남편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못하고 남은 생을 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이경순 조합원에게 너무나 외롭게 느껴지는 듯했다. 2003년 사별 이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남편의 빈 자리는 이경순 조합원에게 언제나 컸다고 말했다.

    이경순: 그래도 여기 오니까(노동을 하니까) 잊어먹어지는데, 요 가슴, 요 머리에 항상 있지. 떠나질 않지, 우리 아저씨가. 아저씨에 대한 그런 게 머릿속에 가슴 속에 다 있는 거지. 눈으로 안 봐서 그런 거지, 내가 진짜 목숨이 다 하고 나야 그게 잊어먹어지는 거지, 내 목숨이 살아있는 한 항상 있는 거여. 가슴하고 머리에는.

    평소에도 글솜씨나 말솜씨가 뛰어났던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항상 머리와 가슴에 아저씨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그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져 내 가슴도 먹먹해졌다. 분위기가 가라앉았기도 해서, 남편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경순: 내가 우리 아저씨하구 스물둘에 만났어. 우리 아저씨는 서른한 살. 우리 아저씨가 그렇게 해서 육십 넷에 돌아갔어. 나 쉰다섯에. 그니깐 아저씨하고 산 게 삼십 몇 년 된 거여 그럼? 아저씨하고 산 기간이 삼십….삼 년 됐나봐, 그치요? 그렇게 살고 가신 거여.

    나는 우리 아저씨 잘 만나서 고생 안하고 참, 편하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그냥 그렇게 되니까(돌아가시게 되니까) 나도 여기 나와서 이렇게 (일을) 하는 거여. 이런 것도 안 해봤지 나는. 생각도 못했지. 우리 아저씨 살아계실 때는, 절대, 어디 가서 내가 돈 번다는 입만 뻥긋하면 그냥 못하게 해, 못하게 해. 느이집 가서 하래. 자기하고 이혼도장 찍고 느집 가서 하래.

    남편이 ‘바깥일’을 못하게는 했지만 돈 버는 일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경순 조합원은 몰래 파출부 일도 가끔씩 하기는 했었다고 회상했다. 남편 몰래 일을 해야 할 정도로 살림이 어려웠던 것일까? 남편의 직업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했다.

    이경순: 시집을 오니까 밭뙈기만 있지 논이라는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 (친정에서는) 이만큼 쌓아놓고 먹다가 시집을 왔는데 쌀이 없어. 그렇게 쌓아놓고 먹다가 시집을 왔는데, 어매, 세상에… 신랑이 돈을 벌어야 말이지. 우리 아저씨가. 돈을 안 벌고. 왜 직장을 안 나가냐니까, 우리 시아버님이 살림을 못하셔. 그냥 있는 건 다 갖다 팔으셔. 그러니까 아들(이경순 조합원의 남편)이, 그 땅 지킨다고 직장을 안 다닌 거야. 그 밭뙈기 자기 아버지가 못 팔아먹게. 그래서 그게 지금 효도를 해 가지고 지금 집을 가지고 살잖우. 남가좌동 집을.

    남편과 함께 지은 2층 집

    그때부터 계속 지킨 그 밭 한 뙈기가 지금 이경순 조합원이 살고 있는 남가좌동 땅이다. 원래는 땅 크기가 조금 더 컸었다고 한다. 하지만 땅을 팔아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은 이경순 조합원이 살고 있는 집만 남아 있다. 그 집은 이경순 조합원이 남편과 손수 지은 것이다.

    이경순: 우리 아저씨가 사채돈 얻어서 지었어. 원래 어떻게 지었느냐면 2층까지만 지었어. 아래층 가게 다섯 개, 또 2층에 다섯 개로 나눈 홀. 그리고 우리는 방 하나 가지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3년이 지나서 3층까지 올렸어요. 50평으로. 그래서 지금 사는 우리 집이 커. 50평에서 살림을 다 하고 있어, 며느리랑. 집이 크니까 며느리랑 같이 살고 그러지. 따로 따로 독채마냥 생겨갖고, 이쪽은 며느리가 살고 이쪽은 내가 살고 그래요. 터 가지고 왕래하게는 했지만. 우리 아저씨가 그 고생고생도 무척 하고, 그거 짓다가는 너무 아파서 돌아가다 살았어(죽다 살았어). 우리 아저씨가 편도선이 아프면 죽는다는 소리가 나와. 지금 같으면 수술이나 했지, 그때 시절엔 그것도 못하고.

    일은 인부들을 시켰고 남편은 인부들을 감독했다고 한다. 이경순 조합원이 회상하는 바에 따르면 집 짓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조합원은 “그 일꾼들 해먹인 생각하면 아주 말도 안 나와”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 당시 조합원의 나이는 30살이었다. 당시 39살이었던 남편은 편도선이 너무 아파서 “내가 안 알아본 것 없이 약을 먹였다”고 이경순 조합원은 말했다. 그 중 특효는 지렁이였다.

    이경순: 지렁이가, 수챗구멍에서 많이 나오잖아. 그 지렁이가 물고기 미끼 주는 그런 거잖아. 그거를 삶아서 먹이면 안 아프다고 누가 그러더라고.

    그래서 나는 우리 아저씨가 아프니까 그게 징그러운 줄도 모르고, 밭도랑에 물 나가는 곳, 그 질척질척한 곳을 보니까, 지렁이가 엄청 나와. 그거를 징그러운 줄도 모르고 집게 있잖우, 집게. 그걸로 담아다가 깡통에다가 넣고 말갛게 씻쳐서 폭 고았더니 물이 뽀얘. 그걸 한 대접을 잡숫더니, 돌아갈 때까지 편도선이 도지질 않았어. 그게 그렇게 좋드라구. 맨날 돌아간다는 소리가 난다니깐, 너무 아파서. 편도선만 나면(아프면). 근데 내가 본인 모르게 “이거 잡수쇼” 하니까 이게 뭐녜. 그래서 “아유, 그냥 먹기나 해요” 하니까 그걸 한 대접을 마시더니 거뜬히 일어나는 거야.

    그러고는 돌아갈 때까지 편도선일 도지질 않았다니까. 그래서 나중에 도대체 뭘 먹인 거녜. 그래서 가르쳐줬어(웃음). “그거 지렁이 삶은 물이유” 그랬더니, “어이구, 그래? 그게 좋긴 좋다” 그러더라구. 놀라진 않더라구. 자기 몸에 좋다는 거는 뭐든지 다 잡쉈으니까. 몸이 아프니까. 그 집 짓다가도 돌아간다고 그럴 정도였어. 아파가지고.

    “아들이 중허지”

    그렇게 건물을 짓고나서는 가게가 빠지는 대로 전세로 놓고 사채를 갚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사글세로 돌려서 거기서 나온 세로 여지껏 생활을 해왔다고 했다. 얼핏 듣기엔 여유롭게 살았을 것도 같지만, “그 당시에는 월세가 너무 쌌”다. 하지만 살림이 어려웠던 이유는 또 있었다.

    이경순 조합원 : 우리 조카 대학 가르쳤지, 우리 시누 집 하나 사줬지. 우리 아저씨는 참 할노릇 다 했어. 조카가 원광대 나왔는데, 1년은 걔네 아버지가 가르쳤고, 3년을 우리가 가르쳤어. 하숙비까지 우리가 다해줬어. 그 조카가 지금 법률사무소에서 일해. 돈 많이 벌어요.

    우리 아저씨가 옛날에 조카 가르키자고 할 때, “아이고 그래, 나도 못 배우고, 우리 서로가 못 배웠으니까 누구라도 가르켜놓으면 살 때 답답하지 않진 않냐”라고 했어. 우리 아저씨가 중학교만 나왔거든. 걔네 아버지가 자기는 딸 가르킨다고, 둘은 못 가르킨다고. 아들은 안 가르치고 딸은 가르치겠대. 그래서 우리가 떠맡은 거여. 우리가 의논을 해서 가르킨 거지. 근데 딸이 중허우? 아들이 중허지. 근데 딸을 가르켜야된대. 참…(웃음) 그래 가지고, 우리가 그래도 돈이 더 많이 나오니까, 형님이 우리한테 떠 맡긴 거지. 우리 아저씨가 착하니까 그걸 거절을 못하고 받아줬지. 그래서 우리 영감 몰래 파출부도 다니고 그랬다우.

    ‘맏딸은 살림 밑천’과 더불어 ‘장남은 대들보’란 속담이 있다. 어린 시절을 살림 밑천 대우를 받으며 공부할 기회도 얻지 못했던 이경순 조합원이 “아들이 중허지”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경순 조합원은 공부할 기회도 얻지 못했고 살림 밑천 대우를 받았지만, 남존여비 사상이 이경순 조합원에게도 뿌리 깊게 박혀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자기가 그렇게 살았던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계속)

    필자소개
    이혜연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며, 2012년 3월부터 연세대 노동조합원들과 에서 한글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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