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을 파멸시키는 교육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2013년 05월 06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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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시절>은 1854년에 주간지에 연재되는 방식으로 나온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영국의 코크타운이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산업가와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다. 이 소설은 장사로 큰돈을 벌고 나서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그래드그라인드라는 사람이 아래와 같이 자신의 교육관을 설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학생들에게 사실만을 가르치십시오. 살아가는 데는 사실만이 필요한 겁니다.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심지 말고 사실 말고 다른 모든 것은 뽑아 버리세요. 사실에 근거할 때만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을 키울 수 있습니다. 사실 이외에 어떤 것도 학생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이것이 내가 내 자식들을 키우는 원칙이고, 이것이 내가 이 학생들을 키우는 원칙입니다. 사실만을 지키세요, 선생님!”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이성에 근거한 합리성만을 강조하는 그래드그라인드의 교육관은 19세기 사상사에서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던 제러미 벤덤의 공리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멋진 말을 내세우는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은 오직 객관적인 사실만을 그리고 그러한 사실 중 사회에 유익한 것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익하다는 것도 수치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공리주의는 수치로 표시할 수 없는 가치나 다수가 원하는 가치로 확인되지 않는 가치는 인간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철학을 신봉하고 있는 그래드그라인드는 이 소설에서 모든 것을 현실적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는 둘 더하기 둘은 넷일 뿐 그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와 저울, 곱셈표를 항상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면서 인간성의 모든 면을 무게로 측정하고 치수를 재고 그 결과를 알리며 자신이 옳음을 설파하는 사람인 셈이다. 그에게 있어 인간성은 객관적 사실과 숫자의 문제이다.

    그래드그라인드가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들은 모든 학문 분야의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공장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똑 같은 방식으로 제조되어 똑같이 최고의 제품이 되듯이 이 교사들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똑 같은 주입받은 자들이다.

    이들 선생들은 이런 고급 지식을 전수받으면서 감정과 상상이 고갈되었으며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생명력은 말살된 자들이다. 이런 완벽한 교장과 이런 완벽한 선생들이 가르치는 이 학교의 교육 과정 또한 완벽하다고 전제된다.

    따라서 이 학교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제외한 다른 것도 알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 호기심은 불필요한 것이며 감정은 합리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상상이나 공상은 바른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여 인간과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된다.

    그래드그라인드는 학교에서만 ‘합리적’이지 않다. 그는 자신의 자식들도 ‘합리적’으로 키운다. 그의 ‘합리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스무 살 되는 그의 딸인 루이자를 서른 살이나 더 많은 은행가인 바운더비와 결혼시키는 데서 드러난다.

    그래드그라인드에게 있어 자기 딸과 사윗감이 서로 사랑하는 지는 고려할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신랑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 자기 딸에게 어울린다는 것이다.

    나이 차이가 결혼의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래드그라인드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인구 통계를 볼 때 나이 차이가 많은 부부가 많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고 딸에게 설명한다. 나이 차이가 많은 결혼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서른 살 더 먹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고 딸을 설득하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

    이런 학교에서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벤담이 애초에 의도했던 “행복”을 이룰 수는 없다. 그래드그라인드 식의 합리적 교육을 받았지만 아들인 톰은 자기의 누이와 결혼한 바운더비의 은행을 터는 범죄자가 된다. 늙은이와 결혼한 루이자는 비참한 결혼 생활을 하며 다른 남자의 사랑을 갈구한다.

    아들의 범죄와 딸의 비참한 결혼 생활을 확인하면서 그래드그라인드는 자신의 잘못된 교육관이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는 자식들은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은 것을 알고 후회한다. 이 소설에서 그래드그라인드는 사랑과 슬픔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현명하고 겸손한 인간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

    19세기 영국소설 <어려운 시절>에서는 그래드그라인드가 사실과 숫자에 근거한 공리주의적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지만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그래드그라인드가 신봉했던 숫자에 근거한 교육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디킨즈가 이 소설에서 제대로 된 교육은 합리적 이성에 못지않게 감정과 상상, 그리고 호기심을 키우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제 교육은 감정과 상상 조차도 숫자로 바뀌어 지고 있다. 바로 성적이다.

    겉으로는 문학 교육이 있고 예술 교육이 있어 학생들의 감수성을 고양시키는 것 같지만 문학 작품 읽기나 음악 감상도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시험으로 귀결된다. 현재의 교육이 모두 숫자로 이루어져 있음은 학습 성과가 시험의 결과물인 성적표로 나타나는 데에서 확인된다.

    학습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한다는 명분으로 개발된 정량 평가는 평가 목적에 부합하는 면만 산술적으로 평가한다.

    수학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주어진 문제를 요구하는 대로 풀었다는 의미이지 그 학생이 숫자나 공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평가 도구를 아무리 잘 개발한다 해도 평가 지표가 수치로 표시되는 한 정량 평가의 편협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학습 평가 방법은 학생 개개인에 대한 학습 성과를 정량적 수치로 평가할 뿐 아니라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의 순위를 가리기 위하여 더 나아가 한 나라의 모든 학생들과 순위를 가리기 위한 방식으로 학습 성과를 평가한다.

    이러한 정량 평가의 결과는 학생의 지적 능력과 감수성을 신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구도 하에 승리자와 패배자를 분리해내고 패배자를 집단에서 도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성적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은 현재의 교육이 학생의 인성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교육 기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세기말에 시작되어 끊임없이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교육은 이제는 학생을 수치화한 순위로 수치로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 교사와 교수, 더 나아가 학교 자체를 순위로 평가하고 있다.

    초중등 학교에서는 교원평가제를 통하여 교사를 수치로 평가하고 대학에서는 업적평가를 통하여 교수를 순위로 평가한다. 교사와 교수의 평가에서 주어진 지표 부문의 성과만이 업적으로 인정된다.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노력과 성과는 모두 무시된다.

    수치화된 평가는 교육 기관에도 적용된다. 고교등급제가 암묵적으로 인정되며 중앙일보와 조선일보가 주도하고 있는 언론사 대학평가는 전국의 대학에 순위를 매기며 대학 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학생의 취업률과 충원률로 퇴출 대학을 결정하는 정부의 구조조정 평가는 대학으로 하여금 취업률을 조작하게 만들고 학적부에는 학생이지만 사실은 학생이라고 볼 수 없는 유령 학생을 양산한다.

    수치로 평가하고 더 나아가 순위를 매겨 줄 세우는 교원평가와 대학평가는 교육자와 교육기관으로 하여금 지적 정서적으로 성숙한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의 목적 자체를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현재의 교육은 이제 더 이상 조화로운 인간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인성을 함양하고 있지 않다. 교육은 이제 야수의 세계의 생존 방식인 약육강식의 원칙을 실현하는 데 있다.

    순위가 높은 학생, 선생, 학교는 높은 순위를 지키고 더 올라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다른 학생, 다른 선생, 다른 학교를 짓밟으며 자신이 짓밟힐까봐 초조해 한다. 순위에 밀리는 학생, 선생, 그리고 이런 학생과 선생의 보금자리여야 할 학교는 낙오자가 되어 끊임없이 퇴출의 위협을 받는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성적순은 행복을 파괴한다.

    자연 상태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면 인간의 역사는 그런 자연 상태를 극복하여 질서와 조화가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교육은 인간 사회를 다시 피비린 내 나는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부추기고 있다.

    <어려운 시절>에서 감정도 사랑도 없이 오직 사실과 숫자만을 믿었던 그래드그라인드는 자신의 교육관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을 깨닫고 이를 뉘우치며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실제 세계에 있는 현재의 교육은 인간과 사회를 얼마나 더 파멸시켜야 잘못을 깨닫고 인간성을 키우는 교육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필자소개
    민교협 회원,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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