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모르는 심오한 '창조경제'
    [기고-언론비평] 박근혜와 빌 게이츠, 왜 만났나
        2013년 05월 05일 01:29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부처인 ‘지식경제부’ 명칭에 얽힌 일화가 있다. 외국에 나간 장관이 지식경제부(Ministry of Knowledge Economy) 명함을 내밀고 소개를 해도 대개의 외국인은 “무슨 일을 하냐?”고 되묻기 일쑤거나, 교육업무를 떠올렸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 부처의 한 관료는 “부처 이름이 왜 그러냐?”며 반복되는 외국인들의 질문에 진땀을 빼다가 결국,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덮고 넘어갔다고 한다.

    이런 일화는 권력자들의 허세를 보여준다. 명확한 실체와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자신이 뭔가 새롭고 대단한 일을 하는 양 과시할 요량으로 엉뚱한 이름을 지어내는 것이다.

    그 2탄이 탄생했다. ‘미래창조과학부(Ministry of Science, ICT and Future Planning)’ 역시 박근혜 정부의 핵심부처로서 야심찬 창조물이다. 이 명칭을 보고 국가 경제정책 전반을 다루는 핵심부처를 떠올릴 외국인들이 얼마나 될까? 한글 이름부터가 너무나 창조적이어서 그 실체가 오리무중이다.

    게다가 이 오묘한 이름의 ‘미래창조과학부’의 핵심 키워드는 창조(Creation)인데, 그 말은 영문 표기에서 아예 빠졌다. 종교연구단체로 오해받을 우려 때문이라는데, 허세 작렬 작명을 하려다가 제대로 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편저편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은 ‘미래창조과학부’ 탄생의 내용적 근간이 된 ‘창조경제’부터가 아리송하다고 투덜댔다. 언론에서는 이명박 ‘녹색성장’의 재판이 될 거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만든 사람이 설명해봐라”

    박근혜 정부의 주장에 따르자면 창조경제란 “정보통신기술(ICT)을 다른 산업과 융합해 신성장동력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일자리를 늘리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에 대해 취임 초기 언론은 구체성이 부족하다며 간혹 우려를 나타냈지만, 그러한 구체성의 결여는 오히려 과학기술, 금융, 문화, 중소기업, 디자인, 벤처기업, 청년창업 등 온갖 분야가 “우리가 창조경제의 핵심”이라며 최고 권력자의 간택을 받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배경이 됐다.

    그중 압권은 남성일 교수(서강대 경제학부)의 ‘창조적 해석’이다. 지난 3월 30일 동아일보 칼럼에서 그는 창조경제는 융합이며 융합의 교과서적 사례는 대형마트인데, 서울시는 대형마트 품목제한으로 창조경제에 역행하는 지방정부라고 질타했다. 이쯤 되면 병이다. 시장독점과 융합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이거나 병적인 박원순 악플러 되겠다.

    창조경제의 내용이 모호하다보니 시장의 절대강자인 재벌들의 반응도 썰렁하다. 전경련은 회의를 열어 ‘창조경제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했지만 모든 언론은 말뿐임을 감지했으며, 5대 그룹은 그 회의에 참석조자 하지 않았다. 지배세력 일부는 불안해졌다.

    새누리당 의원 다수는 지난 달 30일 열렸던 첫 당/정/청 워크숍에서 “창조경제가 도대체 무슨 말이냐,…만든 사람이 설명해봐라”며 청와대를 질타했고, 인사청문회에 선 최민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조차 창조경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며칠 후 결국 준비된 여성대통령 박근혜가 나섰다. 자신이 직접 설명하겠다며 구체적 방법론으로 언급한 사례는 ‘벤처창업 지원론’이었다.

     창조를 위해 희생될 사람들, 창조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이는 이미 흘러간 레퍼토리다. 과거 1990년대에 이미 벤처창업 붐이 휩쓸고 갔지만, 그 미래인 지금의 상황은 창조적이지도 새롭지도 않다. 지금 벤처산업은 상당한 포화상태이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살인적인 장시간노동을 요구하고 있다. 신기술산업인지 노동집약산업인지 분간조차 안 되는 노동현실만 남았다.

    박근혜는 과연 누구의 어떤 창조성을 바라는 걸까? 분명히 노동대중은 아닌 듯하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적 인재 육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94년 언급한 “천재 1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천재경영’이 오버랩 되는 대목이다.

    인재 1명의 창조성을 꽃피우기 위해 뻐꾸기시계는 얼마나 울어야 하는가? 장시간노동에서 창의성이 자랄 수 없음은 저들도 알고 있다. 심지어 동아일보는 “더 많이 쉬고 놀아 창의적인 사고를 하게 하라(‘칼퇴’를 허하라! / 3월8일자)”며 마음에도 없는 충고까지 하지만, 허할 자본도 없고 정부 또한 그럴 생각이 없다. 그들은 천재를 원할 뿐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초과노동에 시달려야 인재집단의 여유로운 상상의 시간이 보장될까? 상상력은커녕 입시와 취업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펙에 매달리는 아수라 속에서 창조적 인재란 애초 가당키나 할까?

    박-빌게이츠

    지난 4월 22일 박근혜 대통령과 빌 게이츠 MS회장이 만나는 장면

    한국엔 아는 사람이 없으니 빌게이츠에게 물어보자?

    결국 창조경제인지 천재경제인지 대중들에겐 또 다시 딴 세상 얘기다. 그럼에도 지배세력들 사이에서는 지금 창조경제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손에 쥐는 것 없는 논쟁이 지겨워진 보수언론은 어설픈 짓 말고 하던 대로 하자고 궐기한다.

    매일경제는 “창조경제 뜬구름이라면 현실경제(성장경제) 택하라”며 포문을 열었으며, 동아는 “기업가 정신을 북돋워”야 창조경제의 심장이 힘차게 뛸 수 있다고 했다.

    한술 더 떠 중앙은 “‘창조의 꽃’ 꺾지나 말라”며 “종업원 열 명이라도 먹여 살리는 사업자라면 애국자”고, 심지어 “시장이 규제의 속박에서 최대한 벗어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긴요한 경제민주화”라는 황당한 말로 창조의 신성은 자본에게 있음을 선언했다.

    조선은 잔뜩 짜증이 묻어나는 어투로 “국민행복시대 두 달”을 보니 뭐하나 제대로 할 것 같지 않다며, “경제를 다시 성장시킬 수밖에 없다”고 못 박았다.

    창조경제는 끝내 ‘자본 중심의 성장주의’로 귀결되는 것일까? 반면 진보진영은 창조경제에 무관심한지 무기력한 건지 모르겠지만, 창조경제를 논하는 진보 자체가 많지 않다. “말은 그럴듯한데 예전처럼 해서 되겠냐?”이거나 “성장주의의 포장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목소리가 일부 들리지만 별반 내용은 없다.

    지적 자체는 틀리지 않지만, 구체성이 부족한 나머지 이슈 개입력에서 아쉽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창조경제 어디에도 노동자 민중, ‘그들의, 그들을 위한, 그들의 창조’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창조란 무릇 새로운 것이고 금기를 깨는 방식이다. ‘법과 질서’라는 기득권 질서를 강요하며 이윤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보수집단의 발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난 18일 박근혜 정부는 마침내 말 많은 창조경제의 청사진의 내놓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언론의 반응은 차갑다.

    그러자 궁색하게도 꺼낸 비장의 카드가 미국의 빌게이츠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를 초청해 4월 22일 창조경제에 대한 자문을 들었다는데, 아무래도 신통치 않았던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한 기업가가 한국경제를 새롭게 창조해줄 리도 없고, 그의 명성을 빌어 창조경제를 어설피 포장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빌게이츠의 명성에 따른 역풍이 거셀 수도 있다. 이래저래 갑갑한 정부가 아닐 수 없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부대변인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