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옥의 왕국, 콩고 자유국 탄생
    [산하의 오역] 벨기에 왕의 끔찍한 침략과 살육의 과거...1885년 5월 2일
        2013년 05월 03일 03: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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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기에는 유럽에서는 꽤 신생국가에 들어간다. 1839년이 돼서야 그 독립을 승인받은 나라기 때문이다. 1830년대까지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고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 속에 혁명을 일으키고 독립을 선언한다.

    네덜란드 왕은 벨기에 땅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지만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벨기에는 독립을 쟁취하고 레오폴드 1세를 국왕으로 모신다. 이 독일 귀족 출신의 왕의 아내는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시민의 왕’으로 옹립된 루이 필립의 딸이었다. 이 사이에서 오늘 이야기할 왕자 하나가 탄생하게 된다.

    이 왕자는 전반적으로 둔했다고 한다. 장가를 들어도 ‘음양의 이치’를 몰라 코치를 받아야 했을 정도였다니 어련했을까. 공부 성적도 시원찮았는데 유독 두각을 드러낸 과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건 ‘지리’였다.

    국왕이 되어 레오폴드 2세로 불리우게 된 뒤에도 그의 관심은 지리였다. 그리고 신생 독립국으로서 이미 전 세계를 갈라먹고 있는 인근 국가들이 자기네 깃발들을 꽂아 놓은 세계 지도를 보며 책상을 쳤다. “우리 벨기에 것은 없단 말이냐.”

    여기서 또 다른 인물 한 명을 돌아보자. 헨리 모턴 스탠리. 어디서 많이 듣던? 그렇다 바로 그 사람이다. 행방불명된 리빙스턴 박사를 원주민 마을에서 찾아냈고 “Dr. Livingston? I presume….. ” (리빙스턴 박사님 맞으시죠?)라는 역사적인 대사를 쳤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은 신문 기자이면서 탐험가면서 동시에 악당이기도 했다. 그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콩고강에 이르는 자신의 탐험 내내 원주민들에게 채찍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렀고 탐험(?)을 방해하는 원주민들을 아낌없이 죽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표현에 따르면 “단호한지는 몰라도 추한” 남자였던 스탠리를 주목한 것이 레오폴드 2세였다. 지리를 좋아했던 레오폴드답게 그는 스탠리를 후원하여 아직은 열강의 손이 닿지 않은 아프리카 내륙을 살피도록 했다.

    1878년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은행가들의 도움으로 상(上)콩고 연구위원회를 창설했다. 콩고 강을 따라 콩고 오지로 들어가는 길을 개척하려는 목적이었다. 후일 ‘콩고 국제 협회’로 이름을 바꾸는 이 단체의 후원을 받으며 스탠리는 오늘날의 콩고 일대를 휩쓸고 다니며 “전혀 원주민 추장들은 이해할 수 없는” 수백 개의 조약을 맺었다.

    거기에는 원주민들의 주권을 레오폴드가 설립한 ‘협회’에 양도한다는 엄청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열강들은 해안 지역은 몰라도 아프리카 한복판의 내륙 지역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레오폴드 2세는 후일 그의 격렬한 반대자가 되는 윌리암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군주의 한 분이다. 기독교 문명에 봉사하고, 백성들의 복리를 촉진하고 지혜, 자비, 정의로 통치하려는 높은 이상을 가지신 분” (레오폴드 왕의 유령- 무우수 출판사)이라 찬양받을 정도의 연기력을 발휘한다.

    북부 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이 자행하는 노예 사냥에 분노하는 척 했으며, 원주민보호협회 명예 회장으로서 “오로지 콩고에 문명의 빛을 주기 위해” 봉사하겠다는 레오폴드의 거짓말과 콩고를 벨기에 왕 치하의 국제 식민지로서 자유롭게 드나드는 중립지대 정도로 간주한 열강의 판단을 거쳐 벨기에 영토의 76배에 달하는 콩고 땅은 레오폴드의 ‘사유지’가 된다. 1885년 5월 2일이었다. 그리고 콩고 땅에는 지옥이 깃든다.

    처음 레오폴드 2세가 눈독을 들인 것은 상아였다. 콩고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들은 요구하는 상아를 대령하느라 죽을둥 살둥 뛰어야 했고 상아들을 나르느라 어깨 살이 짓물러야 했다. 할당량에 미치지 못하거나 잠시 게으름이라도 피울라치면 바로 죽음의 벌이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상아는 양반이었다. 유럽에서 고무 타이어가 발명되자 레오폴드 2세는 환호성을 지른다. 콩고에는 고무나무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그때부터는 고무나무에 매달려야 했다. 역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죽이거나 손발을 잘라 버렸다.

    손발이 잘린 콩고의 원주민들

    손발이 잘린 콩고의 원주민들

    여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뒤 고무 생산 작업을 시키고 만족할만한 성과에 이르지 못하면 인질들을 죽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공포에 질린 마을 주민 전체가 집단자살하기도 했다. 최소 5백만, 최대 1천만에 가까운 대학살이 일어났다.

    이 콩고 ‘자유국’의 한 관리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원주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머리 수백개를 잘랐다. 그러면 이후로 죽 엄청난 (고무) 공급이 있었다. 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도적이다. 나는 백명을 죽였으나…그 덕분에 다른 5백명이 살 수 있었다.”

    고무 생산량이 달린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그렇게 보고서를 썼다. “더 많은 팔다리를 잘라내겠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작가 조셉 콘라드는 콩고를 여행하면서 사람의 머리로 쌓은 담벼락 같은 끔찍한 풍경에 치를 떨었고 이를 모티브 삼아 <어둠의 심연>이라는 소설을 쓰는데 이걸 수십년 뒤의 베트남으로 무대를 바꿔 만든 영화가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었다.

    이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가 점차 폭로되고 국제 여론이 끓어오르자 벨기에 정부는 콩고를 국왕의 사유지에서 벨기에 식민지로 바꿀 것을 요청한다. 이미 콩고에서 거둬들인 천문학적 수입을 사적으로 써 버린 레오폴드는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 벨기에 정부에게 자신의 ‘콩고 자유국’을 매각하게 된다.

    즉 벨기에 정부는 콩고 자유국을 레오폴드 개인으로부터 샀던 것이다. 정식으로 벨기에의 식민지가 된 뒤에도 식민 통치는 여전히 혹독했고 채찍질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때부터 손발이 잘려나가지는 않았다고 하니 그나마 콩고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

    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 레오폴드 2세는 꽤 소탈하고 격의없는 왕이었다고 한다.

    “ 검소한 방에서 기거하면서 시장에 자주 나가 서민들과 어울리기에 임금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날 그의 방 문전에 아이 하나가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임금이 물었다. 누구를 기다리느냐고ㅡ. 임금님이 보고싶어서 기다린다고 하자 「봐보았자 별볼일 없는 사람이다」 하며 들어갔다.” (이규태 칼럼 중)

    그런 사람이 최고 천만 명을 죽인 학살자들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그는 아무런 처벌도 천벌도 받지 않고 평온하게 죽었다. 그는 1909년 죽었는데 그의 추도식이 대한제국의 명동성당에서도 열렸다. 이때 이완용이 참석했다가 이재명이라는 청년의 칼에 죽을 뻔한 일도 벌어졌다. 그나마 이완용이라도 죽었더라면 레오폴드는 사후에 좋은 일 하나라도 했다고 쳐 줄 텐데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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