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몸을 씻은 기억을 일깨운 바다
[작가들 제주와 연애하다-28] "구럼비의 파도소리는 자장가"
    2013년 05월 03일 11: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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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연재 글을 모은 책 <그대,강정>(북멘토 펴냄)이 출간되었습니다. 4.3 항쟁을 염두에 두고 4월 3일 출간한 <그대, 강정>은 ’43인의 작가’와 ’7인의 사진가’가 참여했습니다. 오로지 강정을 향해 쓴 연애편지 모음집인 <그대, 강정>의 인세 전액은 ‘제주 팸플릿 운동’과 강정 평화 활동에 쓰이게 됩니다.

제주 도민들에게 강정마을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작가들의 편지 연재는 처음 조정 시인이 제안하고, ‘제주 팸플릿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제주 팸플릿 운동’은 여기에서 연대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언어로 세상을 물들이고 싶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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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몸을 씻은 기억을 일깨운 바다

좀 늦기는 했다. 달력을 꺼내 펼쳐 보니 작년보다 보름쯤 늦었다. 꽃들의 봄날이 펼쳐진다. 봄바람에 불려나온 작은 작은 봄꽃들이, 파릇파릇 새싹들이, 아으, 기지개를 켜며 세상을 기웃거린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맞춘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꽃과 초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평화란 어떤 상태일까. 생명의 기운이 고루 조화로워서 밝고 환하며, 끊임없이 활기에 가득 차 있으나 고요히 흐르는 물과 같은 상태일 것이다.

강정 마을에 갔다. 마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하루 주막집을 연다고 했던가. 그날 제주시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끝내고 제주에 사는 김수열 시인의 차를 채근, 독촉하여 부랴부랴 달려갔다. 마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오래 끌어 왔기 때문에 많이들 지쳐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모두들 환하고 밝았다.

마을 회관 앞에 모여 있는 반가운 얼굴들과 국수 한 그릇을 나누며 막걸리를 마시는데 노래를 한 곡 하란다. 노래 대신 시 낭송을 한 편 하고 주머니에 든 강의비를 몽땅 내놓고 올 수 밖에 없었다.

강정평화학교 페이스북의 사진

강정평화학교 페이스북의 사진

제주에 다녀온 후 내가 얼굴마담 대표로 있는 하동의 생태환경 시민단체인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의 회의에서 강정 마을 이야기를 나눴다. 마을 입구 거리거리마다 빼곡히 걸려 있는 전국 곳곳에서 보내온 현수막들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도 강정에 작은 힘이 되어 주자. 현수막이라도 보내자. 만장일치로 의견이 채택되었다.

제주에 갈 일이 또 생겼다. 한국 길모임 행사 숙소로 배정받은 곳이 어쩌면 그렇게 맞아떨어지는지. 강정 마을 바로 옆에 있는 호텔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걸어갔다.

강정 마을에는 밤마다 작은 문화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시 또 불려나가 시 낭송을 한 편 했다. 막걸리를 몇 잔 먹은 탓인가. 함께 간 시민단체의 사무국장이 불쑥 마이크를 잡고 말릴 틈도 없이 마을사람들에게 수표를 남발했다.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에서 만든 동네밴드 공연이 곧 열린다. 공연의 오프닝으로 강정 마을 영상물을 상영하고 감동 후불제로 발생한 수익금의 반을 강정 마을 후원금으로 내겠다고 공표해 버린 것이다. 동네밴드 공연이 끝난 후 강정 마을로 보내어질 후원금으로 백만 원이 배정되었고 마을통장으로 입금을 했다.

신부님이, 수녀님이, 세상의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아름답고 의로운 사람들이, 붉은발말똥게의 구럼비로 가는 길을, 할망물의 맑은 샘으로 가는 길을 막은 해군기지 건설 현장의 굳게 닫힌 잿빛 철문 앞에 엎드리고 엎드리며 기도를 하는 강정 마을 풍경을 떠올리면 우울하고 답답해지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싸워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는 한다.

분명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작은 것에서부터 한 가지, 한 가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에서부터, 그래 이렇게 글을 쓰는 일에서부터 한 가지씩 해 보는 것이다. 구럼비의 바닷가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다. 사람들이 마을에 민박집 한 곳을 숙소로 정해 주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오늘 여기에 오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날마다 편안한 잠자리지 않는가.

몇 사람의 만류를 뿌리쳤다. 나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며 지금은 모두 강제 철거되어 들어갈 수 없는 구럼비 텐트촌 농성장으로 향했다. 십여 곳 텐트가 쳐 있는 곳 중에 가장 바다 가까이에 쳐 있는 텐트로 들어갔다.

구럼비의 파도소리가 자장가를 불러준다. 꿈결이었나. 들려오는 노래, 웡이 자랑, 웡이 자랑…… 맑고 파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할망물의 맑은 샘물이 뱃속을 시원하게도 씻겨 주던, 아니 자궁에서 태어나 맨 처음 할머니의 손으로 몸을 씻은 그 까마득한 기억을 일깨운 평화로운 구럼비의 바다, 강정의 밤을 잊지 못한다.

박남준 : 시인. 1984년 『시인』으로 등단. 전주시 예술가상, 천상병문학상 수상. 시집『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적막』, 산문집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등.

필자소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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