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촌 형제의 실현되지 못한 꿈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2
    [오래된 서울] 이여성 이쾌대 형제의 슬픈, 하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
        2013년 04월 30일 09: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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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촌의 형제들이 꾸었던 꿈 1편(관련기사 링크)

    해방정국, 설 자리를 잃다

    이렇게 서촌에서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해방을 준비해 온 두 형제는 해방정국의 격랑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들이 그 동안 견지해 온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이여성은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 하면서 1946년 좌익3당(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남조선노동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진보의 길을 추구하되 당면의 과제는 좌우합작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명분에서였다. 그런 분투의 시기는 길지 못했다. 1947년 여운형이 우익 암살조직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좌우합작 운동은 조타수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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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쾌대가 해방을 전후해 그린 ‘군상’ 시리즈 4점 중의 하나. 그는 이 작품을 1944~48년에 걸쳐 그리면서 ‘해방고지'(181×222.5cm)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의 신고전주의적 화풍과 동양화적인 화풍이 아주 적절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여성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북행 길에 올랐다. 회의가 끝난 뒤 서울로 귀환하려 했지만 미군정이 좌익에 대한 압박을 나날이 더해감에 따라 일단 북한 지역에 마물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평양),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해주) 등에 참석하며 정세를 살폈다. 그 뒤 그가 서울로 돌아온 흔적은 없다.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여성의 이름은 그 뒤 북한 지역에서만 나타났다. 제1기(1948)와 제2기(1957)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김일성종합대학 역사강좌장(1957) 등이 그의 공식 직함이었다. 그는 북한에서도 그의 필생의 지향인 미술사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55년 <조선미술사개요>, 1956년 <조선건축미술의 연구>를 잇달아 펴내 척박한 북한 미술사학계에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1950년대 말을 고비로 이여성의 이름은 북한의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어차피 남로당 계열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6.25전쟁 말기의 숙청은 피해갈 수 있었지만 1956년 이후 연안파를 겨냥했던 소위 8월종파사건의 여진마저 비껴갈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그는 소년 시절의 친구 김약수, 김약산과 마찬가지로 사망 시점이 물음표로 남게 됐다. 통일이 이뤄져야 그의 이력에서 물음표가 사라지면서 그의 활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이쾌대가 걸은 길도 이여성의 길과 그리 다르지 않다. 형제는 확실히 닮은꼴이었다. 해방의 열기 속에 이쾌대도 식민지 미술의 족쇄에서 풀려난 새로운 민족미술을 꿈꾸고 실천했다. 조선미술동맹(‘미맹’)에 가담해 서양화부 위원장으로서 ‘8.15기념 합동미전’ 등에 활발하게 출품했다.

    이 무렵 그의 푯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그러나 그는 1946년 말 북한 미술계를 둘러보고 온 뒤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 회화 자체는 당면적인 과제가 요구하는 조건으로 인하여 미술인이 목표로 하는 예술적인 욕구를 말살까지는 아니나 거진 거세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제작되는 회화가 미술적 작품들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미술동맹에서 이루어진 회화운동이 이렇게 발전해 나가고 영구 상식화되어 버린다면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어 버릴 우려조차 없지 않다.”(이쾌대, <북조선미술계보고>, [신천지] 1947년 2월호.)

    예술 역시 현실적인 과제에 응답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예술적인 욕구를 거세당한 채 당면과제가 요구하는 대로 주문 생산되는 ‘김일성 장군’과 ‘스탈린 대원수’의 초상은 이미 예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미맹’의 앞날을 북한의 현실 속에서 읽고 거기서 탈퇴했다. 생각을 같이 하는 몇몇 화가들과 함께 1947년 8월 조선미술문화협회(‘미문협’)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민족진영으로 갈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식민지 시기에 친일적 작품 활동을 하거나 관변 미술전람회에 출품하던 작가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기 때문이다.

    이쾌대는 1948년 봄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는 한편 작품 활동에도 매진했다. 미 공군이 독도를 폭격해 어민 수십 명이 몰사한 사건에 충격을 받아 그린 것으로 보이는 <군상IV>(1948)를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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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분명히 민족의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의 모티브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생경한 정치적 주장이 없었다. 회화적 완성을 통해 절망과 희망이 한 줄에 꿰이고 민족과 예술이 한 덩어리로 통합되는 경지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에게 6.25전쟁과 인공 시절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1949년에는 남한 당국에 의해 강제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고, 1950년 전쟁 발발 이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인공 치하에서 재건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상황이 바뀌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수복이 임박한 9월 20일경 이쾌대는 어떤 경위인지 알 수 없지만 북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쾌대는 북쪽을 향해 얼마 걷지 않아 국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부산을 거쳐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1953년 정전과 함께 가족이 있는 남한이 아닌 북한을 선택했다. 이때의 경위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북한 미술계는 1950~60년대에 남한 출신의 월북 미술가들에 의해 주도됐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북한 화단의 근황을 전하는 소식에서 이쾌대의 이름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암흑을 이기고 세상으로 나온 빛

    그렇게 30년 이상이 흘렀다. 그 사이에 이쾌대의 이름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혔다. 암흑을 뚫고 그의 존재가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일부 월북작가들에 대해 해금이 이뤄지면서였다.

    이어 그가 남한에 남긴 작품 수십 점이 한꺼번에 발굴됐다. 일부 해상도 낮은 사진으로만 전하던 이쾌대의 작품 거의 전부가 일시에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것이다. 기적이었다. 이는 오로지 부인 유갑봉의 공로였다. 그는 온갖 생활고와 남편을 향한 ‘빨갱이’라는 세상의 손가락질 속에서도 남편의 작품을 처분하거나 흩뜨리지 않고 벽 속에 고이 보관해 오다 끝내 남편의 해금을 못 보고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들로 1991년 이후 ‘월북화가 이쾌대전’이라는 등의 이름을 단 전시회가 전국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열렸다. 이 작품을 실물로 본 후학과 미술애호가들에 의해 그의 존재는 완전히 상기됐고, 그의 이름은 복권됐다. 그의 노력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1999년, 이번에는 북한에서 이쾌대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처음 언급됐다.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저자인 리재현은 이 해에 증보판을 내면서 머리말에 이렇게 언급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이번에도 이 책의 증보판 발행 문제를 료해하시고 (…) 지난 시기 창작공로가 있는 문석오, 리쾌대 등 미술가들도 놓치지 말고 소개할 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이 편람 증보판에는 복권된 ‘리쾌대’의 항목이 정식으로 추가됐고, 그때까지 남한에서는 이여성과 마찬가지로 물음표로 남아 있던 그의 사망연도가 ‘1965년’이라고 명시됐다. 그 뒤 방북하는 미술관계자들이 간혹 이쾌대의 북한 시절 작품들을 직접 보기도 했으며, 몇몇 작품 사진이 전해지기도 했다.

    다시 2010년, 이번엔 남한에서였다. 이쾌대의 1950~53년 행적이 뜻밖에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함께 생활했던 사람의 후손에 의해 밝혀졌다. 2008년 작고한 화가 이주영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거제도 수용소에서 이쾌대로부터 직접 미술지도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며, 그때 이쾌대가 이주영의 데생 연습을 위해 직접 필사해 한 장씩 제작한 [해부학 교본](갱지 48쪽 분량)과 부인 유갑봉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나무조각상, 몇몇 스케치화 등을 제시했다.(<한겨레신문> 2010년 10월 8일자)

    이때 이쾌대가 1950년 왜 북행길에 올랐으며, 1953년 정전 때도 왜 가족들이 있는 남한에 남지 않고 북한행을 선택했는지가 모두 밝혀졌다. 이쾌대가 우연히 거제도의 같은 막사에 배속된 21년 연하의 미술지망생 이주영을 가르치며 그에게 털어놓은 내용이었다.

    이쾌대는 자발적으로 북행을 선택했던 것은 아니다. 인공 치하의 서울에서 그가 그토록 개탄해 마지않던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부역을 하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 직후 북쪽으로 끌려갔는데, 북행길에 국군에게 체포된 뒤에는 풀려난 것이 아니라 의용군으로 오인돼 수용소로 가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남쪽에 고향과 가족이 있는 화가가 ‘인민군 포로’ 신세가 된 것이 한탄스럽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기는 포로석방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용소 안에서 좌우 포로들 간에 대립이 극심할 때 주변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이쾌대를 다른 막사의 반공포로들이 ‘좌익 제거대상’으로 찍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포로 심사에서 남쪽을 선택할 경우, 풀려나기도 전에 이들의 손에 죽을 것을 우려해 북한행을 선택하며 이주영에게 ‘생존을 위해 일단 북으로 피신해야 할 것 같다. 내 작품을 잘 보관해 달라’며 작품들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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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쾌대의 자화상 가운데 남한에 현존하는 마지막 작품 ‘푸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8~49년). 형형한 그의 눈과 붓을 꽉 잡은 그의 손에서 그의 의지가 읽힌다.

    어느 대목에서도 그의 의지대로 현실이 흘러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현실에는 그가 기댈 최소한의 공간도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이제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이쾌대의 작품을 도록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하다.

    그렇다면 이쾌대가 일제 말기에 형 이여성과 함께 현실의 비좁은 틈바구니 속에서 ‘없는 길’을 새로이 개척해 보려고 시도했던 꿈도 재생되는 것일까?

    조국의 산천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혼을 우리 방식으로 그려내고자 했던 이들 형제의 꿈이 실현되는 것은 언제일까?

    이쾌대, 그의 길은 현실의 막다른 골목에서 끊어지고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 활동하던 대로 그 길로 죽 갔다고 해서 그의 길이 이어졌으리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는 정직했으며, 그 정직함에 따라 ‘없는 길’을 만들어 갔다는 점이다. 그 길이 막힌 곳에서 그는 틀림없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것은 포기도, 부하뇌동도 아니고, 절망은 더욱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길이 없지는 않았으되 물리적으로 더 갈 수 없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보았고, 그렇게 하다하다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이쾌대의 길은 실패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이쾌대가 걷지 않았던 기성의 좌우 두 길은 성공했던가? 어떤 미술사가도 여기서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해방 이후 각각 반쪽짜리 남북의 미술사가 어떠했는지는 더 얘기할 필요도 없다.

    어느 쪽도 성공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없는 마당에 그에게 실패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할 뿐더러 온당하지도 않다. 오히려 불투명한 미래를 담보로 자기 길을 열어가려 한 의기를 평가해주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가시덤불을 헤치고 스스로 만들어 걷던 길은 앞으로 남북 미술사의 빈틈을 메워주는 소극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그가 그쳤던 곳에서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 할 적극적 과제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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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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