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 없는 사회에는 희망버스가 필요
    [기고]희망버스돌려차기-"난 우울하지만 희망을 꿈꾼다"
        2012년 06월 05일 11:22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한국은 우울하다.

    세상이 온통 못살겠다고 난리법석이다. 나이 사십이 다되도록 정규직 인생을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채 해고된 나는 차치하고서라도 멀쩡히 직장에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 또한 한숨으로 가득 차 있다.

    꺽일지 모르는 물가에 한숨 쉬고, 언제 짤릴 지 모르는 직장생활에 맘 조리고 산지 오래일 터이다. 주변의 친인들 직장에서 짤렸다는 사람은 있어도 취직했다는 사람은 없고, 돈 없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은 있어도 빌려주겠다는 사람은 없으니, 돈의 노예가 되지는 말자고 했으나 그딴 도덕 명언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먹고 살만한 돈도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내가 1998년 2월에 제대를 하고 경제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래 쭉 이 지경이었다. 경제 생활을 포함한 사회생활을 통한 “자아실현” 단어는 학창시절 시험용 암기단어로 전락한지 오래이고, 그저 그런 체념과 먹고살기 바쁜 일상에 “희망”이라는 말이 들어올 틈은 너무 비좁았다.

    원래부터 비관주의자도 아닌 내가 희망이라는 말을 왜 잊고 살았을까? 가끔 친구나 선배를 만나면 왜 그렇게 우울할까? 죄다 죽는 소리 일색이니 나도 우울하다. 만나서 반가운 건 한순간이요, 나누면 기쁜 것이 아니라 점점 우울하니 소주나 주구장창 술만 들이킬 뿐이다. 이럴 때 쓰는 단어로 적절한 것은 “젠장”이다.

     얼마나 희망이 없었으면 희망버스를 타냐?

    2011년은 희망버스의 신드롬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특별한 이유랄 것도 없다.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선 수십 수백일을 고공농성하는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이 안쓰럽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정리해고가 친구 선배들의 한숨소리로 들렸을 뿐이다. 저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아마도 주류업계만 대박치고 한국사회는 쫄딱 망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논리도 있었다.

    사실 세상에 얼마나 희망이 없으면 사업기획을 희망버스라고 칭했겠나.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돈, 시간 들여가면서 왜 참여했겠나? 희망이 없어서 아닌가. 정리해고에, 비정규직에, 너무나 고단한 삶 때문에 죽어버린 희망이라는 단어를 살려보려고 한 것이 아닌가?

    경찰은 절망의 덩어리

    조촐하게 시작했던 희망버스가 두 번째부터는 말 그대로 대박을 쳤다. 나는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을 통해 희망을 보았고, 밤새 떠들고 즐겁게 놀면서도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과 사측의 대응은 한껏 부풀어온 희망을 꺽기 위해 정말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마치 “너희 따위는 희망을 가져서는 안된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서도 안된다. 절망과 체념속에서 그따위로 살다가 죽는게 당연하다”라는 느낌이었다.

    가는 곳곳마다 차벽을 세워놓고 따갑디 따가운 화상까지 입는 최루액을 뿌려댔다. 그들에게 공동선이란 권력을 쥐고 있는 1%를 위한 것이고, 시민공동체 또한 그들만의 1%가 향유할 수 있는 것이길 바랬을 것이다.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뒷골목 양아치수준의 경찰들이 정당한 항의를 하는 시민들을 연행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경찰이 되었을까?라는 자문이 우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정리해고/비정규직이 문제는 문제인데…도대체 어쩔건데?

     진보를 자처하던, 보수를 자처하던 정치판이 하던 이야기다. 아마도 이런거 이야기 하는 척이라도 해야 표를 얻을수 있겠지. 그런데 대책은 뭐냐?는 거다. 이번 총선에서도 “보편적 복지해야 한다”, “비정규직이라 문제”라고 잘도 읇조리더만, 정작 내용은 없어보인다.

    새누리당으로 변신한 한나라당은 포장은 이쁘게 했는데 내용은 오히려 더 후퇴했다. 정리해고가, 비정규직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희망버스는 왜 때려잡고 줄줄이 소환에 말도 안되는 죄목으로 벌금을 때리는 건데?

    비정규직문제에 대법판결이 나와도 입에 지퍼를 달고 살더니 비정규직들이 절박함을 호소하면 왜 그렇게 못살게 구는데? 창피해서 그런거야? 도데체 개념이란게 머릿속에 탑재되어있는지 의심스럽다. 한마디로 사기친거다.

    이런 사기에 대해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원리 정치인들은 사치기는게 당연하다는 듯이. 모르겠다. 박근혜의 리더쉽이던, 국민이 사기를 당했던, 무엇이던 간에 새누리당은 국회의원 과반은 넘었다. 그러면 좋다. 비정규직/ 정리해고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건들지나 마라. 그리고 양아치같은 경찰들 모가지를 치던지, 인성교육을 받게 하던지 조치 좀 취했으면 한다. 쌍용차 정리해고로 인한 22번째 희생자가 나와 대한문에 분양소를 설치했더니 돌아오는 것은 야만스런 폭력과 이에 항의하는 시민에 대한 조롱뿐이었다. 그런 경찰들에게 세금 나가는게 너무 아깝단 말야.

    정의가 뭐지?

     나 또한 희망버스건으로 경찰서에서 소환이 됐고, 현재는 재판중이다. 아마도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처벌하려는 것 같은데. 도데체 내가 어떤 공공의 이익을 반했지? 도로가 막히고 주변사람들이 조금 불편한건 사실이겠지. 그런데 원래 민주주의는 조금 시끄러운게 아닌가? 그 과정에서 가장 합리적인 것을 도출하는 것이 민주주의 아냐?.

    이게 죄라면 전국민이 우울증을 앓고 자살하고, 자신의 권리가 조금도 관철되지 않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따위것을 만든 집단은? 사람은? 왜 처벌하지 않는거야.

    불법파견을 통해 십여년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세금을 포탈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일하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어가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마치 “이익은 나에게만, 책임은 전부에게”라는 염치없는 좌우명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법과 제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거냐고? 정부가 국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희망버스가 만들어 진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탄 것 아니냐. 생각해 보자. 누가 공공선을 반하고 있는지.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고.

     난 아직도 우울하지만 희망을 꿈꾼다.

     나만 우울한게 아니라 아직도 내 주변은 우울모드다. 내가 정신병동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상식을 가졌을 뿐인데 상식의 눈으로 본 세상은 너무나 우울하기만 한다.

    오늘도 누군가는 이 모든 사태가 주류업계의 음모론이라고 농담을 던지면서 술이나 먹자고 하지만, 근데 이게 술로 잊혀질 문제인가? 나는 제 2의 희망버스를 원한다. 그것이 버스이건 비행기이건, 화물트럭이건 상관없다. 다만 우울증 걸린 대한민국에 다시 한번 희망의 메시지를 통해 정부와 자본과 사법부의 견고한 카르텔을 깼으면 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별거 아닌 세상이다. 건물이 높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자가용을 안끌어도 된다. 매일 고기를 안먹어도 된다. 다만 내가 살아가는 환경과 인간이 상식선에서 호흡하고 공공의 선을 위해 토론하고 공존하는 것 뿐이다. 이제 사람들이 각성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권리에 대해 더 이상 포기하지 않는다. 권리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고 저항해서 획득하는 것이라고! 이것이 내가 보는 희망이다.

    616 희망연대의날

    필자소개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