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인’의 성은 없다
    [빵과 장미] 자기 안에는 수많은 '소수자성' 존재
        2013년 04월 29일 10: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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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글을 쓰는 4월 26일, 프랑스에서는 한 ‘커밍아웃’이 최초로 인터넷 상에서 진행되고 있다. 각자의 블로그, 커뮤니티 등을 통해 단체로 커밍아웃을 하는 날이다. 커밍아웃은 흔히 동성애자나 성전환자의 공개적 고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은 동성애자도 성전환자도 아니다. 누굴까.

    타인과 섹스를 하고 싶은 욕구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중에는 자위를 하는 사람도 있고 그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이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애인의 손길을 좋아하지만 딱히 성기 결합의 섹스를 하고 싶지는 않다. 상대가 원할 때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즐거워서 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인 금욕의 결과도 아니다. 바로 무성애(asexuality)자다.

    흔히 성적 지향을 말할 때 어쨌든 나 외의 타인을 성적으로 욕망한다는 전제를 쉽게 의심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이성이냐 동성이냐에 주로 쏠려 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의 성욕은 지극히 기본적인 욕구이며 타인과의 성관계만이 정상적 성생활일까. 오늘날 성소수자들이 하나 둘 ‘벽장 속’에서 나와 “나 여기 있다”고 말한다. 성소수자 담론이 점점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이 무성애자의 존재는 여전히 ‘벽장 속’에 머물러 있다. 그 ‘벽장 속’에 아직 얼마나 많은 이들이 웅크리고 있는지 파악조차 어렵다. 이제 무성애자들은 또 다른 정상이 있음을 점점 알리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무성애자들은 조금씩 커밍아웃을 했다. 그리고 조직을 만들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1년에 조직된 무성애자 협회인 AVEN(The Asexual Visibility & Education Network)은 현재 3만 명 이상의 회원이 있다.(프랑스에는 3500명의 회원이 있다) 과연 이 무성애자들은 전체 인구의 얼마를 차지할까.

    aven

    AVEN회원들의 사진(사진 출처와 관련 기사 링크)

    캐나다 심리학자 앤소니 보개트 (Anthony Bogaert, <무성애의 이해 Understanding Asexuality>의 저자) 에 따르면 무성애자는 전 세계 인구의 1%를 차지한다고 한다. 혹은 그 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세계 인구의 1%라면 7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무성애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5천만의 남한 인구를 훨씬 웃도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성적 욕망을 갖지 않는다는 얘기다.

    *‘없음’의 커밍아웃

    무성애자들은 성욕이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 성욕이 있다 하더라도 성기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념적 섹스의 욕망이 없다. 성욕은 반드시 섹스로 해소되는 욕구가 아니다. 그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성기결합의 욕망이 없는 존재도 ‘있다’는 인식이 요구된다.

    ‘1’부터 숫자가 아니라 ‘0’도 숫자이듯, ‘없음’도 곧 ‘있음’이다. 또한 타인과의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이 없음을 일컫는 말이지 성에 대한 무관심은 아니다. 사랑에 대한 감정이 없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런 면에서 ‘무성애’라는 말은 정확한 용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대체할 언어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성적 지향은 이성애자인가, 동성애자인가, 양성애자인가. 이 범주를 뛰어넘은 질문이 필요하다. ‘양성’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 쓰이고 있는 ‘양성평등’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성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라 성욕 그 자체에 대한 다른 사고가 필요하다. 성욕이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관념이 다른 많은 담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최근 여론조사 기관 Ipsos에서 섹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생각을 조사한 결과 “인생에서 섹스보다 더 강력한 기쁨은 없다”는 말에 70%가 동의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답변이다. 성욕이 인간에게 절대적인 기본 욕구라는 관념을 해체해야 한다.

    성적 욕망과 자극이 모든 인간에게 본능이고 필수처럼 여겨지는 관념 속에서 무성애의 삶은 뭔가 문제가 있고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때로 무성애자들은 ‘정상’이 될 수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필립 브레노Philippe Brenot에 의하면 “만약 성생활이 없는 삶에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렇다. 문제 없다. 나아가 ‘정상인의 성’이란 없다. 정상적인 성이 있다면 비정상적 성도 있게 된다.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눌 수 없다. 그저 각자의 다른 성이 있을 뿐이다.

    개개인은 모두 각자의 소수성을 가지고 있다. ‘소수자’라는 지칭도 때로는 그리 편하지 않다. 어떤 한 가지 기준을 두고 일부를 ‘소수자’라고 하지만 성, 종교, 인종, 계급, 세대 등 세상의 위계를 만들어내는 많은 기준들을 교차시키면 소수자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각자 자신의 소수성을 발견하지 못한 채 ‘소수자 너희들’을 따로 분리시키곤 한다. 그 분리가 차별과 억압으로 향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차별 금지법에 반대하는 열성적 움직임이 안타까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자기 안의 소수성을 모르기에 타인의 소수성을 용납하지 못한다. 결국은 소수자들이 다수 모인 사회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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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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