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먹함과 친근함 사이 어딘가에서
    [노동자의 구술생애사-3] 내 할머니와 다르지 않는 조합원의 일생
        2013년 04월 29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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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합원님, 인터뷰 한 번만 더 해주시겠어요? 어린 시절 얘기랑 연애 얘기 같은 거 듣고 싶어요! 제가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조금만 시간 내주시면 안 될까요?”

    애교세포는 다 말살시키고 태어난 게 분명한 내가 필사의 애교작전을 펼쳤다. 학기를 마치고 해가 바뀐 뒤 처음 있었던 한글교실에서, 수업 전후로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애교를 총동원했다.

    조합원은 곧 방학 대청소를 시작하느라 바빠진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나는 방학이라 남는 게 시간이니 대청소 시작 전에 언제든 만나겠다고 했다. 주말에도 확인전화까지 드리고 나서 어렵사리 제1공학관 4층 강의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나 보릿고개를 넘던 그때의 가난과 지금의 삶

    (필자) 오늘은 어린 시절 얘기를 좀 했으면 해서요. 제가 주로 자녀관계, 한글교실 위주로 여쭈었잖아요. 그런데 저는 조합원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정말 궁금해요.

    (조합원) 어렸을 때 시골에서 나서 그냥… 농사짓고… 밭이 많으니까 밭일 많이 했지 뭐. 고구마도 캐고, 참깨도 많이 심고, 콩도 심고.

    (필자) 참깨도 심는 건가요? 보리처럼요?

    (조합원) 그럼. 씨 뿌려 가지고. 보리도, 그 뿌리 베어내고… 그건 나락이라고 그래. 소로 쟁기로 갈아 가지고 고랑을 두 대기로 만들어. 보리씨를 뿌려. 그러면 씨가 거기서 나오잖아. 한 20일 있으면 그 씨가 나올걸? 올 겨울같이 춥고 그러잖아. 그러면 봄 되면 보리를 밟아준다고… 뿌랭기(*뿌리를 일컫는 전라도 사투리)가 땅에 묻힐 거 아니야. 그런 것도 있었고. 시골에 사니까 땔나무가 부족하니까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필자) 조합원님도 몸집 작으신데 나무 하셨어요?

    (조합원) 그럼. 산에 가서 나무도 베고, 소나무 가루 있잖아.

    (필자) 송진이요?

    (조합원) 송진은 껌 만들려고 하는 거고. 사실 껌도 씹었지. 그 가리나무라고 있어. 소나무에서 떨어지는 거. 갈퀴로 긁어서 모아가지고 그거 가지고 짚으로 이고, 이고… 큰 소나무 가지 베고 하면 걸렸다고 옛날에는.그러니까 죽은 나무만 베어야 하는데, 사람이 욕심에 이파리 떼어 오고 이러면, 가끔 가다가 조사 나오고 그랬어. 걸리면 벌금 물고 그랬단 말이야. 또 막걸리도 담어서 몰래 숨겨놓고 먹고. 옛날에 조사 나온 적 있어. 그래도 담어서 먹어. 숨겨놓고 먹어.

    (필자) 막걸리 좋아하세요?

    (조합원) 시골에 막걸리 맛있지. 막걸리는 적당히만 먹으면 사람을 해치지 않잖어. 적당히만 먹으면 막걸리는 좋아. 근데 뭐든지 그래, 뭐든지 석 잔까지는 딱 좋아, 몸에. 도가 넘으면 해가 되지만. 지금 막걸리 슬슬 얘기하면서 먹으면, 어떤 때는 기분에 따라서는 석 잔까지도. 이런 컵에도. 사발에… 세 개까지는 먹어. 시골에 뭐, 그런 거지 뭐.

    고구마

    콩도 심고, 고구마도, 봄 되며 일찌감치 흙으로 두 대기를 만들어. 파서 고구마를 심어 놔. 한 20일이나 한 달 정도 되면 거기서 순이 오른다고, 응? 순을 잘라서 밭으로 옮겨 심어. 비 부슬부슬 올 때 손으로 파가지고 고구마 순을 잘라다가 심으면, 그것도 20일이나 한 달 정도 돼서 뿌랭기가 내려. 거기서 슬슬 열매가 맺는다고. 뿌랭기에서 열매가 맺는 걸 보면, 그거 시원하지? 5월 정도에 심는다고. 8월, 추석 무렵에 캐서 먹어. 마른 것은

    지금은 또 하우스로 해서 사철 고구마가 나오더라고. 옛날에는 그때 심어놓으면 한 서너 달, 넉 달까지 밭에다 놔. 그럼 넝쿨이 이렇게 막 퍼지잖아. 그 밑에서 고구마 열매가 맺는 거야.

    (필자) 고구마 줄기도 맛있잖아요

    (조합원) 응, 응, 맛있어. 무쳐서도 먹고. 고구마 줄기를 밑에다 깔고, 위에 생선을 놓고 지져 먹어도 맛있어.

    조합원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어린 시절과 농사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만 컸기에 농사일이라곤 일절 아는 바가 없었기에 매우 흥미로웠다.

    두 손을 휘두르며 묘사에 열중하는 조합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자녀 관계, 한글 교실, 노동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난 두 번의 만남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었다. 현재의 노동 경험을 물을 때면 짧게 답하거나 두루뭉술하게 피해 가려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일까?

    타 작업장의 청소노동자들의 구술생애사를 분석했던 사회학자 송용한은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구술을 거부당한 경험이 상당 부분 청소노동자들의 자기부정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삶에 모범 답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삶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송용한은 자신의 현재 삶을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삶의 이야기”로 여기는 자기부정이 인터뷰를 가로막았다고 분석했다.

    한편 제주 4.3사건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인터뷰를 연구한 여성학자 김은실의 분석도 흥미롭다. 그녀는 이들의 삶에 관한 구술이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 이야기들로 가득 찬 반면, 이들이 ‘빨갱이’로 몰릴 수 있을 경험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조합 활동과 농성에 참여하면서도 노동조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는 않았던 조합원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나 사회적 경험들을 쉽게 풀어놓기에는 어려움을 느꼈을, 어떤 지점이 있을 거란 추측을 해본다.

    배움에 대한 미련이 남은 맏딸

    (필자) 근데 조합원님, 저도 작잖아요, 조합원님도 몸이 작으신데 농사일 안 힘드셨어요?

    (조합원) 근데 시키니까 하는 거지.

    (필자) 농땡이 피셨죠?

    (조합원) 아-니, 혼나-. 하루 종일 일 하면 저녁밥 먹으면 골아 떨어져서 자면, 시골에는 호롱불 밑에서….

    (필자) 다른 형제분도 계셨어요?

    (조합원) 그렇지. 여동생 셋에 오빠 위에 둘 있고, 남동생. 7남매, 하하. 딸로는 내가 맏딸이고, 오빠는 큰 오빠, 작은 오빠 있고. 맏딸이라 많이 했지. 그 시절에는 가난하게 좀 사니까, 배우는 애들은 학교 보내고 했는데, 위에 쪼르륵 배우질 못했지. 밑에 애들은 그래도….오빠 둘 하고 나하고는 배우질 못했지. 그때만 해도 힘들었으니까.

    (필자) 저희 할머니도 얘기 들어보면 맏딸이셔서 힘드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배우는 거 싫어하셔서, 뭐 여자가 그런 거 배우냐 이러셨다고

    (조합원) 그래, 시골에서는 그래. 옛날에 남자들은 서당이라고 있잖아. 오빠 둘은 가서 배우고, 나는 전혀 못 배우고.

    한글교실을 하면서, 또 교육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마다 대부분의 학강에게서 교육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배움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컸기에, 시작교실을 찾았고 몇 년 째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필자) 그럼 고향 가끔씩 가시나요?

    (조합원) 거의 안 가다시피 하지. 거의 다 서울에서 사니까. 외갓집 같은 데나 우리 사춘 큰집 같은 데는 시골에 사시지만은 근데 이제 친정은 안 가져. 지금은 안 그러지. 나는 옛날 사상이 좀 박혔다고 봐야지. 지금은 안 그래. 요즘은 결혼하면 서로가 니네 집 한 번 가면, 우리집 한 번 가야지, 약속을 한다매? 똑같게. 너희 집 오만 원 주면 우리 집도 오 만원 줘야 된다고. 그렇게 하니까 좋아 보이던데 뭐.

    (필자) 그런 건 좋은 것 같아요. 주변에 결혼한 거 보면 집안에서는 여자가 더 강해요. 주도권 잡고 용돈 주고.

    (조합원) 그래, 옛날에는 남자들이 하늘이었었잖아. 지금은 여자가 하늘이야. 많이 바뀌었지. 지금은 남자들이 불쌍한 시대야. 그 월급봉투 만지지도 못하고…. 꽁쳐서 쓴다고 하면 여자가 또 귀신같이 알아요.

    (필자) 맞아요. 저희 아빠가 비상금 숨겨놓으면 엄마가 다 알아요. 은근슬쩍 물어보고

    (조합원) 그래, 앞으로 남자들이 갈수록 불쌍해져.

    일 년간의 직장 생활, 일 년간의 연애, 일 년만의 출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보니 상경하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조합원이 10대에 상경했고,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유년과 청소년기 이후의 삶이 궁금했다. 그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학교 청소노동에 연이 닿게 된 연유 역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자) 그러면 서울에는 왜 올라오신 거예요? 몇 살 때 올라오셨나요?

    (조합원) 열아홉 살 때.

    (필자) 저번에는 결혼 때문에 올라오셨다고 한 것 같은데, 그때 결혼하신 거예요?

    (조합원) 아니, 서울에서 직장 생활 좀 하다가 연애 한 일 년 정도 하고, 결혼을 했지, 스물일곱에. 애를 좀 늦게 놨어. 지금 큰 애가 서른여섯이니까, 작은 애가 서른하나고. 학교 대학을 맞춰주려고 하는데, 지네들이 싫다고 해서 고등학교까지만. 부모가 못 배웠으니까 애들이 공부를 좀 해서 대학을 마쳤으면 했는데, 지들이 싫다는데 어떡해. 그래서 못 보냈다니까, 대학을. 그리고 직장생활 한 오년 해가지고 바로 결혼하고….

    (필자) 그럼 남편 분이랑 만나시게 된 얘기 좀 해주세요.

    (조합원) 아이구, 별로 한 것도 없어. 왜 그렇냐면, 공장 생활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씩 산에 가고 뭐.

    (필자) 아니 그런 연애 얘기 듣고 싶은데요? 일단 어떻게 만나셨나요?

    (조합원) 그냥 아는 언니가 소개를 시켜줬지. 그래서 일 년 정도 데이트 하다가, 명절 때 되면 어른들한테 인사도 가고,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우리 딸 스물여덟에 낳고…

    (필자) 그럼 데이트는 주로 어디서 하셨어요?

    (조합원) 남산에도 가고, 우이동 같은데. 그 근방에서 살았어.

    (필자) 저희도 엠티가고 놀러갈 때 그쪽으로 가는데, 거기는 또 물이 좋잖아요.

    (조합원) 좋지, 물이 좋아. 예전에는 수돗물이 덜 나오고 그래서, 거기 가지고 가서 빨래도 하고 그랬어. 때가 잘 진다니까. 손빨래 많이 하지. 때가 잘 가. 난 그때만 해도 아가씨니까, 집에 수돗물이 안 나오면, 한 번은 아는 언니가, 야 저기 가서 빨래 싸가지고 해오자, 그래. 진짜 빨래 딱 널어놓고, 햇볕 좋을 때 가야 돼, 그럼 두어 시간이면 말라. 딱 말려가지고.

    (필자) 팬티도요?

    (조합원) 아니, 속옷은 안 하고. 아니 큰일 나! 놀러들 많이 오잖아. 이불 속창 같은 거 뜯어가지고, 뜯어서 빨아서 말려서 싸서 넣어 가지고. 그런 적 한두 번 있었어.

    (필자) 그럼 처음부터 이쪽(아현동)에 사신 게 아니라 거기서도(우이동) 사신 거네요?

    (조합원) 응, 거기서도 좀 살고, 대곡문 있는 쪽 화양리에서도 살고, 오빠들이랑.

    (필자) 아 그럼 서울에 오셨을 때 오빠들하고 같이 사셨군요.

    (조합원) 아니, 한 일 년 동안 떨어져 있다가 나중에 동생이랑 다 같이 살았지. 엄마가 먹을 거 했다가 시골에서 갖다 주고. 다음에 한 이 년 정도 사시다가 돌아가셨어.

    (필자) 음…. 연애 하실 때 기억나시는 거 있으세요? 뽀뽀 같은 거나, 어디 놀라간 거요.

    (조합원) 물가에 같은 데 뭐… 옛날에는 부끄러운 걸 많이 타가지고. 결혼 할라 할 때쯤 돼서 뽀뽀 한 번 했지. 좀 으슥한 데서.

    (필자) 우와 하하

    (조합원) 왜!! (필자 팔뚝을 주먹으로 때리며) 왜 웃어!?

    (필자) 으슥한 데 어디요?

    (조합원) 쪼끔 안 보는데, 어른들 안 보는 데… 그런 데….

    (필자) 집 주변이요?

    (조합원) 아니, 남산 저기.

    (필자) 아직도 기억하시네요?

    (조합원) 남산 동물 키우는 데 저쪽으로 돌아가면 있어. 저녁 때찜 그랬을 거야.

    (필자) 남산 좋죠. 요즘도 남산 가면 연인들이 그렇게 많아요. 저는 지금 혼자거든요. 저는 연애 안 한지 좀 오래됐어요.

    (조합원) 근데 요즘엔 한 사람하고 오래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하고 해야… 우리 아들한테 배웠어. 여자를 한 두 명이 정도 바꿔. 누굴 닮아서 그러냐 그러니까. 엄마, 이게 다 사겨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저기 해야 된대. 그럼 헤어질 때 어떻게 헤어지냐, 그러니까. 뭐, 그냥 안 맞는 건 같다, 이러면서 좋게 대화로 한다며?

    (필자) 네, 요즘엔 워낙 자주 만나고 헤어져서요.

    (조합원) 안 맞는 것 같다면서 헤어진다는데? 찝찝하게 서로가 그렇게 괴롭게 안 한다고…. 그리고 헤어지고 나면 두 번도 안 돌아본다매?

    (필자) 좀 그런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조합원이 ‘젊은이들’에 대해 갖는 인상은 많은 부분 자녀들과의 대화에서, 혹은 자녀들을 지켜보면서 얻은 것인 듯했다. 자녀들에 관해 말할 때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듯 보였지만, 그에 반해 ‘젊은 세대’들의 문화나 사고에 대해서는 필자에게 많이 물어보았다.

    한글교실

    연세대 노동자와 학생들의 시작교실(한글교실)의 한 장면

    첫사랑과 포장마차 영화관

    (필자) 남편 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조합원) 뭐, 거의 이제 지워졌어.

    (필자) 돌아가신 지 오래 됐어요?

    (조합원) 한 15년 정도. 한 5년 동안에는 머릿속에 하도 안 잊히고 지워지지가 않더라고. 어느 때서부터 슬슬 생각도 안 나고, 잊어지는 거야.

    (필자) 저희 할머니 같은 경우도, 저희 할아버지가 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비슷한 거 같아요. 근데 할머니도 오랫동안 홀어머니셨으니까 잘 사시는데 가끔 제사 지낼 때 저희 나가라고 그러고 할아버지한테 얘기하시면서 가끔씩 우세요. 할아버지가 되게 엄하셨다고 하는데, 그래도 할머니는 그리워하세요.

    (조합원) 그럼, 함께 산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

    (필자) 조합원님, 그러면 남편분 전에 연애하신 적 있으세요?

    (조합원) 한 번 있었지, 시골에.

    (필자) 우와 첫사랑인가요?

    (조합원) 나는 아니고, 걔만. 근데 같은 동네고, 왜 그런 거 있잖애. 창피스럽고. 걔는 나보다 두 살 우엔데, 우리 오빠보다 한 살인가 두 살인가 어려. 가끔가다 살면서도, (오빠들이) 걔랑 결혼했으면 응? 말년에 저기 했을 거 아니냐, 가끔가다, 이러지. 이름을 대면서. 야, 걔가 널 혼자 좋아했더라. 너는 왜 그걸 나중에 알았냐? 근데 나는 전혀 걔랑은 결혼할 마음은 없었어.

    (필자) 그분은 맛있는 거 갖다 주고 그러셨어요?

    (조합원) 그러엄. 꼭 내 옆에 앉아 있고. 근데 나는 뭐 전혀 그런 맘이 없으니까. 또 시골에는 영화 한 편씩 들어온다고… 심야영화처럼, 밤에 늦게 하는 거. 자갈밭에다가 포장 쳐놓고 돈 받고 해. 시골마다 다니면서 그런 거 있었어. 노래도 하고. 그런 거 한번 씩 들어온다고. 그러면 나를 감히 건들지는 못하지. 왜 한 번씩 처녀총각들 몰려다니면서 극성맞은 머시매들은 한 번씩 막 건들라고 그러잖아. 그러면 나는 또 우리 오빠 이름 딱 들이대면, 동생이지 이러고, 손 안 대는 게 있었지. 도움이 많이 됐었지. 누구 동생 하면 다 안다고.

    (필자) 아, 오빠가 골목대장이셨어요?

    (조합원) 아니, 골목대장은 아닌데, 잘생기고 키도 크고, 한 번 주먹으로 누가 건들지를 못해. 왜 그러느냐면은, 경우에 저기 하는 건 못 봐, 우리 오빠가. 자기도 여동생들 있고 그러니까 누가 건든대더라, 이런 게 시골에는 있었잖아. 오빠들이랑 같이 가면 괜찮은데, 여자들끼리 가면 좀 그렇잖아. 무섭지. 한 20리 정도, 초저녁에 걸어가면. 차가 어딨어. 걸어가지.

    (필자) 자전거는 있었어요?

    (조합원) 아-니. 자전거 감히 어디.

    (필자) 그럼 다 걸어 다니셨어요?

    (조합원) 그렇지. 읍내도 걸어 다니고….

    (필자) 그럼 무거운 짐 있을 때는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조합원) 가끔가다 한 번씩 버스가 와. 하루에 서너 번. 시간 맞춰서 가는 거지. 고구마도 캐고 팔러 가고.

    (필자) 고구마를 밭에서 하시고, 팔러가고 이러신 거예요?

    (조합원) 응, 캐가지고 씻어서 담아서 팔러 나가고. 5일장. 일주일에 한 번씩 장선다고 그래.

    시간은 부족했지만 상경 이후 서울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초점을 조금 옮겨 갔다. 조합원은 시다부터 청소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산업화에 한창이던 70~80년대 한국의 여러 변곡점들을 다 거쳐 왔기 때문이다.

    (조합원) 열두시 넘었어?

    (필자) 아뇨, 한 오 분 남았어요. 그럼,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처음 서울 오셨을 때 공장에서 일했다고 하셨는데, 어디서 일하셨어요?

    (조합원) 저기 뚝섬인가, 거기가 공장들이 많았어. 옛날에 방직공장이라고 대롱에다가 실 감는 거.

    (필자) 그게 시다에요?

    (조합원) 그렇지, 시다지. 실이 떨어지면 또 감어가지고 하면 딱 이어진다고. 쭉 대롱에 큰 거를 꽂아. 자그마한 실도 감어야 할 거 아니야. 그걸 다 감어서 하면 옷 짜는 데로 가지고 가서 하는 거야.

    (필자) 아, 그리고 그러다가 가정집 일도 했다고 하셨잖아요?

    (조합원) 응, 공장을 그만두고 가정집으로 들어갔지. 그러다가 한참 하다가, 여기 학교 온 거지.

    (필자) 결혼하고 일 계속하신 거예요?

    (조합원) 결혼하고 애 몇 년 동안 집에서 키웠고, 애들 남의 손에 안 맡기려고, 내가 내 손으로 직접 키우고, 어느 정도 키우고. 왜, 애기 돌봐주면서 동네 부부 몇 시간짜리 일하는 거 있어. 부부가 공무원인데, 애기를 나한테 맡겨놓고 한 달에 한 번씩 온 거야. 그렇게 생활 꾸려나가고 그랬지….

    인터뷰를 마치며: 한 뼘 정도 가까워진 듯한 조합원

    세 번째 만남은 유감스럽게도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마지막 만남 후에도 몇 차례 전화를 드리고 한글교실 때 부탁드리기도 했지만 더 이상 할 얘기도, 만날 시간도 없다는 조합원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무작정 부탁할 수는 없었다. 유난스럽게 추운 겨울이었기에 퇴근 후 시간을 빼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술생애 작업에 참여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빨리 시작했던 만큼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기억을 더듬으며 조합원 일생의 조각을 맞출 때마다 듣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궁금함은 더해갔고, 공백은 유난히 커보였다.

    특히 시다, 가정부, 청소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음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처음 두 번의 만남 때 보다 풍성하게 질문들을 준비해갔다면 그 공백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감출 수 없었다.

    성과를 내고자 시작한 작업이 아니었기에 ‘성공’ 혹은 ‘실패’라는 말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까닭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나 스스로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합원은 한글교실에서도 가장 과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나로서는 그녀가 유독 과묵했기에 더 사연이 많은 것이 아닐까 지레 짐작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습관적으로 돌이켜보고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라포를 형성했어야, 그리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갈지 미리 고민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이 작업을 통해 느낀 바는 적지 않았다. 구술생애사 작업에는 인터뷰어들이 주기적으로 모여서 그간의 인터뷰 현황 등을 공유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데, 청소노동을 시작하게 된 사정이 각기 달랐다. 생계를 잇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외로움과 적적함을 덜기 위해,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경제적 여유와 무관하게 노동을 시작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 사연들을 들으며,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학교 여성 청소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 속 한편으로 나는 이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이들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듯하다.

    간사는 ‘노학연대’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권했다. 하지만 조합원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한 나는 ‘노학’ 연대라는 수식어를 언급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은 좁아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강의실에서, 화장실에서, 도서관에서, 백양로에서 스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필터링 해서 시야에서 배제하곤 했던 청소노동자.

    그녀의 일생 이야기는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듣던 이야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집에서 맞벌이 부부의 아이를 돌보았다는 조합원이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를 떠올렸고, 그녀가 배움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할 때면 대학을 세 번이나 다닌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와 할머니를 상기시키는 조합원과 한 뼘 정도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졸업을 앞둔 시기에, 한글교실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술생애를 하게 된 것이 조금은 아쉽다.

    그럼에도 재미있고 풍성한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아 온 친구들과 함께 고민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 정말 감사하고 뜻 깊은 일이었다.

    점점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도, 남의 이야기를 애써 경청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도 소홀해지 쉬운 시기에 듣는 즐거움을 참 많이 얻었던 것 같다.

    필자소개
    정치외교를 공부하는 대학생 / 대학 입학 후 학내 언론 에서 활동하다가, 졸업을 코앞에 두고 학교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시작교실'의 한글교실에 합류. 숙독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강연 참관을 계기로 구술생애사 작업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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