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카소의 '게르니카'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와 제주 4.3
    [산하의 오역]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장날에....
        2013년 04월 26일 05: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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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에는 바스크인들이라는 좀 특이한 소수 민족이 있다. 유럽 대륙 전체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지만 바스크 어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에서 온 민족인지 그 초기 역사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로마 제국이 스페인을 지배하던 시절에도,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에 초승달 깃발을 꽂았을 때에도 독립적 지위를 유지했던 깐깐한 사람들이었다.

    중세 기사의 무용담으로 유명한 <롤랑의 노래>에서는 기사 롤랑이 샤를마뉴 대제의 군대 후위를 맡았다가 이슬람 군의 기습으로 장렬히 전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때 롤랑을 공격한 것은 이슬람군이 아니라 바스크인들이었다고 한다.

    오랫 동안 독립을 유지해 왔지만 스페인이 하나의 강력한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되면서 바스크 역시 그 지배 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바스크인들이 스페인에게 동화되기는 어려웠다. 1936년 스페인의 식민지 모로코에 주둔하던 프랑코 장군이 공화파 정부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지극히 파괴적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바스크인들은 주로 공화파 편을 들었다.

    공화파가 바스크 인들에게 더 많은 자치를 허락하겠다고 약속한 때문이었다. 수천년 동안 강대한 제국과 압도적 다수의 이민족 사이에서 버텨 온 끈기는 내전에서도 빛을 발했다. 바스크는 까탈루니아와 더불어 공화파 최대의 요새이자 최후의 거점이 된 것이다.

    게르니카는 이 바스크인들의 고도(古都)였다. 이 도시의 상징인 오래된 참나무 아래에 바스크인들이 모여 정책을 결의하고 스페인의 지배자에게 바스크인들의 자치권이라 할 ‘푸에로’라는 특권을 요구했던 전통이 면면한 바스크인들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그리고 1937년 4월 26일은 게르니카의 장날이었다. 인구 6천명 가량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의 중심가는 호객과 흥정 소리로 요란했다. 프랑코의 군대가 바스크의 중심지인 빌바오 지역을 죄어들어오고 있었고 바스크인들의 수십개 대대가 그에 몰려 후퇴 중이었지만 장날은 장날이었다. 그러나 오후 4시 30분 불길한 종소리가 게르니카의 평화를 깬다.

    뎅 뎅 뎅…. 교회의 첨탑 높은 곳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였다. 곧이어 우람한 몸집의 독일의 하인켈 폭격기 한 대가 독수리 날듯이 도시 상공에 나타나더니 도시 중심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피카소의 ‘게르니카’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그 경악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을 뒤덮은 비행대대가 게르니카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한다. 전쟁 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헤르만 괴링 독일 공군 사령관은 이 폭격이 독일이 새로이 개발한 공군력의 시험 무대였다는 진술을 했다고 하는데 (공식적으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음) 실상의 목표는 게르니카 주변의 다리들이었다고 한다. 다리를 끊어 공화파 군대의 퇴로를 끊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인켈 폭격기, 융커 52 전투기 등은 다리 뿐 아니라 시내를 폭격했고 한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특히 소이탄은 최신 개발 무기로서 이 오래된 도시의 태반과 도시에 살던 이들 다수를 삽시간에 불살라 버렸다.

    게르니카에는 몇 개 대대의 수비군이 있긴 했지만 독일 공군을 상대할 대공포대 따위는 변변히 없었고 독일 공군은 그야말로 사람 없는 들을 가듯, 오리 사냥을 하듯 폭탄과 기총 사격을 퍼부었다. 당시 주장으로는 1600명, 후일 조사로는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뒤 프랑코 측은 “공화파들의 자작극”이라고 강변하지만 타임지 특파원 조지 스티어가 이 평화로운 마을을 박살내 버린 현장을 고발하고 독일이 폭격 사실을 인정하면서 게르니카의 비극은 전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게르니카의 참극 이후 바스크인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그래서 자신들의 아이들이라도 살려 보고자 약 2만 명의 아이들을 배에 태워 탈출시킨다. 이들이 유명한 ‘바스크의 아이들’인데 이들은 각국 정부의 냉대 속에 입국을 거부당하거나 오랜 수용소 생활을 거치는 슬픔을 겪게 된다.

    이 오래된 도시의 비극에 치를 떤 사람 가운데 하나가 파블로 피카소였다. 공화파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 벽에 그릴 그림을 구상하고 있던 그는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범죄적 비극에 분노하여 단 한 달만에 가로 세로 7.7미터 3.49미터의 대작을 완성하게 된다.

    게르니카. 절규하는 사람들, 토막난 손발, 부러진 칼, 울부짖는 말과 멀뚱멀뚱 그 참상을 깔아뭉개는 듯한 소…. 게르니카의 비극은 피카소의 화폭에 그대로 남았다.

    피카소는 스페인이 민주화될 때까지는 이 그림이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 이후 집권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한 다음에야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게르니카 시는 독일에 게르니카 폭격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1997년 피폭 60주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가하여 공식 사과하고 독일 의회는 게르니카에 경제적 지원을 의결한다.

    물론 그것으로 60년 전 죽어간 수백 명의 민간인들의 억울함이 씻길 리는 없지만 그래도 독일은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 대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깍듯이 사과했다. “침략에 대한 정의가 확실하지 않다.”고 우기는 일본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셈이다.

    일본 대사를 불러 강경하게 항의하는 우리 나라 외교부 차관의 모습을 보면서 당연히 그래야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며시 멈추게 되는 이유는 자국민들 수십만을 제주에서, 또 전국 각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던 정부가 그에 대해 일언반구 사과가 없는 모습을 두고 일본인들은 또 어찌 생각할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쳐서다. 우리 정부는 ‘학살에 대한 정의가 확실하지 않다’고 할 것인지.

    게르니카는 비극이었지만 더 큰 비극의 전초에 불과했고, 그 뒤에 벌어진 비극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의 사건이었다. 이후 게르니카는 곳곳에서 확대 재생산됐다. 그 가운데에는 한국도 있었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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