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이도 사랑하신다고,
    성경에 쓰여 있네"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를 읽고...하나님도 조금은 퀴어
        2013년 04월 25일 02: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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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성 소수자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일부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이에 대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성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빨간 우체부’의 앤윈님의 글을 본인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이 글의 원문 글 링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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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2일부터 28일까지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회와 기독교를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2003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난 故 육우당의 10주기 추모 기간입니다. 무려 이런 시기에 차별금지법 상정을 반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심지어 민주통합당의 민홍철 의원은 군형법 92조를 ‘동성간의 간음 처벌’로 개악하려고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빨간 우체부>는 故 육우당 10주기 추모 기간을 맞아 한울 출판사에서 2008년에 출간된 책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의 서평을 기획했습니다. 내일이 바로 故육우당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내일은 故육우당의 추모사가 올라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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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퀴어문화축제에 나는 손글씨로 피켓을 만들어서 들고 갔다.

    레드-1

    레드-2

    (사진) 분홍색 피켓 들고 있는 손이 내 손

    방금 전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작년 퀴어문화축제 사진을 검색하다가 위 사진을 찾아냈다. 사진을 올린 사람은 “자유국가”, “좋아진 멋진 세상”이라며 “세상이 급변한다”는 댓글에 “성경에도 있다네요.. 헤테로와 퀴어를 창조하시고” 라고 대답해 주고 있었다.

    피켓을 들고 집에 돌아가자, 엄마는 성소수자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성경적이지 않은 건 알고 있지?”

    성경적인 것

    나는 독실하게 개신교를 믿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손에 자랐고, 한글을 성경으로 배웠다. 내 이모는 내게 자장가로 찬송가 566장을 불러주었고, 감기로 열이 끓으면 엄마는 내 이마에 십자가를 그어주었다.

    내 외할머니가 세상을 바라보는 첫 번째 원칙은 ‘우리는 차마 짐작하지 못하는 주님의 깊고 넓은 뜻’이었다. 우리는 한없이 작아 알지 못하는 세계의 넓은 일들을 신은 그 나름의 질서로 아름답게 배치해두었다는 이야기에, 어린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내 외할머니와 내 어머니의 신앙은 내게 사랑과 연민의 시선으로 남았다. 그녀들은 내게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으며, 신은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매일 밤, 그녀들이 어린 내 손을 붙잡고 세상을 위해 기도를 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내가 기억하는 성경은 슬픈 자들을 위로했고, 노예들의 편에 서 있었으며, 크고 넓게 사랑을 말하는 책이었다. 나이가 들어 나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정체화했고, 그러면서 유물론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신에 대해서 불가지론적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깊은 곳에 신의 자리를 남겨두었다.

    온전히 외로운 순간들에 날 지지해 줄 커다란 사랑의 자리. 2008년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공습했을 때, 내 방 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할 자리는 남겨두었다.

    얼마 전 민주통합당 김한길·최원식 의원이 차별금지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에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는 신문광고를 냈고, 김한길·최원식 의원의 의원실에는 ‘목사님의 지시’로 이뤄진 항의 전화가 끝도 없이 걸려왔다고 한다. 욕설이 섞인 항의 전화 속에서 이 의원들은 ‘종북 게이’가 되었다.

    종북 게이라니. 처음 이 문자를 읽었을 때는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표현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까, 기가 차서 웃음 밖에 나오질 않았는데, ‘종북 게이 낙인’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두 의원은 법안을 철회했다.

    분명 성경에는 ‘남색’을 금지한다는 구절이 있다. 레위기 18장은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라고 하였고, 로마서 1장은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성경 안의 구절들을 끊임없이 인용하면서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온갖 표현으로 성소수자들·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지키자고 말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성전(聖戰)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내 외할머니는 내게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로마서 1장 27절의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자와 로마서 1장 29-31절의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교만한 자”, “비방하는 자”, “무자비한 자”를 놓아두고 성경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는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의 ‘슘 프로젝트’가 만든 결실이다. 쉼과 숨의 의미를 담아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커다란 사랑을 가진 신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쉼과 숨의 의미를 함께 갖고 있으리라. 찬송가 478장은 “밤 깊고 비바람 몰아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라고 하지 않던가.

    책은 목사들이 동성애를 만난 경험과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를 다룬 ‘목회로 만난 동성애’, 성소수자 기독인들의 목소리를 담은 ‘동성애자가 만난 하느님’, 동성애를 단죄하는 태도가 성경적인지에 대해 성경으로 찾아보는 ‘성경으로 만난 동성애’,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2부 ‘동성애자가 만난 하느님’을 읽으면서 나는 몇 번씩 책에서 눈을 떼고 흐느껴 울었다.

    애통하는 자

    한기총의 호모포비아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故육우당의 죽음에 관해 글쓴이 이경은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기독교인 동성애자가 보수 기독교의 동성애 혐오에 저항하는 것은 그야말로 ‘존재’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믿고 영혼을 의지하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혐오하고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서술한다.

    누구에게나 신은 고통의 지연으로서 다가온다. 어디 우리들만 그렇겠는가. 착한 부하를 전쟁터로 몰아내서 죽여버리고 냅다 그 부인을 취하고서도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노래하지 않던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신은 나약한 인간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 말라”고 올곧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이 책에 목소리를 보탠 성소수자들에게는 애통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자신이 믿는 신을 대리한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들에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고 말했고, 삶이 통째로 부정 당하는 경험을 통해 이들은 두려워했고, 위축되었고, 도망치고 숨어들어갔다.

    글쓴이 양지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영적 리더라고 신뢰했던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성적 지향을 털어놓지만, “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이나 창조 질서가 아니다” 라는 요지의 설교만 듣고, 심지어는 “동성애가 죄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함께 할 수 없다”고 내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들에게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나직하게 말을 건넨다.

    어느 종교건 종교가 가지는 가장 일차적인 기능은 삶의 고통에 대한 위안일 것이다. 절대자가 내 삶을 보호하고 있다는 안온함은 괴로운 일이 예기치 않게 닥쳤을 때, 그 고통을 위안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인 성소수자들에게는 그 안온함이 온전하게 작용하지 못한다. 분명 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성경에 쓰여 있는데,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신은 너를 저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한 게이 남성이 고민을 상담하는 절절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목사에게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여자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 “여성과의 결혼도 생각해 봤지만 사랑 없는 결혼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목사님 설교 듣는 것도 찬양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행복한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동성애에 빠져 있는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새벽마다 이성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날 변화시켜주시지 않는 거냐”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절실한 고민에 목사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까지는 알지 못한다. 저 질문에 보수적인 기독교 목사가 무언가 대답을 했을 걸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 어딘가가 무너지는 기분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1부 중 글쓴이 박총의 ‘보수 신자가 보수 신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글이었다. 그는 자신이 동성애를 죄로 보는 입장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면서 동시에 동성애를 대하는 보수 복음주의 교회의 태도가 훨씬 심각한 죄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예수는 죄인의 친구로 살았다. 죄 없는 자만이 간통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하고, 세리와 함께 밥을 먹었으며,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었다. 그는 이것이 “개인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리가 있을 수는 있으나,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리’는, 동성애자의 ‘존재’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는 짐 월리스라는 목회자의 일화를 소개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성경 말씀을 모조리 오려내자, 성경책은 들기도 힘들 만큼 너덜너덜해졌고, 짐 월리스는 이 상처투성이 성경책을 쳐들고 청중에게 “이것이 바로 우리 미국인의 성경”이라고 말했다. “성경에서 고작 대여섯번 언급된 사안에 대해 이처럼 눈에 쌍심지를 켠다면, 이천 번 이상 언급된 가난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무관심에 대해서는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한다.”

    김진욱은 ‘999번 들은 이야기와 한 번 듣는 이야기’라는 글에서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동성애에 대한 정죄가 아닌 ‘나그네라는 약자에게 가해진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정죄로 다시 읽어낸다.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지독하게 인용되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일반 원칙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될 때, 이 구절들은 거꾸로 카트리나가 동성애자들에 대한 천벌이라느니, 모두 유황불에 떨어질 거라느니, 이제는 동성애자를 마음껏 차별하게 해달라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집회까지 열어대는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로 소돔의 화살을 돌리게 한다.

    신학자 테드 제닝스는 누가복음 7장과 마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의 백부장 이야기 속에서, 이 백부장이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사랑하는 종’이 백부장의 동성 애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나오는 종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pais인데, 이 단어는 단순히 종이라는 뜻을 넘어서 미동, 즉 첩에 가까운 나이 어린 남자 애인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백 명의 군대를 거느린 백부장이 그저 종 하나 때문에 로마인에게는 위협적 존재로 비추었던 예수를 찾아와 애원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 애인이었다면 그럴 법한 일이다.

    테드 제닝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예수는 그의 연인을 고쳐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사랑과 믿음에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노골적으로 칭찬을 퍼부은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동성애 뿐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민중을 억압하던 죄인이었다는 결도 함께 들어 있다.

    레드-3

    어릴 때 나는 성경 퀴즈 대회만 있다 하면 달란트를 싹쓸이 하던 애였다. 성경을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이유는 사실 성경이 매우 자극적인 책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온갖 음모와 술수, 죄악과 끔찍한 살해, 성욕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애로운 신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신의 뜻이 무엇이라고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신의 사랑을 규정할 수는 없고, 부정으로만 얘기할 수 있다고 서술했고,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다윗은 음욕 때문에 부하를 전쟁터로 몰아내서 죽이고 그 부인을 취했으며, 다말은 시아버지가 형사 취수제를 지키지 않자 시아버지를 속여서 시아버지의 아이를 갖는다. 이들은 벌을 받기는커녕 이들의 몸을 통해 예수가 태어나는 축복을 받았다.

    더욱이 아무리 보아도 성경 구절을 모두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제나 자매에게 바보라고만 말해도 지옥 불에 던져지고(마태복음 5:22)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마태복음 5:28)한 데다가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한(요한일서 3:15) 거나 마찬가지다.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해도 안 되지만(레위기 18:22) 생리 중일 때 섹스를 해도 안 되고(레위기 18:19) 일단 헌금도 지금처럼 하면 안 되고 흠이 없는 염소를 잡아야 하며, 7년마다 한 번씩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농사도 포기해야 되고(레위기 25:4) 돼지고기, 토끼고기, 장어, 게, 조개, 새우, 오징어 같은 건 먹으면 안 된다.(신명기 14장, 레위기 11장)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피임도 하면 안 된다. 오난처럼 벼락맞아 죽을 거다.(창세기 38장)

    이 수많은 구절들을 전부 역사적 맥락으로 해석하고,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왜 동성애에 대한 구절들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악착같이 이야기 하는 것인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아까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청소년 동성애자 故육우당을 기억하는 기독인들의 입장 개인연명’에 이름을 올리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동생은 흔쾌히 그러자고 말해주었다. 지지의 한 마디에 뭐라고 써야 할까 고민하다가, 동생은 “당신의 사랑을 존중합니다.” 라는 문구를 보냈고, 나는 요한일서 4장 18절을 보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영화 『몬트리올 예수』에서 현실 세계로 나타난 예수는 교회에 의해 살해당한다. 아마 지금 한반도에 예수가 돌아온다면, 약자들의 친구인 그는 틀림없이 ‘종북 게이’라고 불릴 것이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선교원에서 손을 반짝반짝 움직이며 짧은 혀로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같은 노래를 부를 무렵이었다.

    어느 여름날 전신을 독한 모기에 물렸고, 몸 여기저기가 모기 독으로 팅팅 부어 올라서, 아프고 가렵다고 울어대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모기 물린 데에 손톱으로 십자 모양을 그으면서 빨리 나으라고 기도해 주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외할아버지한테 “하나님은 왜 모기를 만들었어요?” 라고 물어봤다. 엄청나게 원망이 섞인 목소리였으리라.

    외할아버지는 내게 “우리는 모기가 아프고 싫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좋은 것이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모기가 대체 어디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다시 반문하자, 외할아버지는 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우리가 보기엔 잘 모르겠어도, 사실은 우리한테도 좋은 것”이라고.

    차별금지법 반대 집회를 열고, 민주통합당 의원실에 항의 전화하게 시킨 보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성경적으로’ 살고 있으니만큼, 피임도 안 하고, 어떤 음욕도 품지 않고, 기왕이면 섹스도 안 하는 게 좋다고 했으니까 섹스도 안 하고, 오징어랑 낙지랑 장어랑 돼지고기도 안 먹고, 뭐 그렇게 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외할아버지의 말을 당신들에게 다시 한 번 들려주고 싶다.

    당신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는지. 우리는 누구나 불행에 빠지고, 욥처럼 선한 사람이 끔찍한 상황에 빠지는 불의한 일도 목격하고,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수없이 겪는다. 하지만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결국엔 선을 이룰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 선이 어떤 선인지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헤테로와 퀴어를 창조하시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당연하지만 하나님도 조금은 퀴어인 셈이다.

    23일 프랑스 의회는 동성애자들의 결혼과 자녀 입양을 허용하는 내용의 동성결혼법안을 최종 가결했다.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실수하지 않으며 우리의 삶은 그의 품 안에서 예비되어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4월 25일 목요일, 즉 내일 7시부터 9시까지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층에서 故육우당 추모 기도회가 열립니다. 가톨릭·개신교 합동 추모식으로 진행되지만 종교가 없어도 참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마음들을 모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 육우당 10주기 추모행사 관련 링크)

    필자소개
    소설쓰는 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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