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촌의 형제들이 꾸었던 꿈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1
        2013년 04월 23일 03: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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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서울>(최종현, 김창희 지음/ 디자인커서 출판)이라는 책이 있다. 한국의 도시와 취락 역사를 필생의 연구 분야로 설정하고 전국을 발로 뛰며 눈에 담고 기록으로 남겨온 최종현 전 한양대 교수와 동아일보 국제부장, 프레시안 편집국장을 거친 김창희의 공동 저작이다. 두 사람이 서울이 얼마나 깊고 넓은 여러 층위들을 포괄하고 있는지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앵글로, 그 서울의 원형을 추적하는 책이다. 이 책에는 서울의 어떤 흔적들과 인연을 깊게 남긴 사람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여간첩’이라는 오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김수임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어’로 시작되는 <사슴>의 시인 노천명, 그리고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다 사라진 현 앨리스’, 그리고 이여성과 이괘대 형제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사연과 얘기를 <오래된 서울> 저자인 김창희 선생과 디자인커서 대표인 박강호 선생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글에서 언급되는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별칭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뜻한다. <편집자>

    * 앞의 연재 기사(서울 서촌의 여성들-2 관련 기사 링크)

    ***

    일제강점기에 서촌에서의 ‘아름다운 동행’은 더 있다. 이번에는 형제였다. 이여성(李如星, 본명 李命鍵, 1901~?)과 이쾌대(李快大, 1913~1965)가 그들이다.

    이들 형제는 한국사, 특히 한국미술사에서 대단히 희귀하고 의미 있는 존재였다. 이상이 구본웅에게 바친 표현을 빌려온다면 이들 역시 ‘자발적 발광체’였다.

    시대와 철저히 함께 하되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조류에 무작정 휩쓸리지 않고 자기중심을 유지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쓰라렸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월북했고, 결과적으로 남과 북의 역사에서 모두 잊힌 존재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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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칠곡에서 개화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두 사람은 민족의 역사와 미술, 그리고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 열두 살의 나이차로 미루어 형이 동생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게 옳겠다.

    형 이명건은 일찌감치 민족의 현실에 눈을 떴다. 1918년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가을 친구 김두전, 김원봉과 함께 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이자는 결의 아래 중국 남경의 진링(金陵)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들이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김원봉의 고모부인 독립운동가 황상규는 세 친구에게 조국산천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각각 호를 지어주었다. 김두전은 ‘약수(若水·물과 같이)’, 김원봉은 ‘약산(若山·산과 같이)’, 이명건은 ‘여성(如星·별과 같이)’이었다.

    이때로부터 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줄곧 이렇게 썼는데, 이들이 따로 또 같이 걸은 길은 조금 뒤 이여성-쾌대 형제가 걷는 길의 원형이 되었다.

    ‘김약수(1893~?)’는 그 뒤 다시 일본에 유학하면서 사회주의운동단체 북성회를 창립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 제1차당에도 참여하나 박헌영의 화요회파와 갈라져 별도로 활동했고, 해방 뒤에는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돼 소장파를 이끌고 국회부의장까지 되었으나 이른바 푸락치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 6.25때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와 월북했다. 그는 진보적 색채를 분명히 하면서도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이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김약산(1898~?)’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관되게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의열단을 조직해 단장(1919)으로 추대되는가 하면,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총대장(1938)이 되었고, 해방 직전에는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군무부장(1944)에 취임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가 추구한 것은 늘 민족주의자로서 좌우의 합작이었다. 그런 약산에게 해방 조국이 안긴 것은 치욕이었다. 그는 악명 높은 친일경찰 출신의 노덕술에게 체포되는 수모를 겪은 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1948년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아 북한의 초대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을 역임했다.

    ‘이여성’의 길도 외형상의 모습은 달랐을지언정 근본적인 줄기는 아주 유사했다.

    3·1운동 직후 중국에서 귀국하는 그는 대구 지역의 학생비밀결사 혜성단을 조직해 악덕 관리들에게는 ‘암살 경고’를, 민족자본가들에게는 ‘독립운동자금 요구’를 하는 등 강력한 투쟁을 펼치다 적발돼 3년을 복역했고, 그 뒤 일본 유학 시절에는 김약수와 함께 북성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북성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한 뒤 안광천, 하필원 등과 함께 일월회(ML계)를 조직하는 등 사회주의운동의 첨단을 걸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상하이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할 때 약소민족(필리핀, 아일랜드, 이집트, 인도, 베트남 등)의 독립운동 연구를 통해 민족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는다.

    사회운동과 미술, 포기할 수 없는 두 축

    그 직후 귀국해서 동아일보 조사부장으로 있을 때 매제 김세용과 함께 세광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1931~35년 <<숫자조선연구>>라는 역작을 연차적으로 다섯 권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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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독부 통계자료 등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조선의 실사정’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연구서는 우리나라 출판물 중 최초로 말미에 색인을 실은 책이었다.

    이렇게 이여성이 중국과 일본 등 주변나라들을 한 바퀴 돌고 세상을 보는 눈도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가 나름의 균형점을 찾아 1920년대 말 귀국한 뒤 대중과 좀 더 밀착된 운동을 시도하며 거주한 곳이 종로구 중학동 111번지였다.

    지금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뒤의 도로망 사이에 조그맣게 삼각형으로 남아 있는 구역의 일부다. 이때는 동생 이쾌대가 서울의 휘문고보에 재학하던 시기(1928~1933)이기도 했다.

    이들 형제를 위해 아버지 이경옥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이층 목조건물을 지어주었다. 이쾌대는 이 시절 다양한 경험과 깊이 있는 고민을 통해 이미 한 단계 높은 세계관을 형성한 이여성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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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에 큰 재능을 보인 이쾌대는 졸업과 함께 도쿄의 제국미술학교(1934~39)로 유학을 떠나고 이여성 가족만 이 집에 머물 무렵 이여성은 동아일보에 함께 근무하던 이상범(1897~1972, 누하동 178에 화실 운영하며 누하동 182에 거주)과 함께 2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런 화가로서의 모습은 그의 정치사회운동이 위축되자 여기(餘技)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20년대 초 일본에서 조직운동을 한창 펼칠 때에도 미술전시회에 작품 10여 점을 출품한 바 있었다. 인간 이여성을 지탱하는 두 축은 정치사회운동과 미술(또는 미술사)이었다. 이 점은 나중에도 실증된다.

    마침 이여성과 이상범 두 사람은 모두 동아일보 조사부 소속으로서 이여성은 부장이었고, 이상범은 화백으로서 ‘청전 양식’이라고 불리는 한국적 산수화의 새로운 전형을 찾아가던 주목받는 화가였다. 이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그 다음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 때 일장기 말소 사건에 함께 연루돼 강제해직됐다.

    그 뒤 이여성은 대단히 엄밀한 고증을 전제로 역사풍속화의 제작에 몰두했다. 과거의 역사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38년 초에는 2년간의 작업의 결실로 모두 12점의 대형 역사화가 완성되었다. 그 가운데 제목이 알려진 것은 <청해진대사 장보고>, <유신(庾信)참마>, <대동여지도 작자 고산자>, <악조(樂祖) 박연선생>, <격구(擊毬)> 등이며, 그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격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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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여성의 역사풍속화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격구'(1936년경, 마사박물관 소장). 비단에 채색한 90.5X87cm 크기의 대작이다.

    이여성은 자신의 1930년대 작업에 대해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현실 조선의 진상을 샅샅이 알고 싶어 <<숫자조선연구>>를 작업하였고, 그 뒤 문화조선의 실태를 알고 싶어 역사화를 제작하였으며, 그 부산물로서 이 책(<<조선복식고>>)을 펴냈다. (…) 생활과 문화란 서로 유리될 수 없다.”(이여성, <<조선복식고>>(1947년, 백양당), 349쪽.)

    그는 한 손으로는 사회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다른 한 손으로는 조선민족의 문화적 성격 규명을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어느 한쪽도 놓을 수 없었다. 그 양쪽은 모두 그에게 운명이었다.

    서촌에서 다시 만난 형제, ‘민족’을 발견하다

    일본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전업화가의 길에 들어선 이쾌대가 1939년 초 귀국해 궁정동 16-3에 자리 잡았다. 그 직전인 1938년 가을에 이여성은 중학동 집을 정리하고 옥인동 56으로 이사와 있었다. 궁정동과 옥인동 모두 서촌 안의 동네들이었다.

    궁정동 집은 작은 한옥을 동생 이쾌대가 매입해 거주한 것이었지만, 옥인동 집은 60여 평의 넓은 터에 중학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형 이여성을 위해 2층 양옥으로 새로 지어준 것이었다. 두 집은 직선거리로 300여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형제가 이번에는 서촌에서 동행하게 됐다.

    재미있는 것은 형 이여성이 새로 이사 온 집이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 영역 안에 있으면서도 그 일대의 가옥을 모두 매집하려는 윤덕영의 손길을 뿌리치고 독립가옥으로 남아 있던 몇몇 집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이다.

    지금은 이여성의 2층 집터에 6층짜리 다소 우악스럽게 생긴 단독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런가 하면 이쾌대가 3년 이상 거주하던 궁정동 집은 지금의 청운동사무소 앞 사거리에서 청와대 앞 분수대로 이어지는 도로 상에 있었는데 1990년대 초 이곳에 직선도로가 나면서 헐리고 말았다.

    서촌에서의 동행은 무엇이 달랐을까? 그걸 살피자면 그 무렵 동생 이쾌대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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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쾌대가 도쿄 제국미술학교 졸업반 시절이던 1938년 왕성한 창작열로 완성한 유화 작품들. 왼쪽부터 ‘무희의 휴식'(116.7x91cm, 제5회 녹포사전 입), ‘운명'(160x130cm, 제25회 이과전 입선), ‘상황'(160x130cm). 학창시절의 여러 가지 모색이 민족적 소재의 발굴과 동양화 풍의 기법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그의 그림들은 맑은 수채화 또는 동양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서양화(유화)의 물감과 붓을 다루는 능력이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인물화에 천착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드러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런 실험과 모색이 한 고비를 넘으면서 도쿄의 제국미술학교 졸업반 무렵엔 유화 물감을 캔버스에 덕지덕지 바르던 과거의 기법을 버리고 동양화 풍의 선묘(線描) 중심의 그림으로 정착되어 갔다.

    작품의 소재도 민족의 일상생활에서 찾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 때 서울에서는 형 이여성이 각종 역사화들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이 무렵의 대작들이 꽤 남아 있다.

    이쾌대는 한국미술의 축복이었다. 이때의 작품들을 보면 소재와 기법이 당시 미술계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것은 물론이고 종래 볼 수 없던 현실의 서사적 구조까지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귀국 이후 국내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데 이어 1941년에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과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던 시기였다. 그에 발맞추어 국내에서도 전시체제가 숨 가쁘게 형성되어 갔다.

    1939년 창씨개명, 194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및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결성, 1941년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 공포 등으로 식민지 백성들은 움치고 뛸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식민 당국은 당시의 ‘성전(聖戰)’에 식민지 백성들의 ‘총력(總力)’을 동원하기 위해 표현매체를 다루는 미술가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때 이쾌대는 조선미술전람회(鮮展) 등의 관변 전시회를 거절한 일군의 미술가들과 함께 1941년 3월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자신의 궁정동 집을 연락사무소로 삼았다.

    조선총독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지만 그는 그 대열에 휩쓸리지 않았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이때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이중섭이었다.

    이들은 관변 작가들이 온통 전쟁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1941~1944년 매년 전시회를 열고 서로를 격려해가며 어려운 시기를 넘어가고 있었다. 당시 이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그들은 당시 자기들의 무기력을 한탄하며 지내는 재조밖에 없었던 문화인으로서 최대한으로 취할 수 있는 일제에 대한 하나의 소극적인, 아니 적극적인 반항일 수 있었다. 우리들은 그들이 지닌 바 모더니즘에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진부한 아카데미즘을 용감하게 깨뜨리고 자기들 자신의 미술을 주제에 있어서나, 기교에 있어서나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분명히 이 젊은 화가들은 조선의 양화(洋畵)를 화학생적(畵學生的)인 영역에서 벗어나게 한 전위화가들이었다.”( 박문원, <미술의 3년>, <<민성>> 194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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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대 초 신미술가협회에서 어려운 시기를 함께 넘던 화가들. 왼쪽부터 최재덕, 이쾌대, 이중섭, 김종찬

    같은 시기, 형 이여성은 자신이 일하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두 폐간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화 제작에 몰두했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리 고유의 복식사(服飾史) 정리에 몰두하게 되었다. 옥인동 자택에서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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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쾌대의 인물화 세 점. 왼쪽은 일본 유학시절(1934~39년)에 그린 ‘자화상I’;(목판에 유채, 45.7x38cm)이고, 가운데는 귀국 후 서촌의 궁정동에 살며 신미술가협회 활동을 하던 1942년 무렵 그린 ‘자화상II'(캔버스에 유채, 53x41cm)이다. 후자는 그의 인물에 대한 천착이 한 고비를 넘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잘 보여준다. 마치 고구려 벽화 속의 인물이 튀어나온듯한 느낌을 준다. 오른쪽은 가운데 그림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법으로 그린 형 이여성의 인물화(캔버스에 유채, 90.8×72.8cm)다

     

    1940년대 초의 어느 날 이여성의 2층 양옥집 앞에 동네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2층 베란다에 한껏 곱게 꾸민 젊은 여성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의상을 입고 나타났던 것이다. 옛 영화의 환생이었다. 이날의 이벤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옥외 패션쇼라고 부를만한 일이었다.

    경위는 이랬다. 이여성이 옛 복식에 대한 자신의 고증에 따라 옷을 만들었고, 이를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입혀 사진을 찍기 위한 자리가 그만 패션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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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촬영된 사진들 가운데 몇 장은 해방 뒤 1947년에 출판된 <<조선복식고>>에 실렸다. 그는 이렇게 “조선을 잘 알고 싶다”(이여성, <<조선복식고>>(1947년, 백양당), 서문)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에 따라 전인미답의 영역을 스스로 개척하되 그 과정을 철저하게 밟아 나가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이여성은 일제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던 1944년 여운형을 중심으로 형성된 건국동맹에도 참여했다. 매제 김세용과 함께였다.

    스스로 선택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임박한 해방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해방 뒤에도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당,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 등을 거치며 줄곧 여운형과 같은 길을 걸었다. 그는 건준에서는 선전부장, 조선인민당에서는 정치국장, 사회노동당에서는 사무국장, 근로인민당에서는 중앙상임위원 등의 중추 역할을 맡았다.

    해방을 위한 준비에는 동생 이쾌대도 형 이여성에 뒤지지 않았다. 그는 신미술연구회의 활동에 매진하면서 조선 민중의 염원을 화폭에 담았다. 미술의 길로 일로매진한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방 전부터 시작해 해방 후까지 수 년에 걸쳐 그려진 대작 <군상I : 해방고지>다. 그는 이 작품 하나로도 한국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만했다. 기법 상으로는 동서양화를 넘나든 자신의 훈련의 결과가 모두 담겼고, 소재와 내용에 있어서도 고통과 고난의 ‘과거’를 딛고 해방의 밝은 ‘미래’를 향해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오늘’의 염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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