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스턴 마라톤대회와 한국인들
    [산하의 오역] 1947년 4월 19일과 50년 4월 20일, 서윤복과 함기용
        2013년 04월 22일 01: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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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테러로 얼룩진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우리 나라와 인연이 깊다. 그 인연의 시작은 굵디 굵었다. 1947년 4월 19일 보스턴 시민들은 경악했다.

    유서깊은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웬 황인종 한 명이 다리 길고 덩치 좋은 서양인들을 척척 제치고 1위로 골인한 것이다. 더 기이한 것은 그는 무국적자(?)였다. 즉 그때만 해도 정식 정부가 없었던 한국이었던 것이다. 그 이름은 서윤복이었다.

    그는 고려대학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려대학생이 아니었다. 아직 생존해 있는 원로 정치인 이철승이 그 진가를 알아보고 총장도 모르게 스카웃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입던 헌옷으로 유니폼을 대신했고 동대문 근방에서 헌 스파이크슈즈를 구해 밑창의 못을 빼고 리어카 바퀴의 고무를 잘라 대충 기워 만든 신발을 신고 그는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했다.

    서윤복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의 서윤복

    감독 손기정은 남다른 감회 속에 서윤복을 껴안고 펑펑 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정식 국적은 없지만 서윤복의 가슴에는 태극기가 큼직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히틀러에게 받은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렸고 승자로서 환한 미소 한 번 보여 주지 않았던 손기정으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좀 씁쓸한 이면도 있었다. 이 보스턴 마라톤 팀의 코치는 남승룡이었다. 원래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우승 후보는 남승룡이었고 마라톤 경력으로보나 나이로 보나 남승룡은 손기정의 선배였다.

    하지만 그제나 지금이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악습은 유구했던 것 같다. 남승룡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해방 이후 출전하는 보스턴 마라톤 대표팀에서도 그는 반강제로 감독 아닌 ‘코치’를 맡아야 했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당연히 감독이었던 것이다.

    그는 코치 겸 선수로 출전했던 바 서른 여섯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완주했으나 10위(13위라고도 하는데)에 그쳤다. 그 나이에 보스턴 가도를 달렸던 것은 어찌 되었든 한 번 1위로 국제 대회를 제패하는 기억을 가져 보리라는 집념 때문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하나 더. 서윤복의 유니폼에는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도 박혀 있었다. 미군정 치하라는 특수한 상황의 반영이기도 했고 미군정의 재정적 지원이나 승인 없이는 출전조차 어려웠던 당연한(?) 형국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서윤복의 마라톤 제패는 세계를 경악시켰고 한국을 뒤흔들었다.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足覇天下)의 휘호를 선물하며 감격했고 인천 시민들은 집집마다 돈 30원씩을 거둬 환영대회를 열었다.

    이승만은 여기서 또 별로 웃기지 않는 유머를 구사한다. “나는 몇십년 독립운동을 해도 신문에 별로 안났는데 자네는 두 시간 반 뛰고 나보다 더 유명해졌네.” 하여간 교활한 영감탱이 같으니. 당신이 한 행동이 신문에 다 났으면 대통령이 되지도 못했어!

    하지만 보스턴과 한국의 인연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절정은 1950년 4월 20일 찾아온다.

    보스턴 시민들은 또 한 번 경악한다. Korea라는 나라 이름은 서윤복으로 인해 가물가물 기억하겠는데 이번에는 이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들이 보스턴 마라톤 1,2,3위를 모두 차지해 버린 것이다.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라는 이름이었다. 이 가운데 함기용은 나이 불과 열아홉살, 양정고보 3학년생이었다. 즉 고3이 세계를 뒤흔든 큰일을 낸 것이다. 이번에는 그 셋 모두의 유니폼에 태극기만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1950년 보스턴대회의 함기용

    1950년 보스턴대회의 함기용

    풀코스는 몇 번 뛰어 보지도 못한 이 함기용은 눈보라가 날리는 악천후 속에서 50위 밖으로 처져 있었다. 그러다가 스퍼트를 내기 시작해 연이어 선수들을 제치더니 최윤칠마저 “선배 먼저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훌쩍 추월해 버렸다.

    얼마나 빨리 뛰었던지 보스턴 마라톤 코스 가운데 마의 코스였던 상심의 언덕 (Heartbreak Hill)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만 지쳐 버렸다. 그리고 뛰지 않고 걸었다. 뛰다가 또 걸었다. 그러기를 세 차례. 그래도 다른 선수들은 그에게 범접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기가 막힌 언론들이 “Walking Champion”이라고 불렀을까.

    또 한 번 감독으로 와서 “나도 했고 서윤복도 했는데 너희들이 못할 게 뭐냐?”면서 된장국을 손수 끓여가며 응원했던 손기정이야 말할 것도 없고 신생 대한민국 전체가 뒤집혔지만 미국 현지에서도 이 희한한 마라톤 강국의 청년들에 관심이 많았다.

    2위를 차지한 송길윤의 인터뷰는 더욱 재미있다. 미국 언론들이 “마라톤을 잘하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을 때 이 전라도 군산 출신 장정은 “김치!”라고 대답하여 동양의 신비한 식품(?) 김치에 대한 궁금증을 유포시켰던 것이다. 아마도 김치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타트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 영광스런 보스턴 금메달은 아쉽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의기양양 귀국한 지 두 달만에 전쟁이 터졌고 금메달리스트 함기용은 보스턴 대회 금메달을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파묻고 피난을 떠났다.

    그런데 고향 춘천으로 가던 도중 그는 국군에게 체포된다.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복장이 엇비슷한 군인들을 만나 섣불리 “인민군 만세”를 부르짖었는데 그들은 인민군과 격전을 치르고 눈에 핏발이 선 국군들이었다.

    함기용은 이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그때 필사적으로 외친 것이 “내가 보스턴 마라톤 1등한 함기용입니다!”였다. 국군 가운데 그를 용케 알아본 사람이 있어 생명을 건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보스턴 금메달의 신화는 그를 살렸지만 훗날 금메달 묻은 곳에 가 보니 금메달은 누가 벌써 파 갔더라고 한다.

    2004년 4월, 함기용의 고향 춘천에서는 54년만의 환영대회가 열린다. 원래는 당연히 보스턴 제패 후 고향 춘천에 내려와 꽃다발 세례를 받고 카퍼레이드를 벌여야 옳았겠지만 전쟁은 그를 무산시켰던 것이다.

    춘천 시장은 54년 전 함기용이 써야 했던 월계관을 씌워 주며 뒤늦은 축하를 전했고 함기용은 “고향은 떠나 있어도 언제나 고향”이라며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전쟁은 함기용에게 금메달과 차후의 영광을 앗아가 버렸지만 보스턴 우승은 그의 목숨을 살리고 반세기 후까지도 그를 기리는 명예로움으로 남는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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