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제는 우리의 원수”
    : 북일 연대 투쟁의 패스워드
    [북일 민중연대의 기억들] 친미국가와 반미국가의 공통점과 차이
        2013년 04월 22일 11: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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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핵은 미국을 겨냥하고 있다

    북한에는 미국의 핸포드나 러시아의 첼랴빈스크, 일본의 롯카쇼무라 같이, 제대로 플루토늄을 분리할 수 있는 핵 재처리공장은 없기에 정말로 핵 보유국이 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관련 글 링크), 북한이 개발중인 핵무기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한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미국인 것만은 확실하다.

    북한은 3차 핵실험 이후의 유엔 제재조치나 핵 탑재 가능 전투기 폭격훈련을 포함한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반발하여 강경한 입장을 밝혀왔다.

    “제2의 조선전쟁을 피하기 힘들게 됐다”([로동신문] 2013년 3월 7일자)거나 “주일미군도 우리 전략 로켓부대의 표적에 들어 있다”며 “미국에 추종한다면 비싼 대가를 치를 것”(4월 8일자)이라고 위협하고 있어서, 많은 경우 무시되고 있지만 그들이 어디까지나 “침략자들의 본거지들에 대한 핵 선제타격권리를 행사하겠다”(3월 7일자)고 지속적으로 공언해왔던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약 북한의 목적이 한국이나 일본과의 핵전쟁이라면, 기존의 노동호나 대포동호 같은 탄도미사일로 국내 23기, 일본 54기나 되는 원전을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흔히 언급되는 사실이다.

    북한이 자국민들에게 끝 모를 ‘고난의 행군’을 강요하고, ‘국제사회’를 적으로 돌려 고립을 감수하면서까지 핵개발을 추진하는 모험주의 노선을 취하는 이유는, 군사적 외교적으로 핵무기 최강대국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국에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이다. 한국도 일본도 그 메시지의 최종 수신처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남한의 극우들뿐만 아니라 일본의 극우들조차도 북핵 억지와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다. 이미 지난 2012년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마이니치 신문]이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앙케이트에서 자민당 후보자들의 38%가 “핵무장은 검토해야 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관련 기사 링크)

    혹은 일본 극우의 대표격인 전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비슷한 시기에 행한 강연에서 “일본은 핵무기에 관한 시뮬레이션 정도는 해도 된다.” “군사적인 억지력을 강화하지 않는 한, 외교의 발언력은 없다. 지금 세상에서 핵을 보유하지 않는 나라의 발언력, 외교력은 압도적으로 약하다. 북한은 핵을 개발하고 있으니까 존재감이 있다”고 표명하기도 했다.

    이시하라의 발언에는, 일본 GDP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최빈국임에도 불구하고 핵을 내세워 미국과 대등한 외교를 전개하려고 하면서 ‘국제사회’에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감출 수 없는 부러움이 드러나 있다.

    일본이 ‘국제사회’를 적으로 돌리고, 국내의 반핵 여론을 무시하면서까지 핵무장을 단행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어쨌든 이번 북한의 핵실험과 한반도의 불안은 일본 극우들의 핵무장에의 강렬한 욕망을 공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포기 조항이 담겨 있는 헌법을 개정하여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개조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여 미국의 세계전략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면서 무기수출규제를 풀어 군산복합체를 구축하려는 일본 정권의 우경화 움직임에 강력한 원군이 되었음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 일련의 사태에서 적어도 두 개의 역설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북한이 국가 존망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선택한 군사중심의 핵개발정책은, 공교롭게도 그들이 “민족의 신성한 자주권”을 가장 위협한다고 여기고 있는 ‘미제(미국)’와 미제의 주구 ‘일제(일본)’, ‘공화국 남반부의 반동정권(한국)’의 군사력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과거 60여 년간 몇 번이나 미국으로부터 핵공격 위협에 노출되어 온 북한이 핵무장을 선택한 이유와 똑 같은 바로 그 이유, 즉 북핵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이나 한국의 극우들이 핵무장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관련 글 링크)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반북세력들이 북한 핵무장 추진 세력의 심정에 가장 공감하고 또 대변하고 있다는 역설이다.

    임-1

    미국와 국제원자력기구를 맹비난하는 북한의 포스터

    우리가 이 역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의 핵무장 노선은 동북아에 군사적 긴장만 고조시킬 뿐, 궁극적으로 국권 수호라는 목적 달성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와 관련해서 우리가 지금과 같은 한반도의 지속적인 불안상태를 벗어나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도의 주민들을 볼모로 삼아 모험주의적인 핵무장 정책을 취하고 있는 북한은 물론이고, 이러한 불안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 즉 미국을 핵심으로 하는 핵보유국들의 자신들만 뺀 핵억지 정책의 허울을 동시에 비판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북한’이 도미노처럼 출현하는 현상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비유처럼, 금연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초심자나 담배에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는 청소년들에 대한 경고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해비스모커의 금연 노력이 절실한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강렬히 핵에 대한 집착을 보인 두 나라인 북한과 일본은, 5년의 간격을 두고 각각 미국(정식명은 ‘연합국군’과 ‘유엔군’)과 전쟁을 치렀다.

    이들은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다대한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교전중에 핵 위협에 시달리거나 실제로 핵이 투하되었던 나라들이었다는 점도 핵강대국들이 핵확산을 초래하는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된다(물론 한쪽은 제국 일본의 판도를 배타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다른 한쪽은 일본의 패망으로 제국의 판도가 열도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민족국가로 독립되지 못하고 미소에 의해 분할점령된 분단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 벌인 전쟁이었지만).

    북한이 말 그대로 모든 희생을 감내하고 핵보유국에의 꿈을 향해 추호의 흐트러짐 없이 일직선으로 달려가고, 히로시마 원폭투하라는 참상을 겪은 일본은 ‘독은 독으로 치유한다’며 세계 지진의 약 10%가 발생하는 지진대국에 원전을 54기나 건설하고 이미 나가사키형 원폭을 4,000발 이상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이들 나라가 실제로 핵 위협에 노출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시하라 신타로의 발언에서 역력히 드러난 북한에 대한 부러움의 연원에는 이러한 전쟁 트라우마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 가상적국을 미국으로 여기고, 일본이 중국과 북한으로 가상적국으로 여기고 있는 차이는 있지만, 이들 나라에게 적국을 일순간에 절멸시킬 수 있는 핵과 폐허를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경제력도 갖춘 미국의 ‘거대한 힘’은 여전히 증오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북한과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세계적으로도 드문 ‘반미정권’과 ‘친미정권’을 수립하며 한쪽을 극단적으로 전면에 부상시키고 다른 한쪽을 극단적으로 주변화시켜 왔지만 양국에서 ‘친미’와 ‘반미’는 표리일체를 이루며 서로에게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북한과 일본 양 정권은 동일한 적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으면서도 역사상 한번도 반미연대를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구제국과 구식민지 관계라는 청산되지 않은 모순이 양자의 연대를 안이하게 허락하지 않은 것 이상으로, 양자가 반미와 친미를 전후 정권 성립의 철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냉전체제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는 이 구도는 그러나 냉전 종식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2차대전 패전 후 일본에서 일어난 반미운동은 전시중에 ‘귀축미영’을 외치며 체제가 강력히 선전한 반미의식과는 단절된 것으로, 친미정권과 그 배후에 있는 미국에 대항한 아래로부터의 체제비판적인 움직임으로 발생한 사회운동이었다(요시미). 그리고 그것이 국제적인 공산주의운동이나 반제, 반전, 반핵, 평화운동과 연결되면서 반미정권 북한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낳았다.

    그 첫 연대의 장은 한국전쟁이었다. 하지만 반미정권으로서의 색채를 명확히 해 나갔던 북한, 반미운동의 기치를 높이 쳐든 일본의 좌파운동 진영이 그 출발선에 서기까지는 당시의 세계정세 속에서 복잡한 우여곡절을 거쳐야만 했다.

    북한, 반미의식의 형성: 미제는 민주주의세력 아니고 제국주의세력

    개번 맥코맥(Gavan McCormack)이 언급했듯이, “미국의 200여 년 역사상 가장 오래 갈등을 지속하고 있는 나라는 영국도, 소련도, 쿠바도, 이라크도 아닌 북한”인데,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북한이 애초에 반미정권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미국은 우선은 소련과 연합하여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조선에 독립을 가져다준 민주주의 세력(=승전국)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의 비군사화를 위한 남북 분할 점령은 미소의 최대 합의사항이었고, 소련군의 대북 초기 점령정책도 ‘반일민주세력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해방된 조선사람들의 분노도 우선은 장기간에 걸쳐 조선을 식민 지배했던 일제로 향했다. 그들은 현재 김일성 동상이 서 있는 만수대 언덕 위의 평양 조선신사를 불태우며 일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했지만, 의외로 더 큰 폭력사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비하면 조선 민중들의 분노는 오히려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세력 처벌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지역에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이 건국운동 속에서 지속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일제 잔재 청산과 기존의 친일세력 주도 지배구조의 전환을 공통의 과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군정과 김일성이 1946년 3월에 토지국유화, 소작제 폐지, 무상분배를 내용으로 한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단행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조선 민중들의 계급적 분노가 친일 기득권 세력에 응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1년 내에 광범위한 교육체계를 갖추었던 북한이 교육의 임무로 내걸었던 것도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제거하고 민주 교육의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북한 초기의 국가 이데올로기적 집약을 백남운, 박시형, 김광진 등 북한 아카데미즘의 설립자들이 공동 집필한 김일성대학 강의록 『조선민족해방투쟁사』(조선력사편찬위원회, 1949)에서 찾아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강화도조약 이후부터 해방까지의 근대사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특히 식민지화 이후의 일제의 억압과 수탈 및 3.1운동과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상세히 기술하여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 북한 최초의 인민투쟁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북한에서 반일의식은 통일전선 형성을 위해서도, 만주 항일유격대 출신인 김일성과 그 체제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기존의 지배체제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위한 혁명의 주체세력 형성을 견인하기 위해서도, 또한 무엇보다도 소련이 북한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도 중요했던 것이다.

    반면, 북한에서 반미의식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및 해산, 미국의 한반도 문제 UN 이관, 남한 단독 선거 강행 등의 통일운동의 좌절과 미소 냉전의 심화로 나날이 증폭되어 갔고 미디어의 비난 수위도 높아 갔지만, 아직 국정의 기본방침이 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미소 냉전이 시작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이 소련에게는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미국과 비대칭적인 대립구도였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원폭 투하로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미국은 당초 향후 15년 정도는 핵보유국이 출현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며(실제로는 4년 후인 1949년 8월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한다), 당시 세계경제의 40%, 금 보유량의 70%를 차지했다고도 하는 미국에 비해, 전쟁으로 괴멸적 피해를 입은 소련은 전후 복구를 통한 경제 회복의 고된 과정중에 있었다.

    따라서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의한 대일전 참전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지정학적 이권을 확보한 얄타협정체제를 유지하면서 어디까지나 미국과의 협조 속에서 황폐해진 경제를 재건하는 데 전념하고자 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대미 협조 노선은 북한이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할 때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그것은 10일에 민족통일, 민족경제, 정치, 안보, 교육 등에 관한 공화국의 과제를 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강>을 발표했을 때, 외래(독점자본가), 친일파, 남조선 정부, 반동세력들을 비난하는 가운데, 대미 적대 표현은 삭제되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朴正鎮).

    하지만,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 6월의 마셜플랜 등을 통해, 미국이 경제·군사력으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을 봉쇄하려는 세계전략을 선언하면서 냉전체제가 본격화하자, 소련도 1947년 9월에 유럽 각국 공산당의 정보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코민포름을 결성하거나 1949년에 동구권 경제상호원조회의인 코메콘을 설립하며 이에 맞섰다.

    이때 소련은 미국을 새로운 전쟁을 도발하여 세계 지배를 획책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이에 대항하는 범사회주의 진영을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민주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평화 공세’를 펼쳐 나간다.

    2차 대전의 참상과 핵무기 위협 시대의 출현으로 전쟁에 대한 깊은 환멸을 느낀 서구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낸 이 ‘양대진영론’은 미소의 비대칭적 냉전구도에 균열을 가하는 강력한 분동이 되었다(김태우).

    한데, 1949년을 전후하여 북한에서는 ‘양대진영론’에 입각하여 미국=제국주의 세력, 북한=민주주의 세력으로 규정한 반미 선전이 급속히 고조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북한의 국가 이념에 명확하게 자리잡게 된다.

    북한은,<정강>에서 “국토의 완정과 민족의 통일을 보장하는 가장 절박한 조건”으로 “미·소 양군 동시철거”를 들고 있었는데, 48년 12월에 소련군이, 49년 6월에 미군이 각각 반도에서 철수하고, 같은 해 9월에 국공내전의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자, 이에 고무된 북한 수뇌부가 ‘중국혁명의 국내판’으로 공화국 남부의 인민을 해방하고 국토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한 것이 ‘조국해방전쟁’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한국전쟁이었다.

    당초 ‘평화공세’ 중인 소련은 표면적으로는 전쟁 지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북한은 중국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군사개입은 없을 것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찍이 공산주의 세력 확대와 싸울 자세를 천명해온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엔 안보리를 긴급 소집하여 군사개입을 결정하고 조선인민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때 북한은 미국을 해방된 조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집중적으로 선전했는데,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표상하기 위해 활용되었던 것이, 일본 제국주의와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수사였다.

    일제와 미제는 모두 반도를 침략하여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빼앗는 내적 연속성을 가진 악의 세력으로 선전하여, 한국전쟁을 반도의 재식민화를 노리는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저항투쟁으로 강조하였다.

    반일의식과 반미의식은 일직선으로 이어졌고, 일제에 저항한 민족독립투쟁과 미제에 저항하는 조국해방전쟁이 민족적 저항 의지의 표출로 역사적으로 맺어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조선인민군의 연원에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이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자신들의 위치를 설정한 김일성 체제는 전쟁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이나 분노, 혹은 자신들의 전쟁책임뿐 아니라 소련을 비롯한 공산진영의 모험주의적 전략실수까지도 미국 탓으로 돌리며, 국민을 통합하고 냉전체제에 편입되어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 가는 반미(일) 국가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전단

    한국전쟁기 인민군이 살포한 전단

    조국해방전쟁(북)과 민족독립투쟁(일)의 오버랩

    한편, 미군정 초기 일본사회에는 잠재적인 반미 정서를 내부에 감싸안고 있으면서도 반미세력은 표면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본에서 천황제 파시즘이 패전으로 붕괴된 후 지배세력들이 전쟁책임을 면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미세력으로 거듭나 천황제와 파시즘의 연결고리를 끊은 ‘상징 천황제’를 수용하는 대신에 민주화, 비군사화와 미군 주둔을 허용해야 했다.

    그 대표는 다름 아닌 천황 자신이었다. 천황은 전쟁 책임을 면책받는 대신에 미군의 점령정책에 적극 협조하며 국민통합에 앞장섰는데, 그것은 “미군의 히로시마 원폭투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다”는 스스로의 발언이나, 1947년에 GHQ에 “오키나와를 반영구적으로 군사점령해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에서 자명하게 알 수 있다(마고사키). 군사력을 미군에 이양해야만 천황제 유지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5년 패전 이전에 천황제 파시즘에 저항했던 유일한 세력이었던 공산주의자들도 점령 초기에 실질적으로 미군에 의해서 해방되기도 했고, GHQ가 단행한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개혁의 수혜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합법정당으로 재건된 일본공산당은 미군 점령하에서도 평화혁명을 통해 인민정권을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미국이 대일 점령정책을 ‘전후 개혁’에서 ‘반공의 방파제로서의 기지국가화’로 전환하여 맹렬한 반공정책을 추진하는 와중에도 관철되었다.

    일본공산당의 평화혁명론 자체는 소련의 양대진영론에 입각한 평화공세의 연장이기도 했다. 그들은 정당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했고, GHQ의 노동탄압이 노골화되면서 노조의 지지기반을 늘린 일본공산당은 1949년 1월 총선에서는 35석이나 의석을 획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 중국혁명의 성공이 점차 확실시 되어 가면서 아시아에 혁명 열기가 고조되자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더 극심해졌다.

    우선 7월부터는 GHQ의 강성노조 죽이기의 일환으로 대량해고당한 공산당계 국철 노조원들이 국철 관련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는 시모야마 사건(下山事件), 마쓰카와 사건(松川事件) 등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들은 빨갱이 배척 프로파간다로 활용되어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한 9월에는 일공의 중요한 조직기반이었던 재일본조선인연맹이 강제해산당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공산당의 친미평화노선도 파탄을 맞이하게 된다.

    임-4

    ‘미국의 양자’라는 제목으로 『로동신문』 1949년 2월 24일자에 실린 삽화

    이 무렵 소련, 중국, 북한은 당시 미국이 급속히 추진하고 있던 일본 재무장화와 기지 건설을, 일본의 무장해제와 비군사화에 관한 포츠담선언 등에 모순되는 것이라며 비난의 소리를 높이고 있었고, 소련은 미국에 의해 은폐된 구일본군 생화학무기 개발 부대(731부대)의 전쟁범죄를 다루는 전범재판을 12월에 독자적으로 실시하여(하바롭스크 전범재판),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지배전략을 견제하고 있었다.

    [로동신문]도 GHQ의 일공 탄압이나 재일본조선인연맹 탄압 등을 자세히 전했다. 마쓰카와 사건 등에 대해서도 미제국주의와 그의 주구인 일본의 반동정부가 일본공산당을 말살하기 위해 조작한 음모사건으로 보도했다. 아시아에서 미국에 대항하는 소-중의 대립이 명확해지자, 북한도 반미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공의 미군정하 평화혁명론의 대전환을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1950년 1월의 코민포름에 의한 일본공산당 비판이었다.

    코민포름은 기관지를 통해 이미 일본은 정치 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있고, 미일 지배세력이 블록을 형성해 군사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이때 독립과 평화 획득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고 평화혁명론만 내세우는 것은 제국주의를 화하는 것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반한다는 비판을 가했다.

    얼마 후에는 중국의 [인민일보]도 이에 대한 지지의 뜻을 발표했다. 중국의 공산화로 소-중 동맹이 형성되자, 소련은 유럽권에서의 평화공세와는 달리, 아시아에서는 평화와 독립을 위한 결정적인 투쟁을 선동했던 것이다.

    비판에 직면한 일공은 크게 분열하고 만다. 하지만, 그 수습에 손을 쓰기도 전에 GHQ의 공직추방령이 내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간부들은 지하활동을 강화하면서 반미민족독립을 외치며 재일조선인 조직과 연대하여 무장투쟁이라는 급진 노선을 명확히 하게 된다.

    일공은 GHQ와 친미정권의 전방위적 탄압 속에서 미국의 기지국가로 전락하는 일본을 아무런 전제 없이 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동일한 피억압 민족으로 파악하는 인식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한국전쟁은 그들에게 중국혁명을 이은 아시아 혁명의 전개로 수용되어, 미국에 대항하여 조국해방전쟁을 벌이고 있는 북한과의 국제적인 연대투쟁을 통해 일본의 민족해방투쟁을 견인하고자 했다. 패전 이후 일본에서 반미 내셔널리즘은 이렇게 좌파 정당인 일본공산당이 선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일 반미 연대의 역설

    이렇게 보면, 북한에서 반미의식은 체제의 이념을 대표하고 체제를 옹호하고 체제의 모순을 봉합하는 것임에 비해, 일본에서의 반미의식은 체제를 비판하고 체제의 모순에 균열을 가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지배에 저항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내걸고 있으면서도, 북일 간의 반미 연대는, 북한에는 체제 유지와 강화로 이어지고 일본에는 체제비판적인 움직임과 연결되는 모순을 갖고 있으면서도, 양자는 계급모순을 민족모순의 하위에 두거나 무시하고, 국가라는 존재를 회의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반미와 내셔널리즘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전면에 내세우는 위험은 당시나 지금이나 그 밑바닥에서 국경과 이데올로기 대립을 넘어 무기에서부터 사람까지를 유통시키는 자본의 존재를 베일 속에 가린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시아 반미연대의 모순은 미국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면 드리워질수록 어둠 속에 가려지기 쉽고, 또 그 만큼 아시아 해방투쟁의 지난함을 말해주는 것임은 북일 반미연대의 긴 역사가 배태한 역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참고한 자료>

    개번 맥코맥,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Target North Korea: Pushing North Korea to the Brink of Nuclear Catastrophe)』, 이카루스미디어, 2006.

    김태우, 「냉전 초기 사회주의진영 내부의 전쟁·평화 담론의 충돌과 북한의 한국전쟁 인식 변화」, 『역사와 현실』 83, 2012.

    마고사키 우케루,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일본의 사례, 1945-2012년』, 메디치미디어, 2013.

    요시미 슌야, 『왜 다시 친미냐 반미냐: 전후 일본의 정치적 무의식』, 산처럼, 2008.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편, 『한국전쟁기 삐라』,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00.

    朴正鎮, 『日朝冷戦構造の誕生: 1945-1965 封印された外交史』, 平凡社, 2012.

    和田春樹, 『北朝鮮現代史』, 岩波書店, 2012.

    필자소개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진보신당 당원, [나는 사회주의자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의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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