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는 신보수주의 코드?
지배계급과 권력자들에게 위험하지 않는 '문화'의 정치성
    2013년 04월 22일 10: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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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보수”라고 하면 꼭 성조기를 흔드는 정신 나간 목사라든가, 아니면 “문화안보”를 외치고 “문화계 곳곳에다가 잠입한 빨갱이”를 소리높여 고발하는 이석복 장군 등을 쉽게 연상합니다.

그런데 실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주류 보수”는 이런 “꼴통”들과는 아주 색다른 모양입니다. 대한민국이 아직도 수출대국으로서 큰 위기에 빠지지 않고 매우 작지만 그래도 성장을 하긴 하는 만큼, “주류 보수”들도 다소 여유만만하고 극단적인 주장들을 피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컨대 <중앙일보>가 진중권선생과 같은 “중도 사민주의” 성향의 논객에게 지면을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은 상징적입니다. “그 정도까지는” 거기에서 여유가 있다는 것이죠.

오늘날 “주류 보수”는 “합리적인 복지주의”까지 받아들이고, 최근의 <조선일보>처럼 빈곤층이나 비정규직에 대한 걱정하는 시늉도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

“다문화주의”는 오늘날 “주류 보수”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새누리당에 “다문화주의적 알리바이”를 제공해야 할 이자스민 의원부터 보시죠. 일단 농촌지역에 군량으로 갈 쌀이라도 재배할 다음 세대 농군들이 필요하니까 그 “인구학적인 배려” 차원에서 “주류 보수”는 그들이 속으로 혐오하는 카무잡잡한 얼굴들도 다 참아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다문화”라든가 문장마다 주문같이 나오는 “글로벌”과 함께 그들의 또 하나의 키워드는 “문화”입니다.

“문화”는 무엇보다 “위험한” 사상 내지 시사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흥미로운 교양”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교양”은 구한말 이후로 새로운 중간층이 무조건 가져야 할 사서삼경 의 대체물, 즉 “근대적 박식함”의 의미에서 이미 100년 가까이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해온 개념이고, “흥미”는 이광수 이후의 신소설 등이나 <개벽>지, <별건곤>, <삼천리> 등 20-30년대 종합잡지 이후로 대중문학, 출판의 키워드이니까 “흥미로운 교양”의 역사는 꽤 오래 됐는데, 요즘만큼 특히 “우리” 위주로 이런 교양이 잘 펼쳐지는 시대도 일찌기 없었던 듯합니다.

각종 사극이나 <대장금> 류의, 가부장제를 은근슬쩍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통속물들의 인기 때문인지, 서점에 가면 서가들이 다 “흥미진진한 우리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조선시대 살인 사건, 조선시대 간통 사건, <미실> 류의 “에로틱’ 위주의 고대사의 문학적 극화…

아, 명성황후 관련 서적만 해도, 목록에서 보면 약 50-60종 정도 되고, 그 대부분은 (민씨 척족의 가렴주구에 앞장서고, 동학농민전쟁에서 표출된 민중의 엄청난 혐오를 한 몸에 받아왔던) “조선의 마지막 황후”를 역시 “흥미 위주”로 “재미있게” 미화합니다. 이런 것이 “한류”의 미명하에 해외수출도 속속 되는데, 아마도 중국 등지에서의 <대장금>의 성공은 대표적일 것입니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한 장면

뮤지컬 명성황후의 한 장면

궁중에서와 같은 상하 복종관계나 가부장적인 서열을 은근히 합리화하여 타협하려고 하는 반동적인 중산층은 국내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면,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 류의 서적을 보시죠. 90년대의 사회의 전체적인 보수화 시작 이후로는 이와 같은 서적들이 지금까지 “대중적인 앎”의 영역을 지배해왔습니다.

부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대한 재미있는 디테일을 알게 해주는 것도 나쁠 게 전혀 없고, 문화재 답사도 아주 좋은 일입니다. 저만 해도, 경주 남산 지역에서 안 가본 절터나 불상이 없을 정도로, 한 때에, 국내에서 거주하면서 시간이 있었을 때에 이 일에 아주 열중했고, 지금도 그 시절을 많이 즐겁게 회상합니다.

문제는, “문화 유산을 배우느냐”는 게 아니고 “어떻게 배우느냐”는 것이죠. 예컨대 우리가 옛날 사찰들을 둘러보면서 특히 국찰 격의 사찰마다 노비를 과연 몇십 명 소유했느냐, 그리고 노비 소유는 과연 원시 불교의 율장 차원에서 승가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냐, 이런 질문들을 과연 합니까? 아니면, 석굴암 등에서 보이는, 결국 국가 권력의 “위엄”을 상징하는 사천왕의 힘세고 파괴적인 상들이 과연 “불살생계”와 어떻게 조화가 가능하느냐, 이런 질문을 과연 많이 하나요?

일부 <문화재 답사기> 류의 책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 80년대의 일종의 유산으로서 – 약간이나마 보이지만, 대부분은 그저 “우리 풍광의 아름다움”, “우리 사찰의 아름다움”, 그리고 물론(!) 근처의 맛집 소개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사실 “국토 아름다움 찬양” 류보다 더 위험한, 파시즘에 더 가까운 이야기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 부정의, 정치적 지배관계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무조건적인, 맹목적인 “우리 강산 아름다움” 찬양은, 사실 그런 문제의식의 본원적인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제자를 불구자로 만들 정도로 전통적인 위계 질서에 따르는 폭력을 당연시하는 가부장을 극도로 미화한 <서편제> 이후로는, 김기덕의 <봄, 여름,가을…>까지 “국토의 아름다움”은 소위 “한류 상품”의 한 selling point으로 작용돼왔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름다움 장사”를 “우리 문화의 국제적인 추진”의 성공으로 알고 흐뭇해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아름다운가요?

지금 아이 식사를 만들어야 하기에 더이상 상론하기가 어려워,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다음 기회에 미루고 일단 이것만 지적해놓겠습니다. 국내에서 보수들이 선호하는, 탈정치화되고 문제의식이 결여된, 전혀 “위험하지 않은” 소위 “문화”, 각종 “흥미진진한 교양”이 범람을 이루는 동시에, 대체로 비슷한 코드의 상품들이 해외진출을 하여 “한류”를 이룹니다.

“문화 생산”이 국내에서의 기존 질서 위주의, 탈정치화된 문화적 결속을 기하는 한편 국외에서의 “국위선양”까지 이루는 데에 대해서 보수주의자들이 대만족하고, 각종 지원정책을 통해서 해외 한국학까지도 거의 “한류학”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또 실제로는 많은 학자들이 – 어떤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 이에 부응하여 최근 “한류 연구”는 한국 관부의 매우 후한 지원으로 “한류” 자체 못지 않게 하나의 국제적 산업 (?)쯤이 된 모양입니다.

90년대 이후의 해외 일본학이 – 일본국제교류기금 등의 정책적 지원 등을 통해서 – 이미 “문화” 위주로 재편됨에 따라서, 인제 한국학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 셈입니다.

이와 같은 지원 정책은, 비정치적이다 싶은 “문화” 영역의 실질적인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실, 보수들이 선호하는 “문화”의 민족주의적 색채나 선정성, 은근한 가부장성, 그리고 <대장금>에서 노골적으로 보이는 “출세성공” 코드 등이야말로 보수들의 문화 정치의 지향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해서 전체적인 보수화 시대에 그 경제, 정치적 지배의 사회, 문화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려고 하는 것이죠. 아직까지 그들의 작전들은 대체로 성공적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공황의 전개로 봐서는 머지 않아 그들의 지배의 경제적 기반부터 깨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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