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세대가 촛불세대에게
    보내는 역사 편지
    [책소개] 『아빠의 현대사』(이근원/ 레디앙)
        2013년 04월 21일 10:13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아빠의 현대사』를 쓴 이근원이 대학에 들어간 해가 1980년이었다는 것은 우연일 수 있겠지만, 그 이후의 삶은 그에게 필연적 선택의 결과물이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것은 학문도, 낭만도 우정도 아니었다. 군인 전두환이었고 군사정권의 폭력이었으며, 최루탄이고 데모였다.

    386이 아니라 광주 세대

    정확하게 386세대로 분류될 수 있는 저자는, 하지만 자신이 386세대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광주 세대라고 말한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가장 강력한 충격을 준 상대방은 광주였고, 그의 이후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도 광주였다.

    이제 대학생이 된 촛불 세대인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기록된 이 책의 내용은 두 딸의 아빠가 된 이근원이 20대 초반에서 50대 초반까지 살아 온 자신의 삶과 투쟁에 관한 30년 동안의 기록이다. 하지만 자서전 이상의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평이다.

    아빠의 현대사

    “『아빠의 현대사』는 사랑하는 두 딸에게 자신의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들려주고 싶은 한 아빠의 인간적인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기록의 역사적 무게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 단병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

    이 땅에는 수많은 이근원이 존재한다. 높은 연단의 화려한 조명은 이들의 몫이 아니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 커다란 무대를 직접 만들고, 그 무대 위 사람들이 앉을 의자를 나르고, 그들이 받을 조명을 설치하는 일처럼, 빛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일들을 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 책은 힘들지만 자부심이 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보다 나은 내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싸운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386세대가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도 486, 586으로 ‘변명(變名)’하면서 80년대 저항한 사람들 전체의 투쟁의 성과를 특정한 몇몇 사람 또는 분파들이 전리품처럼 챙기면서 정치적 지위를 세습하고 있다. 저자는 이 같은 행태에 대해 그리고 386세대라는 명명법 자체가 노동을 실종시키고 대학생만 중심에 놓았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필이면 나는 그 해, 대학생이 된다. 대학생이 된 나는 지긋지긋한 입시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린다. 잘 읽지도 않는 『한국문학사』를 일부러 옆구리에 끼고, 갓 배우기 시작한 담배를 물고, 짐짓 심각한 척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 신입생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는 이런 낭만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책은 3부로 이뤄지고 있으며 각 부는 각각 ‘저항’, ‘전진’, ‘혼돈’이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 1990년, 2000년대 시기의 사건들과 저항들이 기록돼 있다.

    2년 3개월의 감옥 생활과 위장 취업

    1부는 저자가 대학교에 입학한 80년부터 10년 동안의 기록이다. 저자는 ‘철부지’ 20대에서 30대로 성장한다. 이 시기 동안 그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의 결과 2차례의 연행과 2년 3개월 동안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결국 학교를 떠나고 그 시절 적지 않은 대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장에 들어간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학생만 가지고는 안 되며,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현실 경험과 공부를 통해서 깨닫는다.

    감옥 생활과 이른바 ‘위장 취업’의 실상 등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재현되면서 그것들의 의미를 오늘의 입장에서 따져보기도 한다. 또한 화염병을 리어카에 실어 나르면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80년대는 87년 6월 시민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나, 야권의 분열로 군부 잔존 세력들의 수명이 연장되고 정치는 심각한 지역 균열구조를 낳았다. 이는 90년대의 진보정치 운동의 싹이 틀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 것이기도 했다.

    진보정치의 쓴 맛을 보다

    저자가 90년대를 ‘전진’의 시기로 명명한 것은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조직 노동자들의 전국 조직이 출범하고, 민중당 등 진보정치의 구심들이 태어나는 등 진보진영의 ‘전략적 진지’가 구축되던 시기라는 점을 중요하게 봤기 때문이다.

    90년 벽두는 전노협의 결성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주동이 된 ‘3당 야합’이라는 상징적 사건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이 시기 공장 생활을 접고 진보정치 운동 전선에 뛰어든다. ‘조직의 명령’으로 노동운동 메카인 울산으로 부부가 내려간다. 92년 백기완 대선 후보 선거운동을 하고, 실패를 경험하고, 실업자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노동운동, 진보정치 운동 내부의 논쟁과 균열의 실상도 함께 드러난다.

    진보정치의 ‘쓴 맛’을 본 저자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노동운동을 “돈을 받으면서” 하게 된다. 1993년 당시 전문노련이라는 사무전문직 노동조합에 ‘취직’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노동조합 운동에 결합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민주노총의 건설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바닥이 튼튼한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해 뛰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무대 위와 뒤의 얘기들이 소개되고 있다.

    저자는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지만, 자신의 입장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전문노련과 민주노총, 그리고 97년의 국민승리21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되고, 당시 활동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90년대는 96~97년 노동법 대투쟁으로 민주노조 운동이 강력한 사회의 민주화 세력으로 부상하는 시기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97년 IMF 이후 불어 닥친 경제 위기와 대규모 해고로 자본 쪽에서 노동을 향해 강한 역공을 해온 시기이기도 하다.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속살

    저자가 2000년대를 ‘혼돈’의 시대로 표현한 것은 노동운동의 부침과 진보정당 운동의 성공과 성공의 역설로 표현될 수 있는 끊임없는 분열, 그리고 그런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운 현재의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제는 내부 분열로 사라진 민주노동당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기대를 받으면서 2000년 3월에 창당됐다. 2000년대를 지나오면서 민주노총으로 파견돼 조직과 투쟁에 관한 실무책임자로서 역할을 하는 한편,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당 건설에도 깊숙하게 결합해서 활동한다.

    노동조합에서는 조직과 투쟁 부서(조직쟁의실)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저자가 회상하는 당시 경찰과 노조 사이의 투쟁에 대한 묘사는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으며, 이면의 스토리도 많이 소개하고 있다.

    민주노총에서 조직과 투쟁을 담당하는 실무 책임자로 지내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체험도 책 읽은 재미를 더해준다. 저자가 중심이 돼 경찰이 둘러싼 명동성당에 노동조합 지도부를 들여보낼 수 있었던 ‘비밀 작전’의 전모는, 이 책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음에 또 써먹을 수도 있는데, 만약 경찰이 이 책을 읽게 되면 그 방법을 알게 되기 때문이란다. 아쉽지만 말이 되는 이유다.

    또한 저자가 민주노동당이 분열되기 이전 4년 동안 중앙당 당기위원으로 일했던 시기의 여러 가지 사례들은 진보정당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해준다. 또한 자신이 특정 정파에 회원이었던 저자가 보는 정파에 대한 입장, 내부 갈등 등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역사적 기록 넘어 소통의 도구되기를

    분열과 갈등, 노동운동의 무력화와 고립화 등 2000년대에 들어서 크나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당장의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는 것이 위기의 핵심일 수도 있다.

    “감옥에 있을 때 컵라면 용기에 꽃씨를 심은 적이 있다. 단지 물만 주었을 뿐인데 어느 날 거기서 백리향의 새싹이 올라왔다. 신기하고 또 신기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꽃이 피리라는 낙관은 결코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 당장 지금의 상황은 비관적이지만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할 이유다. 2013년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저자가 책을 마치며 다지는 다짐이며, 묻는 질문이다.

    광주 세대와 촛불 세대의 대화가 이 책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졌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대화를 위한 소중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80년대를 청춘으로 살았고, 이제 청춘이 된 자녀들을 가진 사람들과 그 자녀들을 위한 『아빠의 현대사』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을 넘어 세대 간 소통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책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