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노동자의 구술생애사
    노동자와 대학생의 대화의 기록들
        2013년 04월 19일 10: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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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노동자 구술생애사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가을, 서울비정규노동센터 이류한승 선배가 뜬금없이 술이나 한잔 하자며 연락을 해왔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서 대학원 연구실에 콕 박혀 빨리 논문을 쓰고 졸업을 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편한 마음으로 나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선배가 조심스럽게 제안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청소경비노동조합이 결성된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 조합원들이 학생들과 한글, 컴퓨터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돌리는 작은 교실’(시작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함께 배운다는 의미에서 대학생과 조합원들이 “선생님-학생” 보단 서로를 “학강-강학”이라 부르며 만나고 있는데, 이 만남을 더 깊게 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단 것이다. 그래서 선배가 내게 제안한 것이 ‘대학청소노동자 구술생애사 모임’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가운 제안이었다.

    대학이라는 같은 장소를 공유하면서도 좀처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대학생과 청소경비노동자 사이다. 특히 대학 청소노동자들은 대학생들에게 ‘우리를 위해 헌신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거나 ‘돈 받고 당연히 할 일하는 이들’, 둘 중 하나이기 쉬웠다.

    헌신과 댓가로 당연히 일하는 지극히 당연한 존재들이 대학 청소노동자들이었다.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어떤 삶을 꿈꾸며,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아왔는지를 물을 필요가 없는 투명한 존재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매일 매일의 경험을 하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그들’은 어떤 대우를 받길 원하는지 듣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그들’의 삶을 자신의 삶에 초대하는 깊은 만남을 하고 싶다는 학생들이 구술생애사 모임에 많이 지원해줬다. 이 작업은 그러한 기대와 필요에 의해 시작되었다.

    구술생애사 모임에 지원해준 학생들은 우연히도 여러 변혁운동 언저리에서 막연한 선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운동과 자신의 일상 사이에 놓인 먼 거리를 느끼며 머뭇대던 이들이었다.

    학생들이 조합원들을 막상 만나니 조합을 만들고 농성을 하던 ‘가열찬 철의 노동자’의 이미지와 적잖이 달랐다. 오히려 ‘비오면 무릎이 쑤시고 4시가 되면 집안일 걱정에 집에 가야하는 노동자’에 가까웠다고 했다.

    인터뷰는 울퉁불퉁하고 때로 끊김이 있었으며 자주 어색했다. 평상시엔 “내 삶 이야기하면 책 한 권은 나오지”라던 분들도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니 “나 같은 사람 얘기가 뭔 의미가 있겠어”라며 부끄러워하고 피하려 했다.

    모임원 중에 한 명인 승연은 다섯 분에게 거절을 당한 끝에야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조합원들이 인터뷰를 허락했지만, 결국 시간이 맞추지 못해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한 팀도 있었다.

    구술생애사 연구자 윤택림에 따르면, 구술생애사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공동작업이다. 숨겨진 어떤 이야기를 고스란히 꺼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와 들려주는 이가 과거의 경험을 서로 능동적으로 해석해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연재할 다섯 팀의 구술생애사는 어떤 청소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어떤 대학생들의 위치도 함께 보여주는 기록이 될 것이다.

    학생들이 전문 연구자들이 아니어서 해석할 언어가 부족하고, 시간 등의 제약으로 충분히 두터운 기록이 되지는 못했다. 경우에 따라선 청년기의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이 흔들림과 어긋남 또한 ‘노학연대’를 여러 모로 새롭게 모색할 수 있는 기록으로 이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고맙겠다.  <백승덕 : 대학청소노동자 구술생애사 모임 간사,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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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이렇게 일하는 건, 빗자루밖에 몰라.“

    지난해 9월 출간된 책 <빗자루는 알고 있다>의 한 구절이 뇌리에 박혔다. 3명의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청소노동자들과 연대한 2000일간의 기록인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백양로의 풍경이 떠올랐다.

    ‘국내 최고 명문 사학’을 자부하는 학교를 상기해보면 분주한 학생들, 비교적 느긋한 교수들, 어리둥절한 방문객들을 비롯해 행정원, 식당 아주머니와 경비 아저씨, 생협 직원 등 캠퍼스 구석구석을 채운 사람들이 (거의) 다 생각나는데도 무언가 빼먹은 기분이 들곤 했다.

    휴학을 하느라 드문드문 학교를 찾았던 2011년 봄의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계속 그런 줄 알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2011년 봄, 오랜만에 방문한 학교의 모습은 처참했다. 화장실에서는 휴지를 헤치고 다녀야 했고, 오물은 변기로 부족해 화장실 바닥까지 채우기 시작했다. 눈은 괴로웠고, 냄새도 지독해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참다못해 쓰레기를 치우려는 몇몇 학생들을 학생회가 만류하고 나섰을 때, 빼먹은 공백을 빽빽이 채워온 이들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2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하루에 수백 번 오가는 화장실이 어느새 꼭 거짓말처럼 깨끗해지는 것은, 절반이 넘게 남은 커피가 담긴 채 버려진 일회용 컵이 종이류와 플라스틱류로 가지런히 분리수거 되는 것은, 짜증을 돋우던 교실 바닥의 껌 딱지나 길거리에 나뒹굴던 담배꽁초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마술의 힘 따위가 아니라는 건 한 번만 더 둘러보면 알 법한 것들이었다.

    한쪽에서 만들어내는 만큼 다른 쪽에서 치우고 있다는 건 자명했다. 생활임금 보장과 휴게실 개선, 원천사용자성 인정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그때야 들리기 시작한 것 같다.

    대학교 청소노동자의 한 모습(사진=공공운수노조 블로그)

    대학교 청소노동자의 한 모습(사진=공공운수노조 블로그)

    그러니까 지난 가을, “우리가 일하는 건 빗자루밖에 몰라”라는 청소노동자의 말을 책에서 보았을 때 흠칫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발길이 닿는 학교 모든 곳에 존재함에도 오직 빗자루만 그 존재를 아는 것이 학교 청소노동자들이었다.

    운동에 대한 막연한 선망, 그리고 구술생애사

    학교 청소노동자의 구술생애사 작업을 시작한 것은 연세대 백양관에서 있었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강연을 듣고, <빗자루는 알고 있다>를 읽은 지난 가을의 일이다.

    강연 참석 후 학내 청소·경비노동자와 함께 하는 ‘시간을 돌리는 작은 교실(시작교실)’의 한글교실 강학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 구술생애사 모집 글을 보고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함께하겠다고 신청서를 적어 냈다.

    첫모임 때, 왜 구술생애사를 하고 싶었느냐는 간사의 물음에 더듬대며 ‘운동에 대해 알고 싶었다’라는 궁색한 답변을 내놓았지만 사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운동, 노동자, 강학·학강, 노학연대 등 ‘개념’은 숱하게 들어왔지만 분명하게 알고 있는 바는 없었고 호기심과 두려움이 병존했다.

    양가적 감정은 경상도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동네인 창원에서 자라면서 보고 들은 것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외곽 지역에 공장이 많아 도청 앞에서는 파업이 잦았다. 택시기사건, 친척들이건, 어른들이 하는 말은 매한가지였다. “지금 이렇게 길이 막히는 게 다 귀족노조 파업 때문”이라는 것.

    출퇴근에 흔히 있는 교통정체였을 뿐인데도 어린 나는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커왔고, 민주노동당 소속 권영길이 경남 창원을 지역구로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나 노무현이 “두말없는 대통령 감”인 이회창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10대의 어린 아이였던 나는 어른들의 불안감에 이유 없이 동조하곤 했다.

    대학에 들어와 노동자들이나 운동하는 친구들을 접하면서 ‘노동’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은 사라졌고 오히려 운동에 대한 막연한 선망을 가지고 있었던 듯했다. 처음에는 좌-우, 노동-자본 따위의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친구들이 멋있고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보다 궁금해진 것은 최전선에 나서서 웅변은 하지 않지만 분명히 노동조합에 속해 있고, 파업에도 참여하는 노동자들이었다. 특히 청소·경비노동자와 같이 학교에서 늘 스치는 노동자들에게 눈길이 더 갔다.

    그마저도 처음에는 ‘약자’라는 이유로 동정 어린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점차 노동자로서, 또 노동의 공간을 벗어났을 때 하나의 인간으로서 개인이 거쳐 온 삶의 궤적이 궁금해졌다. 부끄럽게도 처음에는 그게 다였다. 구술생애사 작업의 이유와 의미는 도리어 작업을 진행하면서 윤곽이 분명해졌다.

    사전 공부를 했지만 막상 인터뷰이를 만났을 땐…

    ‘구술생애사’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작업은 시작됐다. 한 달 반 동안 윤택림 선생의 글과 클리어드 기어츠의 <문화의 해석>을 읽으며 공부했고, <빗자루는 알고 있다>도 함께 읽었다. 구술생애사란 무엇이며, 라포는 왜 필요한지, 어떤 질문을 해야 하며 우리는 무엇을 듣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를 했다.

    호칭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했다. 어머니보다는 나이가 많고 할머니보다는 젊은 청소노동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애매했다. 호칭의 문제는 늘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오빠’라는 말에 내재된 권력관계가 불편해 새내기 때도 남자 선배들을 꼭 ‘선배’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다.

    인터뷰이를 어떻게 부를지도 마찬가지의 문제였다. ‘어머니’라고 하려니 이들을 모성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느낌이었고, ‘학강’이라고 하려니 시작교실 강학은 아니지만 구술생애 작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결국 한계는 있을지라도 ‘조합원’이라 부르자고 결론이 났다.

    부족하게나마 준비를 하고 인터뷰이를 만나기 시작했음에도 실제 작업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통째로 들려달라고 하는 것은 묻는 사람에게도, 대답하는 사람에게도 막막한 일이었다. 문화인류학 전공 수업을 몇 번 들었기에 구술이라는 것이 책에서 보듯 술술 진행되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듯싶다.

    하지만 글로 배운 내용은 현장에서 그다지 효력이 있지 않았다. 조합원으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한 번도 만만했던 적이 없다.

    사실 한글교실 학강 중 한 분인 김영자(가명) 조합원을 설득하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기초 공부가 끝나가던 11월 중순, 한글 교실을 마치고 학강 한 분에게 무턱대고 부탁했다. 한 번도 담당 강학으로 같이 공부해 보지는 못했지만, 과묵하면서도 가장 부드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필자) 조합원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제가 구술생애사라는 것을 하는데요, 이게 조합원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거예요. 조합원님이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듣고 싶어서요.

    (김영자) 아니 그게 뭐여? 수업 때 쓰려고 그래?

    (필자) 아뇨, 학교 수업 같은 건 전혀 아니고요. 그냥 조합원님 사는 얘기 듣고 다른 강학들이랑 구술생애사 하는 친구들이랑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김영자) 뭐 어디 내고 그런 거 아니고?

    (필자) 네, 혹시 나중에 책자 같은 걸로 나와도 이름은 절대 안 밝힐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되요.

    (김영자) 아, 뭐 알았어. 근데 언제 하는 거여?

    (필자) 전 아무 때나 좋아요. 한글교실 전후로 해도 되고요, 조합원님 시간 편하실 때 조금씩 얘기 들려주시면 되요.

    (김영자) 이거(한글교실) 끝나면 늦어서 안 돼. 집에 가야지. 다른 날 해야겠는데…

    (필자) 네, 그러면 제가 조합원님 일하시는 공학관에 쉬는 시간에나 찾아갈게요.

    허술하다고 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그의 삶에서 무엇을 듣고 싶은지, 구술생애란 것이 무엇이며 왜 하고 있는지 사전에 생각해 보았음에도 입 밖으로 정리되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간단한 인사 외에는 말도 몇 번 나눠보지 않은 학강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더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깜깜한 건 당연했다. 그런데도 걱정했던 ‘설득’의 과정이 딱히 필요 없었다. 김영자 조합원이 흔쾌히 수락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힐 뻔 했다.

    대학 교정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러 다니는 노동자의 모습

    대학 교정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러 다니는 노동자의 모습

    첫 만남: 익숙해지기

    첫 만남은 11월 27일 화요일, 학교 공학원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학생들이 가장 북적대는 점심시간에 만난 조합원은 절대 내가 지갑을 열지 못하게 했다. 습관처럼 공학원의 간판 메뉴인 2800원짜리 순두부를 고르자 조합원은 한사코 3200원짜리 돈가스나 메밀국수와 같은 “더 맛있고 비싼” 음식을 고르라고 했다.

    다른 메뉴들에 비해 순두부가 정말로 일품이라 그렇다고 해도 믿지 않는 눈치이기에 순두부 두 그릇을 시켜 조합원님도 드셔보시라 했다.

    담당 강학도 아닌 내가 김영자 조합원에 대해 아는 바는 전무했다. 2년 가까이 한글교실에 몸담아 온 다른 강학이 흘려준 정보가 조금 있긴 했지만, 지극히 사적이고 파편적인 내용일 뿐이었다.

    무턱대고 인생사를 들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혀야 했다. 간사가 사전에 보내준 ‘사전 조사표’에 근거해서 기본적인 내용만 물어보았다.

    김영희 조합원은 1952년 출생으로, 전라남도 장흥 출신이다. 남편과는 일찍이 사별했고, 36세 딸(기혼)과 30세 아들(미혼)을 두고 있다. 아들은 소방업계에 종사하며 조합원과 북아현동에서 함께 살고 있다. 간단한 가족 관계나 인적 사항 같은 것만 물어보고 노동자나 노동조합에 관한 질문들로 옮겨갔다.

    (필자) 조합원님, 일하시는 곳은 어디에요?

    (조합원) 저, 1공대(제1공학관)여.

    (필자) 제가 문과라서 공대 쪽은 잘 몰라서요, 그게 중도(중앙도서관) 옆에 있는 거 맞죠?

    (조합원) 응, 거기 맞아.

    (필자) 그럼 거기서 계속 근무하신 거예요? 언제부터 하셨어요?

    (조합원) 2009년 2월부터 했어. 근데 중간에 나갔지.

    (필자) 어, 그럼 지금까지 계속하신 건 아니고요?

    (조합원) 응, 한 2년 정도 일하다가 나갔어. 그러다가 반장 언니가 소개시켜줘서 다시 들어왔어.

    (필자) 그땐 왜 나가게 되신 거예요?

    (조합원) 아, 친구랑 다툼이 있었는데 마음이 안 맞아서 내가 나갔어.

    (필자) 아… 친구 분은 지금도 계속 일하세요?

    (조합원) 아니. 아파가지고 죽었어. 나랑 동갑인데… 2년 전이야. 암에 걸려가지고… 이거 옆으로 절대 새나가면 안 돼. 우리는 꽁해도 풀어지는 성격인데, 걔는 잘 안 풀어지고 오래 가더라고… 그렇게 될라고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필자) 그랬구나…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겠어요.

    (조합원) 그렇지. 가끔씩 생각나고 그래.

    (필자) 저희 할머니가 정말 친하던 골목할머니가 계셨는데,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한 동네에 계셨는데, 지금은 아예 요양원에 계세요. 할머니가 적적해 하시더라고요.

    (조합원) 그렇지. 친한 친구가 그렇게 되면…

    어디 가서 말해선 절대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친구 얘기를 잇지도, 끝내지도 못하는 조합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다른 동료들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갔다.

    (필자) 지금 같이 공대에서 일하는 분들과는 친하세요?

    (조합원) 친하지, 12명이서…

    (필자) 공대는 커서 확실히 일하시는 분들도 많네요. 나잇대는 어떻게 되세요?

    (조합원) 뭐 다양해. 70대 언니도 있고, 그 언니가 제일 맏언니고. 58, 57, 56… 대충 그래.

    (필자) 여자들끼리 있으니까 휴게소에 모이면 재밌으시겠어요.

    (조합원) 재밌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 12명이서 떠들면.

    (필자) 근데 아까 2009년 2월부터 학교에서 일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이전에는 무슨 일 하셨어요?

    (조합원) 예전에는 뭐, 회사 좀 다니다가, 가정집 가서 일 좀 해주다가, 애 보는 일도 하고… 일 안 하고 좀 쉬면서 가사일도 하고…

    (필자) 저희 할머니도 애 보는 일 하셨어요. 지금도 그 동네 사는 애들은 가끔씩 할머니한테 인사하러 오더라고요.

    (조합원) 그래? 할머니랑 친한가 보네

    (필자) 네, 저희 할머니가 저는 6년 동안, 언니는 10년 동안 키워주셨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거든요.

    이후 만남에서도 할머니 이야기는 꽤 빈번히 등장했다. 조합원의 연배는 부모님 쪽에 보다 가까웠지만, 삶의 궤적은 오히려 할머니의 그것과 더 비슷했다.

    (필자) 조합원님, 그럼 학교 일하면 한 달에 얼마 정도 받으세요?

    (조합원) 한 106? 107? 아니다, 한 110정도 받는 것 같네.

    (필자) 학교에 노동조합이 있잖아요. 언제 가입하신 거예요?

    (조합원) 2010년쯤에 했을 거야. 한 2년 됐나.

    (필자) 조합에서 무슨 일을 맡으신 경험은 없고요?

    (조합원) 아니, 없어.

    (필자) 그럼 예전에 노조에 가입하신 적 있나요?

    (조합원) 아니, 그럴 일이 없었지. 가정일 하고 했으니까. 이게 처음이여.

    첫 만남은 간결한 내용만 받아 적으며 끝났다. 물음표가 놓이는 곳이 몇 군데 보였다. 함께 사는 아들이나 멀리 있다는 딸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했고, 학교에서 일하게 된 사연이나 노동조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가사도우미, 공장, 학교까지 여러 일을 하게 된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계속>

    필자소개
    정치외교를 공부하는 대학생 / 대학 입학 후 학내 언론 에서 활동하다가, 졸업을 코앞에 두고 학교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시작교실'의 한글교실에 합류. 숙독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강연 참관을 계기로 구술생애사 작업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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