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태워버렸어...
    이젠 내 몸 하나만 태우면 돼"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11]마지막회....할머니의 남은 생애도 강건하기를.
        2013년 04월 18일 11: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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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한번째 게재를 끝으로 ‘평양출신 할머니의 구술사’를 마친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 몸으로 겪으시고 또 여성이자 평양 출신이라는 점도 당신의 삶을 더 고단하고 힘들게 했던 요인이었다. 그래도 생활력과 꿋꿋함으로 그 고단함을 헤쳐나온 당당한 삶이기도 하다. 더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최현숙 선생의 구술사 이야기는 평양 출신 할머니 외에 몇분의 삶에 대한 구술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일독을 권한다. 게재를 허락해주신 최현숙 선생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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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 생활 / 나 평생 사는 거를 지켜봐준 하나님

    교회는 평양서 10년을 다닌 거구, 이남 와서는 못 다니다가 육십에 미국집 파출부 다니기 전 언제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거지. 저기 충신동에 셋방 살 때 건너방에 세 살던 여자 하나가 미국집에 먹구 자구 들어가서 식모로 있었거든.

    힘들게 맥주 궤짝 들고 왔다 갔다 하지 말구 미국집 소개 해 줄테니 속 편하게 일하라는 거지. 그 친구가 소개해 줘서 미국 집을 다니게 된 거야. 그리고 그 친구가 그전부터 강남의 충현교회를 다녔었구 나더러두 가자 그래서 같이 다니기 시작했지.

    (필자) 그 충현교회 같이 다닌 분하고는 지금도 연락을 하고 사셔요?

    (김미숙) 아냐~. 그 사람이 이사가면서 끊겼나 내가 이 집으루 이사들어오면서 끊겼나? 내가 본래 사람들하고 안 친해. 그저 만나고 살 때나 만나지 안 만나게 되면 머 그루구 말어. 찾지도 않구.

    충현교회는 이남에서 제일 크구 부자 교회였어. 그 교회를 내가 한 30년을 다닌 거야. 그 교회를 20년 전에 백오십억을 들여서 새로 지었어. 내가 지금 다니는 저 옆에 교회는 4억을 들여서 다시 짓는대나 어쩐대나.

    백오십억 들일 때도 나는 건축헌금을 한 푼도 못줬어. 지금도 마찬가지구. 아들 목사 만들어 바치느라 돈 들어간 걸루 내 혼자 생각으로 퉁친거야. 근데 내가 평양서 다닌던 교회도 장로교구 30년 다닌 충현교회도 장로굔데 지금 다니는 저 교회는 감리교야.

    그래서 그런가 그 교회가 나한테는 안맞어. 머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여엉 안맞어. 설교도 귀에 안들어오고, 전도사네 애기가 하두 이뻐서 설교도 안 듣구 만날 그 애기만 쳐다봤었는데 그 전도사도 다른 데로 가버려서 이젠 더 갈 맘이 안나. 가까워서 그냥 다니는 건데….

    교회구 하나님이구 그런 거는, 어려서 다닐 때는 몰랐는데 혼자 힘들게 살면서는 그저 의지가 되더라구. 누가 나 힘든 거를 봐주구 있구나….그런 생각인가봐. 잘 살게 해달라구 빌어본 적두 없구. 내가 머 해달라구 빌은 거는 아들 목사 만들어 달라구 빈 거 말구는 없어.

    그거 하나 빌었는데 그게 이루어졌으니 멀 더 달라구 빌어? 지네들 하나님은 어쩐가 몰라도, 내 하나님은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란지는 나는 모르겠고, 나한테 하나님은 그냥 누가 내 평생을 지켜봐준 그거야, 그 분이 내게는 하나님이야. 누가 나를 지켜 봐 준 덕에 내가 그 험한 세상을 이렇게라도 살았구나 싶어서 감사한 거지.(삶의 과정에서 많은 남자들과의 관계와 갈등과 협상을 거치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상당 정도 벗어나는 과정에서 “목사외아들“이라는 가부장을 거부하고 “하나님“으로 내세워지는 교회의 가부장적 전통 신앙과도 상당 정도 결별한 모습이라 하겠다.)

    유일한 친구인 평양서 함께 나온 친구

    평양서 같이 내려 온 그 친구년 말야, 만주 그 지질이 박색 못난 남자하구 결혼 했다구 했잖아. 그 남자도 평생 벌이를 제대로 못해서 우리 친구 년이 남대문 시장 나가서 “딸라 있어요, 딸라 있어요.” 하는 그 딸라 장사를 하구 살았어.

    딸 둘 아들 하나 삼남매에 시어머니 저, 그렇게 여섯 식구를 제대로 못 먹일 정도로 못 벌었대. 내가 돈을 버는 대로 당장 쓸 거만 남기고는 모두 그 여자한테 맡겼었어. 빨갱이들이 쳐들어오면 은행부터 달아나자나, 저기 부산으루 어디루 달아나더라구, 육이오 때 보니까.

    그러니 내가 거기까지 어떻게 쫓아가? 은행 못 믿으니 이남에 아는 사람두 없구, 그년한테 맡긴 거지. 한때 미군들이랑 살림할 때랑 그러면서 피엑스 물건 무지하게 빼돌려서 장사하면서 그때 내가 돈을 많이 벌었거든. 그 돈을 다 그년한테 맡긴거야. 그년이 화폐개혁 되기 전 돈으로 내 돈 백만원을 떼먹었어.

    평양서 같이 넘어온 친구라서 서로 둘밖에 없는 사인데, 그년이 그럴 줄을 몰랐지. 내 돈으루 그 식구들 먹구 산 거지. 내가 돈을 버는 대로 주면서 모아서 집을 하나 사달라구 그랬어. 내가 준 돈으로 그 년이 이 집을 이십이만원에 샀대. 근데 나중에 저쪽에 있던 방 하나를 전세 내보낼 때 보니까 아 글쎄 삼십삼만원을 보증금을 내구 전세를 살았대는 거야. 이십 이만원에 산 집 방 하나 전세 보증금이 삼십삼만원이 말이돼?

    내가 이 집을 사서 내가 잠깐씩 살기도 했지만, 11년을 꽁짜로 그년한테 살라 그랬어. 되배며 장판이며를 때 되면 다 십원 한 장 안받구 갈아주구. 집도 관리라구 내가 맡기는 돈이랑 물건들도 맡아놓으라고 한거지. 근데 그년이 내 돈을 해먹은 거야.

    이만한 고리짝에다가 돈도 넣어놓구 그 때로는 구경하기도 힘든 미제 메리야쓰니 삼각 빤스도 넣어 놓구 해서 맡겨 놨었어. 삼각 빤스는 월화수목금토 그렇게 다 세트루 있는 거였어. 옷이니 옷감이니 라디오니 모두 맡겨놨는데 그년이 다 떼먹은 거지.

    라디오는 머 내려쳐서 깨먹었대나 어쨌대나. 고리짝 속에 넣어놓은 라디오가 어떻게 기어나와서 떨어져 깨지냐구 글쎄. 내가 그 때 그 년네 내보내면서 딱 절교를 하고는 안 보기 시작한 거야. 발 끊었어. 그르구는 한번두 안 봤어. 난 또 승질이, 한번 안 본다면 그걸루 딱 끝이거든. 그러다가 머 위암으루 죽었대나 하는 소리를 들었어. 그래두 안 가봤어.

    북쪽 가족 소식은 들은 적이 없어. 평양 같은 동네서 살던 사람 하나를 서울서 만났었는데, 누가 죽었는지 우리 오빠가 상복을 입고 있더란 말을 들었어.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든가 했겠지.

    너무 오래 살다보니까 다 가뻐리고 이제는 아는 사람이 없어. 오래 사는 것도 죄야. 이산가족 상봉은 신청해보지도 않았어. 다 죽었을텐데 신청할 게 없지. 조카들이나 있을지 몰라두, 잘 알지두 못할 사람들이구.

    (필자) 어르신 시댁쪽 사람들하고도 연락 안 하고 사셨던거에요?

    (김미숙) 당연하지~ 연락 하구말게 머 있어? 우리 아들 그 큰집에서 더 못맡겠다고 해서 열한살 때 데리구 나와서는 더 볼 일이 없었어. 큰집 애들두 줄줄이 있었으니 결혼이랑 하구 했을텐데, 거기서 연락 온 것도 없구, 나두 우리 아들 장가 갈 때구 목사 될 때구 연락 안했어.

    한번 끊으면 그저 나는 끝이야. 머 아쉬울 것도 없구. 나보다 윗사람들이야 머 다 죽었겠지, 언제 뒈졌는지도 알게 머야? 아들도 머 가잔 소리도 않구. 저두 어렸을 때 기억이 안좋아서 그런지 가잔 말두 안하고.

    나라가 해준 게 머가 있다고, 평생 모은 거를 뺐어가냐구?

    내가 생활보호자 그게 됐어. 그래서 돈이 좀 나와. 집에서 나오는 돈은 가게 세 삼십만원이 다야. 이층 전세보증금 천오백, 그거는 빚이구. 이 집이 다 짤려나가구 다섯평두 안되는 데 다섯평으루 치고 싯가가 오천만원이야. 건물 값은 안치고 땅만 평당 천만원인거지.

    원래는 스물 한 평짜리 집인데 칠십구년도에 저 길 내면서 사분지 삼이 짤려 나갔어. 보상금이라고 오백 이십만원인가 주더라구. 그루구는 새로 고쳐짓는 데만 칠백이 들어갔어. 그게 말이 돼? 그 때 진 빚을 작년에야 겨우 다 갚았어. 그 때 시세가 평당 칠십만원인데 반도 안쳐준 거지. 길루 한 십칠평이 나갔어.

    무악동 재개발 예정지구의 자료사진

    무악동 재개발 예정지구의 자료사진

    그대로 있었으면 지금 일억 오천은 되는 건데, 나는 왜 그렇게 돈 재수가 없나 몰라. 큰돈 한번 만져보지를 못하고 평생 몸땡이로 일해서 겨우겨우 먹고 살은 거야. 그러니 내가 참구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 내가 이 집을 어떻게 산 건데. 이 집은 나한테는 내 고생해서 살아온 열매구, 죽을 때까지 살아갈 밑천이잖아. 그루구 그냥 재신이나 돈이나 그런 것만이 아니야.

    맻년전에 아들네 살러갔다 돌아올 때도 말했지만, 이 집은 내가 만든 내 천국이야. 그런데 국가가 이걸 뺏어간 거지, 사분지 삼을. 그래서 내가 구청을 밤낮으로 쫓아가서 평생 모은 내 땅 내 집 다 가져갔으니 나를 생활보호자로 만들어 달라고 떼를 떼를 쓴거야.

    집이 있네 아들이 있네 하며, 법이 어떻구 해서 안 된다구 천날만날 그러더라구. 그건 지네 법이구 나는 너무 억울해서 못 살겠는데 어떡케? ‘아들이 있어도 개척교회 목사여서 내가 돈을 계속 대줘야할 판이구, 집세라도 받을랬더니 니네가 길 낸다구 내 집 내 땅 사분지 삼을 다 가져갔으니, 머가 어쨌든 나를 생활보호자를 만들어라’, ‘안그러면 내 집 원래대루 해서 다시 내놔라.’ 하구 밥만 먹으면 구청가서 악을 쓰구 그랬어.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머있다구 내 평생 모은 재산을 사분지 삼이나 뺏어가냐구?’ 소리 소리 질렀어. 내가 그럴 권리는 있는거 아냐? 몰라~, 법이 어떤지는. 근데 생각해보니 정말 억울하구 부아가 나더라구.

    그래 가지구 내가 생활보호자(생활보호대상자, 국민기초생활 수급 대상자)가 된거야. 어쨌든 그 돈이라두 나오구 이런 거지같은 집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아들이 거지같은 집 안 갖는 대니 다행이지 머야.

    팔년 동안 아들 등록금 낼 때마다 전세 올려서 겨우겨우 공부시키고 했어. 등록금 낼 때마다 뼈 빠졌어. 저 위층 전세가 이백에서 시작해서 지금 천오백이 된 거지. 파출부 다녀봐야 밥 먹기만도 벅찬데 그걸루 어떻게 그 비싼 등록금을 대겠어.

    일주일에 세 번 나가서 하루 아홉시간을 일하고 주당 삼만 구천원(일당 만삼천원)을 받으면, 버스비 빼고 쌀 4키로 사고 콩나물 사면 끝이야. 지금은 여자들도 하루만 일해도 쌀 이십키로 더 사잖아. 그러니 시골 사람들이 농사 안 짓겠대는 거지. 그땐 품삯도 쌌었지만 쌀값이 너무 비쌌던 거야. 여지껏 다른 물가는 다 오르는데 쌀값만 안 오른 거지. 지금은 쌀값이 너무 싼 거야.

    2013년 1월 5일 낮, 할머니의 안부와 근황도 묻고 추가 질문들도 있고 하여 할머니를 다시 방문하였다. 독한 추위가 계속 되던 중의 소한 날이었고, 낮부터 날씨는 좀 풀리고 있었다.

    미리 전화를 드려 약속을 잡고 간 것이었다. 전화 때는 이야기를 안하시더니 도착하고 나니, 사실 오늘은 겨울 코트를 하나 사러 가실 참이라고 하셨다. 옷 많은데 또 사시냐고 하니, 겨울 옷 들어가는 요 때 즈음에 저 앞에 평화시장 가면 싸다시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요양보호사 데리고 가보시겠다고 한다. 옷 욕심은 여전하시다.

    (필자) “대한이 소한보고 놀라서 도망간다.”고 하던데 그래도 오늘은 좀 덜 춥네요.

    (김미숙) 그게 아니구 “대한이 소한집 놀러 갔다 얼어죽었대.”는 거야~

    (필자) 독감 예방주사는 챙겨 맞으시는 거지요? 벌써 2년 가까이 만에 뵙는데, 아주 얼굴이 그대로시네. 더 건강해뵈구, 아까 전화 목소리도 아주 밝고 씽씽하시더라구요.

    (김미숙) 그래? 내가 전에는 일년에 보약을 두 번을 먹었는데, 이젠 늙어서 기운없다고 한약방에서 네 번을 먹으라고 해서 보약을 네 번을 먹어. 그러니까 식욕도 괜찮고 감기도 잘 안걸리는 거 같아.

    할머니는 내 얼굴은 잊고 있었지만, 언젠가 누군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며 살아온 이야기를 한동안 묻고 녹음하고 기록해 갔다는 사실은 다행히 기억하고 계셨다.

    더구나 내가 할머니를 방문요양 하면서 도시가스비며 전기요금을 십프로 덜 나오게 신청해준 사람이라고 하니, “그래? 누가 해준지는 모르지만 보니까 요금이 좀 깍여 나오기는 하더라구. 내가 고지서 나오면 일일이 보거든. 그게 댁이 해 준거구나.” 하시며 생면부지의 얼굴로 보이셨을 수도 있는 나에 대해 금방 친근감을 보이시면서, 지금 오고 있는 요양보호사에 대한 불만을 한바탕 늘어놓으셨다. 그날 들은 이야기들 중 일부는 원래의 글들에 추가하고 수정하여 편집하며 일부는 여기에 담는다.

    (필자) 복지관[종로노인종합복지관] 다니시는 건 여전하시지요?

    (김미숙) 머 바로 뒤니까, 매일 점심을 거기 가서 먹지. 난 공짜야, 수급자니까. 목욕도 일주일에 한번씩 거기 가서 공짜루 하구.

    (필자) 전에 거기서 산수도 배우셨었잖아요. 곱하기 하구 나누기를 저랑 복습도 하고 그랬었는데.

    (김미숙) 내가 곱하기까지는 아쉽잖게 배운 걸 써먹구 살거든. 구구단을 한국말로는 못외어두 일본말루 다 외우니, 곱하기두 안 불편하구. 근데 나누기가 여엉 헷갈려. 그걸 배우다가 열세살에 야학을 때려쳤거든.

    그래서 그걸 배울라구 산수공부 반을 다녔었는데 숫자가 커지면 도저히 안 되는거야. 그 나누기가 배울 때야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 싶은데, 돌아서면 또 여엉 모르는 거지. 아무리 배워볼려구 해두 발전이 없어서 때려쳤어. 글구 머 이 나이에 나누기 하구 살 일이야 별로 없잖아. 더하기 빼기 곱하기만 잘해두 나누기 대신 계산두 되구.

    종로노인복지관의 한 모습

    종로노인복지관의 한 모습

    (필자) 물리치료니 침이니도 해주던데, 운동삼아 소일삼아 시간 챙겨서 다니시지?

    (김미숙) 그걸 다녀봤는데 여엉 병원에서 하는 거랑 달라. 효과가 없는 거야. 병원에서 천오백원 내고 하면 아주 가뿐하구 시원하구 그랬는데, 복지관은 공짜여서 그런지 여엉 신통치도 않구 노인네들도 많구. 그래서 그건 안해. 저엉 찌뿌득하면 한의원가서 침을 맞지. 천오백원만 내면 되니까 비싸지도 않구.

    (필자) 아들 며느님도 잘 계시지요? 지난 추석에랑 왔다 가셨겠네.

    (김미숙) 잘 있기는 머….일년에 딱 두 번 와. 재작년엔 왜 그랬는지 세 번을 왔었거든~ 그러더니 지난 추석에는 안 오구 전화만 왔어. 그래서 내가 엔간히 답답하구 돈 없으니 못오나부다 해서 옷해 입으라고 돈 좀 줬지.

    (필자) 아구~ 잘하셨네. 그래두 그 아들며느리가 사람들이 좋으시더라구요. 둘다 목사하느라 돈이야 못벌지만, 그래두 성품들이 성실하구 그러시겠던데. 전에 저두 두 분다 뵜었거든요. 며느리가 성격이 남의 비유 맞추구 아양떨구 그런 걸 못해서 좀 차가워 보여두 그런 사람이 또 확실한 거잖아. 어머니랑 며느님이랑 성격이 비슷하네 머~

    (김미숙) 그게 하두 잘난체를 하구 사람을 무시하니까 그렇지, 머 내가 상관할 바야 머있어? 지넨 지네가 알아서 살면 되지. 아 근데 지난 번에 아들이 와서 손을 내밀더라구. 그 교회마저 닫아버린거야. 성남 재개발 머에 걸려서 교회를 헐어야 하는데 겨우 삼백만원을 받은 거야. 그게 원래 사글세였거든.

    그러니 머 갈 데가 어딨어? 지하 방같지도 않은 데를 얻어서 수리하는 데만 이백만원이 들어가구 교회도 못하구 하니, 살 길이 깝깝한 거지. 그런다구 지네가 나한테 손을 내밀러 와? 내가 딱 모르는 채 하구 오만원만 줬더니, 아들은 암말두 안쿠 그냥 가던데, 며느리년이 나중에 전화를 해서 지랄을 하더라구. “우리가 무슨 거지냐? 단돈 오만원짜리 한 장 들려서 보내느냐?” 그러는거지.

    그래서 “나는 열네살부터 돈벌기 시작해서 안해본 거 없이 다하구 살구, 아들 공부시켜 목사 만들었다. 직업에 귀천없으니 목사 못하게 됐으면 아뭇~꺼라도 해서 먹고 살아라. 아파트 경비도 70만원은 받는대더라.“ 하구 소리를 질렀어. 그랬더니 그년이 ”박목사도 이제 육십 다섯이에요.“ 하구 또 소리를 지러더라구. 그래서 내가 ”난 일흔이 다 되도록까지 돈을 벌었다.“ 그랬지.

    (필자) 아이구, 원래도 힘든 교회였는데 게나마 문을 닫게 됐으니 깝깝하구 힘들기는 하겠네. 그래도 머든 자기네 힘으로 살 생각을 해야지…. 이 집 가지구 “그따위 집 안받을라니까 걱정 말고 엄마 맘대로 하쇼!” 했다더니, 이제는 이 집 생각이 좀 간절하겠네요.

    (김미숙) 그러게 말야. 나 언제죽나…..하고 있을거야. 나 죽고나면 이거 팔아서 지네 맘대로 하겠지.

    (필자) 어르신, 아무리 힘들고 안돼 보여도, 이 집 먼저 줘버리면 절대 안돼요. 그럼 어르신은 그날 당장부터 천덕꾸러기 되는거야. 두 양반이 사람이 나쁘다는 게 아니구, 요즘 노인네들이 다 그렇다니까. 집 등기는 절대로 끝까지 쥐고 계셔요. 그래서 방세도 받아, 드시고 싶은 거 드시고 사시고 싶은 옷도 사시고 해요.

    그러다가 어르신 가시면 그 다음이야 머 지네가 알아서 와서 살든 팔아서 교회를 하든, 지네 일이고 지네 복인거구, 아셨죠?

    자식 안됐다고 먼저 집 넘겨준 어르신들 보면 다 천덕꾸러기 되셨거나, 아직 몸도 성하신데 요양원 보냈거나, 그렇더라구. 나중에 저엉 몸 안좋으시면 요양원 들어가시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지금은 절대로 아니에요. 어르신, 제 말 명심하셔요. 제가 어르신들 많이 보고 살잖아요. 이 집을 어르신이 어떻게 장만한 건데….. 저엉 안됐으면 돈을 얼마를 보내주더라도 집은 절대 안돼요. 아셨죠? 정말이에요, 어르신~

    (김미숙) 안줘~, 절대로 안줘~.

    어르신 살아오신 삶을 아니, 공연히 내가 애가 달아서 집만은 먼저 줘버리면 안된다며, 다짐을 받아놓고 싶었다. 생판 남인 나한테 하는 다짐이 얼마나 효력이 있는 지야 모를 일이지만….

    (김미숙) 아니 그 놈은 닮을래면 생긴 거는 지 애비 닮고 생활력은 나를 닮았어야 하는 데, 완전히 거꾸로라니깐. 지애비가 애편쟁이에 게을러 빠졌더라도 생긴 거는 아주 잘 생겼었거든. 노래도 남진 나훈아 저리가라 하거 목청두 좋았고.

    근데 그 놈이 생긴 거랑 목청이 나를 닮아서 여엉 별루야. 글구 평생 돈 버는 것하구는 상관이 없이 사니 그건 딱 지애비 닮은거지. 지난 번 왔을 때는 지애비 사진 요만~한 거 하나를 갖고 있다드만 그걸 커다랗게 해서는 저기 내 영정 사진 옆에다가 걸어놓드라구.

    그래서 내가 “그 얼어죽을 옛날 사진은 버리지도 않구 왜 그거다 붙여놓느냐?”구 “당장 떼가라.“구 난리를 쳤드니 그 길로 떼드니 저희 집으로 가져갔는지 어쨌는지.

    그래두 지는 애비니까 그립고 그런 거가 있겠지만, 나는 아녀. 절대 아녀. 꿈에라도 다시 안보고 싶다니깐. 그 애편쟁이가 사람 노릇 못하다가 피난 갔다오니 약을 먹구 자살을 했었잖아. 그러구는 한참을 꿈에 보이더라구. 그래서 ‘내가 얨병할 놈의 새끼 머하러 꿈에 나오냐’구 이불 밑에다 식칼을 너놓구 잤어. 그랬더니 안나오드만.

    (필자) 아드님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구 어떻게 죽었는지 아시는가요?

    (김미숙) 저 네 살 때 일이니 어떻게 죽었냐는 모를테구 지 아버지 어떤 지는 어느 만큼을 알거여. 어른들한테 들은 게 있을테니. 모르지 자살해서 죽은 것도 누가 말했을라나? 나는 말 안했어, 그거는.

    내 사진이라고는 딱 저거 하나야. 내가 영정사진 할라고 일부러 찍은거지. 근데 그 옆에다 왜 그 얨병할 놈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느냐구 글쎄….

    (필자) 아니 여든 여덟을 넘겨도 이렇게 쌩쌩한 분이 아직 가실려면 한참인데, 나중에 육십 다섯때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면 그건 사기 영정사진이겠네요.(함께 웃음) 그래도 좋아요, 어르신. 저걸로 쓰셔. 영정사진이야 어르신 맘대로 골라야지. 근데 저거 말고 다른 사진은 없으시다고?

    (김미숙) 아 벌어먹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사진찍을 돈이 어딨었겠어?

    (필자) 그래도 미군부대 근처에서 댄서도 하고 양키물건 장사로 돈도 잘 버실 때 사진 찍어놓은 거 없어요?

    (김미숙) 없어~. 몇 개 있던 것도 아들 목사공부하고 나 기도하러 다닐 때 다 없앴고. 나 죽으면 남들 손에 태워질거잖아. 그래서 내 손으로 다 태웠어. 이젠 내 몸 하나만 태우면 돼….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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