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만과 광폭의 빗속에서,
    벌 서고 계신 신부님께
    [작가들, 제주와 연애하다-23]"아프지 마세요, 이 땅에 진짜 봄이 올 때까지"
        2013년 04월 17일 02: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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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연재 글을 모은 책 <그대,강정>(북멘토 펴냄)이 출간되었습니다. 4.3 항쟁을 염두에 두고 4월 3일 출간한 <그대, 강정>은 ’43인의 작가’와 ’7인의 사진가’가 참여했습니다. 오로지 강정을 향해 쓴 연애편지 모음집인 <그대, 강정>의 인세 전액은 ‘제주 팸플릿 운동’과 강정 평화 활동에 쓰이게 됩니다.

    제주 도민들에게 강정마을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작가들의 편지 연재는 처음 조정 시인이 제안하고, ‘제주 팸플릿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제주 팸플릿 운동’은 여기에서 연대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언어로 세상을 물들이고 싶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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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님, 며칠 전 서울에도 봄비가 내렸습니다. 봄비, 봄비라고 말만 해도 저는 설렙니다.

    어린 날 고향에서 여섯 가족이 몸 부비며 살 때, 비가 오면 온 집안이 활기를 띠었지요. 연못의 개구리는 울어대고, 마당에 내놓은 양동이에는 빗소리가 찰방찰방 고여 경쾌한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빗소리는 생명이 움트는 소리였고, 목마른 목숨들이 꼴깍꼴깍 해갈하는 소리였고, 고단한 겨울을 지나 새로운 계절로 한 발 건너가는 소리기도 했습니다.

    지난 겨울은 얼마나 길었던가요, 얼마나 추웠던가요. 강정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도 봄이 닿았으면 좋겠다는 저의 바람은 언제쯤 이뤄질까요.

    신부님을 먼발치에서 처음 뵈었던 것은 2003년 4월, 광화문에서 효순·미선 사건 규탄집회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효순·미선 양의 죽음에 치를 떨며, 원룸에서 홀로 맞는 밤에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습니다. 괴물보다 무서운 건 수치심을 모르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이를 꽉 깨물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몇 번이나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평택 대추리 집회 현장에서, 용산 남일당에서, 4대강 개발 사업 저지를 위한 시국미사가 있던 명동성당에서도……, 신부님은 원래부터 거기 사람이었던 것처럼 계셨지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 현장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국토순례를 하고, 때로는 투쟁기금 마련을 위해 고등어를 팔고 젓갈을 팔기도 하시던 신부님…….

    문정현 신부님의 모습(사진=gyuhang.net/2370)

    문정현 신부님의 모습(사진=gyuhang.net/2370)

    작년 봄엔 강정항 방파제 트라이포트에서 추락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7월에는 강정으로 이사하고 강정 주민이 되셨다는 소식을, 11월엔 제주해군기지 예산 삭감을 위한 1인 시위를 하셨다는 뉴스도 들었습니다. 올해 1월 열린 용산참사 4주기 추모대회에서 “함께 살자”고 힘주어 말하는 신부님의 모습도 지면을 통해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늘 비 내리는 한가운데에 계셨지요. 빗속에 선 사람에게 우산 하나 내미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음으로써 기꺼이 고통을 함께 하셨지요.

    지금 이 비는 생명을 살리고, 숨을 틔우는 비가 아니라 폭력과 살육을 부르는 공포의 비입니다. 그 무지막지한 빗줄기에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었고, 아름다운 올레길이, 붉은발말똥게와 연산호 군락지도 파괴되고 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심장은 비바람에 갈가리 찢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그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방패막이를 하고 계십니다.

    “누구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지역이든 거기에 빼앗기고 쫓겨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있겠다, 이게 복음적인 거야. 이 복음적인 삶에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는 것은 그냥 하기 싫다는 말하고 똑같은 거야.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에 무슨 조건이 필요해. 예수님께서 즉시 물으시잖아. ‘누가 너의 이웃이냐?’고 말이야.” -격월간『공동선』(2012년 11~12월호) 인터뷰에서.

    신부님의 행보를 접하며, 우울하고 침통한 대한민국 현대사를 직면하며 저는 톨스토이의 『부활』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백 년 전 톨스토이가 꿈꾸었던 그 세상을, 신부님은 여기 이 자리에서 몸소 실천하고 계시지요. 비 맞고 계시지요. 눈물 흘리고 계시지요. 오로지 ‘생명평화’를 위해서 말예요.

    신부님, 고백하건대 저는 강정에 가고 싶습니다. 오래전 장정일 시인이 “메마른 모래를 양식으로 힘을 기르며/다시 강정의 문 열고 그리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우리는 이렇게 끈끈한 강바람으로 소리쳐 울어야 하겠지/어쨌거나 지금은 행복한 얼굴로 사람들이 모두 강정 간다”라고 썼던 낙동강 변두리의 그 ‘강정’처럼, 물이 흐르고 사람이 흐르는 제주 ‘강정’에 사무치게 가고 싶습니다.

    신부님, 얼마나 더 소리쳐 울어야 우리는 평화로 갈 수 있나요. 총성 없는 전쟁은 언제 끝날까요. 폭력과 야만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 평화로 ‘부활’하는 그날은 언제일까요.

    노란 깃발 대신 이불을 담장에 널고, 철조망과 경찰 대신 연산호 군락과 붉은발말똥게가 어깨 끼는 예전 그대로의 강정을 보고 싶습니다. 평범과 일상을 회복하는 강정에 가고 싶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논으로, 물질을 하는 사람은 바다로 가고, 신부님은 더 이상 굶지도 감옥에 잡혀가지도 않는 평화의 날을 꿈꿉니다.

    지은 죄도 없이 내내 벌만 서고 계시는 신부님! 감기 드시면 안 돼요, 아프시면 안 돼요. 제발……, 이 땅에 진짜 봄이 올 때까지요.

    김은경 : 시인.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 『불량 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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