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파도에 실종된 여인들-1
    [오래된 서울] 여간첩(?) 김수임과 '사슴'의 시인 노천명
        2013년 04월 17일 11: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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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서울>(최종현, 김창희 지음/ 디자인커서 출판)이라는 책이 있다. 한국의 도시와 취락 역사를 필생의 연구 분야로 설정하고 전국을 발로 뛰며 눈에 담고 기록으로 남겨온 최종현 전 한양대 교수와 동아일보 국제부장, 프레시안 편집국장을 거친 김창희의 공동 저작이다. 두 사람이 서울이 얼마나 깊고 넓은 여러 층위들을 포괄하고 있는지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앵글로, 그 서울의 원형을 추적하는 책이다. 이 책에는 서울의 어떤 흔적들과 인연을 깊게 남긴 사람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여간첩’이라는 오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김수임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어’로 시작되는 <사슴>의 시인 노천명, 그리고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다 사라진 현 앨리스’라는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사연과 얘기를 <오래된 서울> 저자인 김창희 선생과 디자인커서 대표인 박강호 선생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글에서 언급되는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별칭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뜻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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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촌에서 역사의 파도에 실종된 여인들

    서촌에 해방의 날이 왔을 때 새로이 이 동네로 찾아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제각기 자기 역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개 지식인으로서 서촌에 들어왔고, 지식인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역사의 구비에 휩쓸렸다.

    그 중에서도 몇몇 여성이 눈에 띈다. 이들은 앞서 살펴본 이여성-이쾌대 형제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해방 후 갈피를 잡기 어렵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몸부림치다 결국은 역사가 그들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아 스러져갔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적극적으로 자기 기록을 남기지 않아 생각과 활동의 궤적을 정확하게 복원하기가 쉽지 않다.

    그 시절에 중심을 잡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어디 이들뿐일까. 한반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 맞은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역사의 간지(奸智)’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사람이 역사를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기도 하는 법이다. 이들은 아마도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직 그 실종의 진상은 대부분 미제(未濟)다.

    종달새, 노래를 잃다

    해방 직후인 1945년 가을의 어느 날 서촌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옥인동 19번지 이완용이 살던 바로 그 집이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의 적산(敵産)으로 징발한 이 집은 곧바로 분할되어 미군 군속들에게 분양되었는데, 그 중의 일부를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와 당시 미군정의 통역으로 일하던 김수임(1911~50)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김수임-1

    김수임

     

    그녀가 비록 미군 관계기관에서 일하고 있긴 했지만 직접 이 집을 구했던 것은 아니고 당시 미군정 헌병사령관이던 존 E. 베어드 대령이 주선해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함께 살 집으로 마련해준 것이었다.

    김수임은 이화여전 시절의 동료 모윤숙이 미군 상대의 사교클럽으로 조직한 낙랑클럽의 주요 멤버로서 ‘종달새’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어떤 장소에서든 웃음을 한 바가지씩 들고 나오는 여자’였다. 그에게 매력을 느낀 베어드 대령이 끈질긴 구애 끝에 이 옥인동 집에 김수임과 함께 살림을 차리게 된 것이었다. 해방정국은 대단히 복잡하게 전개됐지만 이 집에서의 삶은 ‘외면상’ 세상의 흐름과 전혀 관계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엔 아들도 생겼다.

    그 아들이 1년 2개월쯤 되었을 무렵인 1950년 4월 21일 김수임은 반공검사 오제도 팀에 전격적으로 체포됐다. 그 전해 가을 남로당 서울시당 위원장 양한모의 전향 이후 그를 앞세워 남로당의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당국의 촉수에 총책 김삼룡과 이주하가 3월 27일과 28일에 체포된 직후였다. 또 북로당에서 특별히 파견되었던 성시백도 김수임 체포 직후인 5월 15일 당국에 체포됐다.

    김수임의 혐의는 무려 13가지나 되었는데 요약하면 남로당을 위한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일제시대부터 애인관계였던 이강국(북조선 인민위 외교국장)을 1946년 9월 자신의 옥인동 집에 숨겨 주었다가 베어드 대령의 지프로 개성까지 데려다줘 월북을 가능하게 했다든가, 남로당원들에게 주한미군 철수문제 등의 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 사실은 대중을 경악케 했다.

    재판은 6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연달아 열렸고, 결국 사형(총살)이 선고됐다. 당시 경향신문은 김수임의 문답까지 곁들여 재판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보도해 일반인들의 관심에 호응했다.

    그는 답변 중에 이강국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언급한 반면, 간첩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보도 중에는 “방청석에는 연 3일을 계속하여 방청하러 온 모윤숙, 노천명 여사 등 여자 방청객이 대부분이었고 피고 김은 어제보다 더 머리를 푹 수그리고 수심에 잠겨 있었다”는 식의 법정 스케치라든가 그의 옥인동 집 전경, 아들 사진 등도 곁들여졌다.

    김수임

    1945년 김수임(뒷줄 오른쪽)과 모윤숙(뒷줄 왼쪽)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이렇게 사형 판결이 내려진 지 채 열흘이 못 되어 6.25가 발발했다. 정부는 황급히 후퇴하면서 6월 27일 새벽 좌익 관계자들을 마구잡이로 사형시켜 버렸다. 이때 김삼룡, 이주하, 성시백 등과 함께 김수임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집행 장소는 한강 백사장이다, 남산 기슭이다, 육군형무소다 해서 여러 가지 말만 무성할 뿐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재판에 대해서는 민간인을 무리하게 군사법정에 세웠고, 김수임이 들것에 실려 재판정에 나올 정도로 고문과 강압수사의 흔적이 짙었으며, 그에게 적용된 국방경비법이 실은 근거가 불확실하다는 등의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직후 전쟁이라는 엄청난 태풍이 몰아치고 당사자도 이 세상에 없다 보니 세인의 관심사로 다시 부각될 이유가 별로 없었다.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온 것은 아주 최근인 2008년의 일이었다.

    그것은 필연이었을까? 미국에서 안식교 계열의 신학교에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원일 목사가 이 사건 재점화의 주역이었다. 그는 베어드와 김수임 사이의 아들로서 사건 당시 옥인동 집에 버려지다시피 했던 그 당사자였다. 이제 60세가 된 아들이 10여 년간 미 국립문서보관서 등지에서 확보한 자료들을 토대로 어머니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초점은 사건의 조작 가능성에 모아졌다.

    모윤순-기사

    경향신문 1950년 6월17일자에 실린 김수임의 사흘째 재판 스케치 및 해설기사. 기사 제목들 가운데 “모(윤숙)여사 증인대서 진술”, “김수임은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매아미(매미)를 동무 삼던 고독한 여성” 등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아들이 찾아낸 미 육군성의 기밀문서 ‘베어드 파일’에 따르면,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없어 그와 동거하던 김수임이 북측에 넘겨줄 비밀도 없었으며, 이강국을 월북시키는 데 미군 지프를 이용했다는 등의 내용도 ‘입증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완전한 반전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함께 발굴된 미 육군 정보국의 1956년도 비밀자료에는 이강국이 CIA의 비밀조직 JACK(Joing Activities Commission Korea, 한국공동활동위원단)에 고용됐었다는 대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 이강국은 1953년 한국전쟁이 정전으로 일단락된 뒤 북한에서 ‘미제의 스파이’란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수임은 이강국을 위해 미군의 정보를 정탐한 스파이가 아니라 미군을 위해 이강국과 접촉하는 창구였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또 다른 이론도 있다. 이강국은 단순히 미국의 스파이라기보다는 남로당 계열과 미국 측 사이의 비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김수임 사건의 진상은 거의 미궁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가 이 옥인동을 거쳐 간 두 사나이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점에서 아들 김원일 목사는 오히려 담담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역사의 파도에 익사한 이가 어머니뿐이겠느냐”면서 “한국의 역사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형성될 때 어머니의 이야기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서촌은 떠내려가고 있었다.

    시인, 길을 잃고 서촌에 유폐되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하는 <사슴>의 시인 노천명(1912~1957)은 왜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김수임의 공판정에 사흘을 연이어 나타났을까? 우리의 피상적인 상식으로는 ‘여간첩’과 ‘평생을 독신으로 산 고고한 여류시인’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가 별로 없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노천명은 김수임의 이화여전 영문과 두 해 후배였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의 대표적인 연극운동단체였던 ‘극예술연구회’에서 김수임, 모윤숙 등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들에 속했다.

    젊은 시절의 노천명 시인

    젊은 시절의 노천명 시인

    그들은 학연과 사회활동으로 단단히 연결된 동료였다. 그런가 하면 노천명은 서촌의 창성동에 있던 진명여자보통학교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10년 이상 체부동의 이모댁에 머물렀고, 김수임이 옥인동 집에 살 무렵인 1949년에는 누하동 225-1의 한옥으로 이사 와서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서촌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누하동 집은 김수임의 집으로부터는 걸어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지금의 동네 상황으로 설명하자면, 사직공원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가 환경운동연합 앞에서 오른쪽 필운대로2길의 주택가 골목으로 꺾어져 50미터 남짓 내려가면 왼쪽의 샛길 끝에 보이는 집이 바로 노천명이 살던 집이다. 지금도 얌전한 도시형 한옥이 잘 정비된 느낌을 준다.

    김수임과 노천명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들이 걸은 길까지 완전히 같았던 것은 아니다. 일제 말기에 김수임은 이강국과의 관계도 있었지만 능통한 영어 실력과 타고난 사교성으로 세브란스병원 치과 과장의 비서 겸 통역으로 일해 친일 문제를 비켜갈 수 있었다.

    그러나 노천명은 그렇지 못했다. 김수임과는 달리 사교성은 없되 문재(文才)를 타고났던 그는 언론을 자신의 길로 택했다. <조선중앙일보> <여성> <매일신보> 등에서 광복이 오기까지 10여 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글 쓰는 일은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었다. 노천명도 일제 말기에 친일시를 몇 편 남겼다.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 제목만 들어도 어떤 내용인지 알 만한 작품들이다.

    그런 행적에 대한 가책 때문이었는지 노천명은 광복 이후 대외 활동에 별로 나서지 않았다. 잠시 기자 생활을 이어가던 것도 그만 두고 일본 유학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6.25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묶인 것이 그만 족쇄가 되고 말았다. 북에서 온 임화 등과 만나면서 ‘문학가동맹’에 가담했는데 9.28 수복 뒤 이로 인해 부역죄로 무려 20년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한번은 친일로, 다시 한 번은 부역으로 만신창이가 된 노천명은 고통과 치욕에 몸부림쳤다. 1.4후퇴 때는 푸른 죄수옷에 수갑까지 찬 중죄인의 모습으로 기차로 부산까지 호송되었다는 말도 있다.

    문단 동료들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감옥에서 6개월만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그 뒤에는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며 사람을 기피하는 생활을 했다. 도시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킨 것이다.

    김수임과는 때로는 같은 길을, 때로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혼돈의 와중에 길을 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갈 출구를 잃었을 때 가장 손쉬운 길은 자기 내부에 침잠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재생불능성뇌빈혈로 쓰러져 누하동 집에서 눈을 감았다. 1957년 6월 16일이었다. 가장 가까운 선배이자 동네친구였고, 똑같이 시대의 미아였던 김수임이 사형판결을 받은 지 꼭 7년 뒤의 그 날이었다.

    그가 남긴 만년의 시가 안쓰럽게 다가온다. ‘여기’가 아닌 ‘저기’로 가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을 담고 있기는 하나 그는 ‘저기’로 가는 통로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촌은 또 한 차례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행복하겠소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1953)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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