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의 부진에 대한 한 단상
        2013년 04월 11일 05: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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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지난 일요일과 월요일에 아주 즐거운 일이 오래간만에 있었습니다. 제게 옛날에 조선학을 가르쳐주었던 레닌그라드국립대의 쿠르바노프샘이 여기에 오셔서 북조선 관련 특강을 해주신 것입니다 (관련 링크)

    특강도 성황리에 이루어졌지만, 제게 더 재미있는 것은 쿠르바노프샘과의 사담이었습니다. 제게도 그에게도 관심사 되었던 문제 중의 하나는 현재 러시아에서의 좌파의 부진, 존재감의 부족인데, 우리는 그 현상의 여러 원인들을 토론했습니다.

    원인들이 실로 다양하지만, 쿠르바노프 선생님이 제게 “다른 것보다, 레닌 시대와 비교했을 때에 개인의 유형 그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개인, 개성 형성의 과정, 기제들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을 중시해라”고 제게 주문하셨습니다.

    저는 그 지적에 대해서 지난 며칠간 계속 생각해왔는데, 지금 제 생각의 윤곽을 여러 분들과 공유해볼까 합니다.

    1917년에 세계를 다 바꾸어보려는 기세를 보인 로서아의 볼셰비키들은 도대체 “개인”으로서는 어떤 인간형들이었던가요? 그 지도충의 상당부분은 19세기말 혁명적 인테리들의 전통을 이은 “지식인”들이었지만, 기층은 대체로 “생각하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뭐, 제 외조부를 생각해보면 어떤 인간형인지 아주 쉽게 그림이 그려집니다. 대체로 대공장 숙련공들이었고, 어릴 때부터 책 보기를 좋아했고, 그 책들을 통해서 “사회 정의” 이념을 배웠지만, 지방행정관료들이 농민을 체벌하고 군에서 장교들이 병졸을 체벌하는 로서아제국의 야만 속에서 그 정의의 그림자도 못찾고, 또 책에서 배운 “세계 만방의 인민에 대한 이해” 등과 유대인 학살의 현실과는 전혀 조화시키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카툰

    독일 노동자가 러시아 노동자와 악수하는 장면. 1906년 독일 사민당의 카툰

    외조부 가족은 우크라이나족이었는데, 유대인 학살이 날 때마다 유대인을 숨겨주곤 했었습니다. 결국 책 속에 찾아낸 “나, 한 개인의 진리” – 예컨대 정의라든가, 인간의 상호 존경, 톨레랑스 등등 -가 주변의 극단적 야만성과 너무나 노골적인 대조를 이루었기에, 그 내면적 갈등을 달리 풀지 못해 로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문을 두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정로서아에서 유배형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미 “이것이 나의 진리”라고 내면적으로 규정한 개인에게 그 무슨 처벌을 가해도, 그는 그 진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진리를 포기하면 나 자신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나를 잃고 무엇땜에 살겠어요? 아, 플라토노프가 소설 <체벤구르>에서 백위군이 내전 시절에 이런 사람들을 “늘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당장 식별하여 무조건 사살했다. 그 씨 자체를 완전히 말리기 위해서다”라고 썼습니다. “늘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은 여기에서 핵심어입니다.

    그러면, 지금 제가 익히 아는 스칸디나비아나 로서아의 대도시의 현실은 어떤가요? 제 느낌 같으면 국가와 자본이 하나가 되어서 일단 “생각하는 사람”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총력전을 펴는 것입니다. 단, 백위군과 달리 단순히 이미 만들어진 비판적 개인을 죽이는 방식이라기보다는, 그런 개인이 만들어지지 않게끔, 대량적인 “선제공격”을 펴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국가는 일단 개인이 어린 시절에 받을 학습 내용을 최대한 단순화시킵니다. 역사 등 “위험한 주제”를 다룰 때에 말입니다.

    예컨대 인제 막 고교 입학하려는 핀란드 거주의 저의 한 조카의 학습노트를 보면, 그는 러시아 혁명과 초기 쏘련사에 대해서는 단순히 약 한 시간만 공부했으며, “스탈린이 2천만명을 죽인 악마였다”는 사실 (?)만을 기억하게 됐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핀란드 독립의 역사와 연관이 있어서 그나마 배워주기라도 하지, 불란서 혁명 따위는 거의 배우지도 않습니다.

    러시아 같은 경우에는 국가의 최근의 “비판적 개인에 대한 선제 공격” 중의 하나는 한국식 (!) 사지답식 “정답 맞추기” 형태의 일률적인 대입 수능의 획일적인 전국적 실시이었습니다.

    그 “전체주의적” 쏘련 시대에 대학에 입학하려는 청년은 입학 고사 때에 스스로 약 6-7면에 달하는 작문을 해서 대개 이런저런 문학작품이나 문학사 등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밝혀야 했는데, 인제는 “나만의 견해”는 그 누구에게도 필요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 만세!”라고 불러야 하나요? 좌우간, 다수는 애당초부터 비판적 사고력 발전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국가가 하는 일에 자본도 돈벌이를 할 겸해서 열심히 보필(?)해줍니다. 자본은 개인 시간의 식민화를 통해서만 그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데, 시간 식민화의 방식은 대개 개개인에게 “현실 도피”, 즉 정신 집중을 피해 의식을 분산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아,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대중문화”를 처음 본격적으로 비판했을 그 당시에는 그 비판의 대상은 한 개인이 그저 잘하면 일주일에 한번쯤 가서 두세 시간 보낼 수 있는 ‘영화관’이었습니다.

    즉, 자본에 의한 개개인 시간의 식민화는 1940년대 같으면 “주당 몇시간” 정도이었죠. 스포츠와 연예계 소식으로 가득찬 3류신문도 이미 그 때 있었지만, 그걸 보는 시간도 하루에 30-40분에 불과했습니다. 그 때 말입니다.

    지금은? 지금은 평균적인 한국인이 하루에 스마트폰을 만지는 시간은 몇시간 정도 될까요? 문자 보내고 콘텐츠 보고 인터넷 이것저것 별생각없이 확인하는 횟수는?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만 해도 하루에 3-4시간 정도입니다. 일주일도 아닌 하루 말이죠.

    그리고 아도르노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시간의 식민화, 정신의 식민화는 너무나 일찍이 시작됩니다. 제 맏아들 같으면 이미 8살부터 정기적으로 인터넷 게임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노르웨이에서는 평균입니다. 보통 한 번 시작하면 5-7시간까지 인터넷게임으로 채우는 것도 보통일이구요.

    아이들과 성인들이 즐기는 인터넷 게임

    아이들과 성인들이 즐기는 인터넷 게임

    그러면 생각해보시죠. 수업과 숙제 시간 이외에 하루동안 거의 지속적으로 인터넷 게임하고, 유튜브 비디오 검색하고, 휴대폰 확인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삶을 사는 아이는, 그 예의 “생각하는 인간형”이 될 수 있을까요?

    인제 유치원에 가서 아이를 하원시켜주어야 하니 결론부터 내려보겠습니다. 우리는 가면 갈수록 개인으로 발전될 가능성, 개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는, 개개인의 삶에 이런저런 욕망을 자극시키고 충족시켜주는 자본들이 가면 갈수록 더 간섭하고 개입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같으면 다수의 사회인들은 일하는 시간만 빼면 대체로 문화자본이 제공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간만 갖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삶을 시작하는 연령도 갈수록 내려가기에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표정”은 인제 너무나 드물게 볼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좌파가 되자면 그 논리 체제를 받아들일 만큼 체계적 사고의 습관부터 일찍 키워야 하는데,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이것마저도 쉽지 않아요. 그러니까 희랍 같은, 이미 절망이 지배하는 곳에 가면, 젊은이들이 공산당원 등 “정통” 좌파 되는 것보다 길거리에서 화염병을 투척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는 통속적 아나키스트가 되는 걸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화염병을 던지게끔 하는 그 절망을 십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행동형” 아나키스트 되는 것보다 “정통” 좌파가 되는 게 훨씬 더 많은 공부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 공부를 할 수 있는 조건 그 자체를 최근의 일상의 형태들이 우리에게 박탈하죠.

    우리는 디지털 사막에서 사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그냥 할 말을 외쳐야 한다고 합니다. 외쳐대야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가 들을 것이라고 믿으면서요. 아, 인제 유치원으로 가야 합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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