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껍데기는 가라
    [산하의 오역]신동엽..."그 어느 편에도 가담하는 것 자체가 나에겐 야만이었다"
        2013년 04월 08일 02: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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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들어온 다음 제일 싫었던 것 중의 하나, 책 좀 치우고 생각 좀 안하고 놀고 싶은데 웬 놈의 선배들이 만나면 물어보는 게 “무슨 책 보니?” “요즘 고민이 뭐니?”.

    아 지금 얘긴데 정말 짜증났다. 별로 읽고 싶지도 않은데 한 번 읽어 보라고 안겨 준 책도 많았고 “너 그건 당연히 읽어 봤겠지?” 하면서 은근히 아니 노골적으로 압박을 주던 책도 한 두 권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책이 <껍데기를 벗고서>. 내 무엄한 동기 한 명이 “아 나는 껍데기 깠는데 뭘 또 벗으란 말이야”라고 투덜거린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책이었다. 차치하고, 그 책은 선배들이 읽으라고 한 책 중에선 그래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신입생들에게 나름 다른 세상과 시각을 친절하게 알려 주는 책이기도 했고.

    그런데 이 책의 ‘껍데기’라는 표현은 그 책 제목을 정한 사람의 창작이 아니었다. 그 표현의 지적 소유권자는 <껍데기는 가라>를 노래했던 시인 신동엽이었다. 내 기억에 <껍데기를 벗고서> 안에 <껍데기는 가라> 또한 소개되어 있었다. 80년대 신입생 치고 농담으로든 진지하게든 이 싯귀를 읊조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시 쓰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참 부럽다. 이 시를 처음 읽으면서도 그랬다. 껍데기와 알멩이라는 흔한 단어가 이렇게 구별될 수도 있구나. 이렇게 뭔가를 상징하면서 단어의 생명력을 가질 수도 있구나. 이미 변질한 사람들 많았던 사월의 껍데기들을 버리고, 동학 농민 전쟁의 아우성도 그 알멩이만 챙기고자 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참 생생하고 쟁쟁하게 귀를 울렸다.

    입으로 읽으면서도 귀에 울리는 거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의 마지막 구절이 더 귀에 담긴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일찍이 문재(文才)를 드러내 아버지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던 신동엽. 아버지는 없는 살림에 신동엽에게 글을 가르쳤고 책과 붓을 마련해 아들의 공부를 지원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여 사범학교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의 인생은 그렇게 험난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학창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극심한 가운데 양쪽 다에게 끌려가서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그러다가 토지개혁 미실시와 친일파 척결의 유야무야를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끼어들었다가 덜커덕 퇴학을 맞는다.

    그래도 교원 자격은 있어서 국민학교 교사가 되지만 바로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가 대학생이 된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하지만 그는 서울에서 쇠붙이들이 내는 포성과 총성을 접하게 된다. 6.25가 터진 것이다. 부랴부랴 고향 부여로 내려오지만 부여 역시 인민군에게 함락된다.

    인민군들은 그의 사범학교 경력과 인텔리로서의 지식을 높이 샀던 듯, 또는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듯 하다. 신동엽은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이 된다. “인민군의 뒤를 바싹 따라 북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들어와 신속한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각 군에도 북로당원들이 내려와 군당위원장이 되었다…. (그들이 조직한) 각종 동맹은 해당자들에게 맹원 가입을 요구했는데 그 요구에 불응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반동임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성민엽 저 신동엽 평전 중)

    그러나 전황이 뒤바뀌면서 그의 감투는 죽을 죄명이 됐고 신동엽은 산으로 숨어들기도 한다. 그는 부산에 있던 전시연합대학에 학적을 올리게 되는데, 안심도 잠시 그는 국민방위군 소집에 응해 집결지로 향하게 된다.

    인민군 문선대까지 됐다가 인민군 포로로 전락한 뒤 포로 수용소 내 벌어진 좌우의 학살극을 지켜봤던 트라우마를 지니게 됐던 시인 김수영처럼, 신동엽 역시 전쟁 발발 몇 달 사이에 평생 지우기 힘든 상처를 안게 된다.

    국민방위군은 대한민국 정부의 흑역사다. 세상에 전쟁을 한다는 나라에서 장정들을 뽑아 군대를 편성하는데 그 예산을 사령관이 떼먹고 휘하 장교들이 해 처먹은 나머지 그 수조차 어림짐작할 수 없는 장정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간, 도무지 말도 안되고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건이었다.

    신동엽도 그 일원이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그는 냇물에 코를 박고 참게를 생으로 잡아먹으며 아사를 면한다.
    굶주림과 병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한 국민방위군 소집 청년이 된 뒤에야 그는 사상범의 혐의를 피할 수 있었지만, 1950년 여름과 그 해 겨울로 이어지는 몇 달은 그의 평생을 지배했고 그의 시 세계에 드리워졌을 것이다.

    따발총과 M1 소총, 공습의 굉음과 섬뜩한 총검 사이에서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던 그에게 쇠붙이란 얼마나 혐오스런 것이었을까. 성숙하지 못하고 무르익지도 못한, 섣부른 적의와 살의들이 난무하던 그 시대의 내음이란 얼마나 매캐하고 삭막했을까.

    이쪽으로 고개 돌리면 빨갱이가 되고 저쪽으로 고개 돌리면 반동분자가 되던 세상은. 신동엽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 어느 편에도 가담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야만이었다.”

    그가 부인 인병선을 만나게 된 사연도 범상하지 않다. 그가 서점에서 알바 비슷하게 일할 때 이화여고 3학년생이었던 인병선을 만나게 되는데 데이트 3일째, 인병선은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듣고 우뚝 서 버리는 남자에게 놀란다.

    인병선의 아버지는 인정식. 일제 시대 좌익 경제학자였으나 일제 말기 친일 행각이 뚜렷했고 6.25때 납북된 인정식이었다. 신동엽은 놀란 눈빛으로 말한다. 인정식 선생을 존경하며 그의 책을 다 읽었노라고. 빨갱이의 딸로 마음 고생을 했던 인병선으로서는 “마음을 쉽게 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동엽이 인정식을 존경했다면 그의 이력을 잘 알았을 것이고 일제 말기 인정식의 행각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동맹 선전부장이었다가 산사람이 됐다가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됐다가 공군 간부후보생에 합격까지 했던 그가 인정식의 인생유전을 탓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1959년 문단에 처음 등장했고 1960년 4.19 혁명을 거리에서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한다. <껍데기는 가라>는 그즈음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세상의 극을 오가며 죽을 고비와 살 구멍을 수시로 오갔던 그에게 세상은 껍데기투성이였을 것이고 알멩이는 너무도 멀리 있거나 손을 뻗을수록 멀어졌다.

    그는 그 안타까움을 노래했고 고향을 휘감아 도는 역사적인 강 금강을 노래했다. 그렇게 10년을 반짝 시인으로 활동한 후 1969년 4월 7일, 국민방위군 때 허겁지겁 잡아먹었던 참게의 복수였던 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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