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①
    [비판과 비평] 마이클 샌델의 보수주의적 공동체주의 비판2-1
        2013년 04월 08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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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소개와 정치적 쟁점에 대한 1부 글에 이어 2부로 마이클 샌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의 공동체 담론에 대한 남종석의 글을 게재한다. 2부 글 또한 2회로 나누어 싣는다. 2회에서는 시장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다. 남종석의 1부글을 보려면 여기를(관련링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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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에 맞서는 보수주의?

    앞의 글에서 나는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샌델류의 보수주의적 공동체주의에 대한 열광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어떤 페북친구가 보수주의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진정한 보수주의에 대한 기대 때문에 샌델을 환영하는 것 아닐까라는 문제제기를 했다.

    나는 물론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보수주의’가 원래 시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주장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초기 대작 [문화와 사회]는 영국 낭만주의를 19세기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성장해온 것으로 그리고 있다. 에드먼드 버크에서, 워즈워드, 매튜 아놀드와 TS엘리엇, 리비스로 이어지는 보수적 낭만주의 전통은 ‘단단한 모든 것을 현금관계로 전환’시키고, 공동체의 해체와 인간성의 타락을 낳는 자유 시장경제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되었다고 쓴다.

    물론 이런 보수적 낭만주의에는 프랑스 혁명과 봉기적인 대중의 출현에 대한 불안, 공포, 위기의식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수주의는 결코 시장 자유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보수주의란 전통의 가치, 공동체의 규범, 관습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며 사회적 위계를 정당화하는 가치체계인 것이다.

    이런 보수주의자들은 한편으로 모든 것을 돈으로만 환원시키는 부르주아의 천박함을 경멸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규범과 질서, 국가의 존엄과 종교의 신성을 거부하는 무지자, 무산자들의 난동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시장근본주의와 대중적 봉기 모두에 맞서 전통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21세기를 맞이한 신자유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의 많은 부분을 다시 재생시키고 있다. 온갖 투기적 축적은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부르주아들은 온갖 부패를 일삼으면서도 연일 승승장구하고 인민들의 삶은 피폐해 지고 사회 공공성은 지속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적 권리를 강조했던 자유주의는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이런 부패의 주도적인 행위자로 전락해 버렸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중도좌파의 몰락은 자유주의적 대안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90년대 권력을 잡은 사민주의 정권과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 정권들은, 모두 금융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위가 됨으로써 시장근본주의를 전파하던 보수주의자들(레이거노믹스와 대처주의)과의 차이를 스스로 제거해버렸다.

    클린턴이 레이거노믹스의 실질적인 실행자였고 블레어가 ‘바지 입은 대처’라는 사실은 이제 사회과학 초년생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념에 있어서도 중도좌파의 후퇴는 지속되었다. [정의론]을 쓴 롤즈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침묵했고, 유럽 중도좌파의 거성이었던 위르겐 하버마스는 독일이 주도한 ‘인권을 위한 전쟁’에 찬성함으로써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롤즈

    정의론의 저자 존 롤즈

    현대사상의 스펙트럼](길, 2011)에서 페리 앤더슨이 쓰고 있듯이, 롤즈와 하버마스 모두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이 기대고 있던 중요한 이데올로거였으나 이들은 현재 서구 제국주의에 침묵하거나 동조하고 있으며 금융화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샌델이 주목받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샌델은 오늘날 사회적 위기는 자유주의적 대안을 통해서는 치유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자유주의는 시장근본주의에 대해서도, 사회적 윤리적 타락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의 위기에도 대처할 수 없는 무능한 이념으로 전락했다고 보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필요한 시민적 덕성을 기르기는커녕 사회에 만연된 이기주의를 그저 방치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앞의 글에서 보았듯이,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샌델이 주장하는 것은 보수적 공화주의다. 그는, 정의에는 롤즈가 강조하는 ‘분배 정의’도 있지만 충직, 의무, 종교와 도덕을 강조하는 ‘가치 측정의 정의’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오늘날 사회위기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권리 개념에 충실한 분배정의가 아니라 시민적 덕성과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가치측정의 정의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샌델의 대안은 마르크스주의나 급진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샌델의 주장은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분명한 퇴행이다. 그가 대안으로 들고 나오는 의무, 충직, 작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신자유주의적 위기에 대한 보수적 온정주의로의 퇴행을 의미할 뿐이다. 그의 시장 비판은 워렌 버핏이나 이건희가 전혀 껄끄러워 하지 않을 그런 종류의 것이다.

    보수적 공화주의: 소유권과 민족주의의 결합

    공화주의의 근본적 토대는 시민적 주체이다. 공화정은 주권자인 시민이 정치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사회적 의제를 형성함으로써 자치를 이끌어 내는 정체이다.

    공화주의에서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 시민을 구성하는 대중이 타락하면, 이 정체는 타락할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이 능동적 주체로서 이성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면 이 체제는 안정화된다.

    그러므로 공화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시민의 구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의 목적을 “시민의 덕을 키우는 일”이라고 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샌델 역시 공화주의는 “시민의 덕”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시민의 덕은 앞에서 보았듯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충직, 동료 시민들의 삶에 대한 책임의식, 종교와 도덕 등이다.

    그러나 샌델식 공화주의는 근본적으로 보수주의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주의 비판에는 소유권에 대한 비판이 없기 때문이다. 샌델이 논하고 있듯이, 현대 자유주의의 근원적 토대는 소유권에 대한 인정이다. 자기 신체, 자기 노동에 의한 결과물은 자신의 것이며, 사적 이익 추구는 고유한 인간의 권리라고 전제하는 것이 근대 자유주의이다.

    반면 루소와 마키아벨리에 토대를 두고 있는 급진적 공화주의는 공동체의 원리를 토대로 시민들의 소유권을 근본적으로 제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소유권의 확대는 근본적으로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롤즈식 사회계약론은 ‘무지의 베일’이라는 장막을 통해 소유권에 기초하지 않고 모든 이들을 사회적 계약에 동참시킴으로써 공화주의적 이상과 평등주의적 원칙, 자유주의적 원리를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롤즈식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적 원칙하에 공화주의 윤리와 사회주의적 요소를 결합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샌델이 롤즈를 제대로 비판하려고 했다면 소유권에 대한 보다 발본적인 문제제기를 했어야만 했다. 롤즈는 소유를 했든 그렇지 않든 모든 이들이 정의의 두 원칙에 합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부르주아들은 사회적 계약을 거의 팽개쳤으며, 축적을 위한 축적과 금융적 수탈만을 일삼고 있다. 그들에게 계약이란 시장에서의 ‘거래의 자유’를 의미하지 공동체 내에서의 구성원간의 합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경제위기 하에서 부르주아들은 언제든지 ‘정의의 원칙’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샌델의 대안은 공허한 도덕주의와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샌델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상을 따라, 공화국에서 ‘덕 있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종교와 도덕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할 것을 주창한다.

    그러나 소유권을 토대로 사회가 극단적으로 분할되어 있고, 계급적 갈등으로 해체된 공간에서 공동체의 미덕, 충직, 의무, 연대라는 구호는 하나의 공허한 담론일 뿐이다.

    물론 샌델도 공동체의 연대를 위해서는 극단적인 불평등이 치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샌델의 주장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전후 복지주의 국가가 개인들의 덕성을 기르는 대신 공동체주의의 이상을 타락시키는 데 동조함으로써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그는 복지보다는 덕성의 함양을 강조하고 권리보다는 의무와 충직을 강조한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과 위기는 도덕 측면에서 비롯된 사회적 위기에 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이윤축적을 극단화시킨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가난한 자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침묵은 오로지 부와 과시만을 숭배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지 도덕적 타락과 이기주의에 매몰된 결과로 볼 수 없다. 개인들이 이기주의에만 매몰되는 것이야말로 이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덕성과 시민적 의무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소유권의 문제를 발본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롤즈의 진정한 한계는 소유자와 무소유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참여하는 사회적 계약을 ‘자본주의체제’에서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에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소유권에 대한 근본적인 제약은 계급투쟁과 노동자운동의 사회적 힘에 의해 가능한 것이지 ‘무지의 베일’과 같은 상상의 장치나 시민적 덕성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케인즈주의적 계급타협조차 노동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지 도덕을 통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주지해야 한다.

    샌델식의 공화주의는 19세기 민족주의와 결을 같이 한다. 19세기 후반 부르주아와 노동자계급 간의 계급투쟁이 심화되자 우파들이 새롭게 발명해 낸 공동체주의가 바로 민족주의이다. 민족주의는 공동체의 상징물(영웅, 민족 문화, 역사적 기억, 관습적 도덕)들을 통해 개인들을 호명했다.

    민족주의는 개인들로 하여금 집단적 상징물들을 자기화하고 이에 긍정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사회통합을 달성하려던 것이다.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의 소유권을 보호하되 민족적 상징으로 계급 모순을 해결하려던 이데올로기이다.

    샌델 또한 소유권의 문제에는 침묵하면서 공동체의 종교와 도덕을 내세운다. 그는 개인들로 하여금 그가 속한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이 공동체가 부과하는 의무를 다하게 함으로써 공화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그의 방식은 19세기 민족주의처럼 토대(소유권)에서 비롯된 계급적 갈등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시민들의 덕성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공동체의 해체에 대항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공동의 선과 윤리, 주권자의 사회 참여를 강조한다. 그러나 평민들이 사회의 주권적 주체가 되려면 사회적 토대의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누구나 평등한 삶의 조건을 갖춘 토대 위에 개인적 자율성의 향유와 윤리적인 삶, 주체적인 삶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했던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다. 노동자연합에 의한 인권의 정치야말로 자기 해방과 시민 주체의 구성이 함께 나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유토피아]의 작가이자 성공회 사제였던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작가이자 대법관. 카톨릭 사제였던 토머스 모어

    마르크스의 주장은 토마스 모어나 루소의 주장, 심지어 플라톤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모어는 [유토피아](서해문집,2005)에서 라파엘이라는 가공인물을 통해 유토피아라는 곳의 개인들이 윤리적으로 타락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사적 소유를 지양한 삶의 양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동서문화사, 2007)에서 문명인들의 타락은 사적 소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언한다. 평등한 사회체제에 토대를 둔 시민적 덕성의 함양이야말로 공화주의의 덕목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인 것이다. <계속>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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