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현대사로 보는민족주의 비판
[책소개] 『민족주의 사상과 식민지 세계』(빠르타 짯데르지/ 그린비)
    2013년 04월 06일 12: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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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이미 그 의의와 한계가 간파당해 버린 낡은 이데올로기라는 학계와 시민사회의 통념 속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러한 통념을 알고 있는 만큼 철저히 그것과 결별하였을까?

특정 정치집단만이 유독 강조하여 내세우는 ‘민족’이라는 단어와 신임 대통령의 취임사에 압도적인 빈도로 등장한 ‘국민’이라는 단어 사이에 어떠한 긴장관계는 없을까?

세계적 차원의 자본 운동으로서의 제국주의가 민족주의를 호출해 냈다면, 그것이 더욱 노골적이고 전면화된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그것들은 어떤 형태로 결합 혹은 조응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참조점을 발견해 낼 수 있을까?

『민족주의 사상과 식민지 세계』는 이러한 물음표들과 거리를 두어 왔던 오늘날의 담론장에 민족주의라는 ‘유령’을 다시금 불러내 해부대 위에 올려놓는다.

저자 빠르타 짯떼르지는 라나지뜨 구하,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등과 함께 서발턴 연구 집단에 속하는 학자로서 서발턴 연구의 문제의식을 모국 인도의 현대사에 나타난 민족주의에 결합시켰다. 그는 인도사에서 민족주의의 국면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세 인물, 즉 반낌짠드라 짯또빠디야이와 마하뜨마 간디, 그리고 자와하를랄 네루를 끌어와 인도의 민족주의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설파한 ‘수동혁명’의 과정 및 결과와 얼마나 유사한지를 보여 준다.

짯떼르지는 이를 통해 인도사의 주류를 차지해 온 민족주의 역사학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민족주의가 가져온 것은 결국 엘리트 질서의 재생산이었고, 그 유산은 여전히 남아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다.

민족주의 역사학은 이러한 엘리트 중심의 부르주아 역사학에 다름 아니며, 민족의 이름으로 재현된 역사는 주변부 서발턴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학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옮긴이 서문 중에서).

이 책 『민족주의 사상과 식민지 세계』는 이처럼 역사학, 서발턴 연구, 정치철학 등을 폭넓게 결합시킨 비판적 민족주의 연구의 한 전범으로서,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부산외대 이광수 교수의 번역으로 한국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민족주의의 태생적 한계: 수동혁명으로의 귀결

‘사상’(혹은 이론)으로서의 민족주의는 분명 특A급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사적 맥락에서의 필요성을 인정받아 왔는데, 반제·반식민 투쟁의 도구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유와 진보에 대한 보편적 추구를 정치적으로 구체화하는 시도”(21쪽)였다는 점에서였다.

짯떼르지는 베네딕트 앤더슨, 앤서니 스미스, 어니스트 겔너 등 민족주의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비판적으로 독해함으로써 민족주의 연구들이 공유하고 있는 관점과 그것이 놓인 맥락을 밝힌다. 민족주의란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렇기에 근대적 보편 이성을 거스르지 않는다.

또한 그렇기에 이성의 사용 방향에 따라 보편적 가치를 향한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좋은 민족주의’로도, 조직화된 폭력과 독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서의 ‘나쁜 민족주의’로도 흐를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을 통한 보편적 가치의 추구라는 점에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 어떠한 논리적 적대감도 찾을 수 없다”(23쪽).

결국 민족주의는 문제틀(problematic)의 차원에서는 식민주의와 반대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주제틀(thematic)의 차원에서는 식민주의와 같은 논리와 합리성을 공유하게 된다. 즉, 민족주의는 식민주의를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그것이 표방하는 이성·과학·발전과 같은 근대화의 가치를 공유하는 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식민 상태의 질곡을 벗어나는 근본적 기획이 될 수 없으며, 결국에는 식민주의 안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짯떼르지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람시의 수동혁명 개념과 만나 더욱 견고해진다. 아래(하부구조)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위(상부구조)로부터의 혁명, 즉 민중의 진정한 열망이 발현된 혁명이 아니라 정치사회 스스로 헤게모니를 획득하여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 변혁을 하는 이러한 과정은 지배질서의 표층만을 바꾸어 내는 작업에 그치게 마련이다. 짯떼르지는 영국 식민지배하 인도 민족주의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 간다.

민족주의

민족주의의 세 국면: 출발, 기동, 도착

출발 국면: 반낌짠드라 짯또빠디야이(Bankimchandra Chattopadhyay, 1838~1894)

우리에게 비교적 생소한 반낌짠드라 짯또빠디야이(이하 ‘반낌’)는 유럽문학의 기법들을 받아들여 인도 현대문학의 기초를 구축한 문필가로서 인도 민족주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설파한 최초의 인물이다.

유럽 계몽주의를 충실히 이어받은 반낌에게 인도인들이 처한 종속의 현실은 서양의 산업과 과학을 습득함으로써 타파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동양 문화의 정신적 위대함을 유지하는 문화적 이상을 창조하는” 것이 인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업이었던 것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익숙한 구호를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를 동반하게 된다.

“문화적 종합 행위란 매우 교양 있고 세련된 지성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지식인이 이끌고 민족이 따르는 민족적·문화적 재생의 기획인 것이다”(158쪽).

이처럼 민족주의는 식민주의에 의해 부과된 지식의 틀이 애국적 의식과 만나 생겨났다. 짯떼르지가 지적하는바, 이는 민족주의 출발 국면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대항의 무기조차 상대방이 짜놓은 틀 안에서 구해야 하는 싸움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싸움이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결국 반낌은 오리엔탈리즘의 문제틀을 전복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식민주의라는 주제틀을 뒤집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동 국면: 마하뜨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

지식인의 협소한 엘리트주의로는 이러한 곤경을 헤쳐 나갈 수가 없다. 농민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피식민국(게다가 인도의 인구는 얼마나 많은가!)의 특성상 그들에 대한 지적·도덕적 리더십을 세우지 않고서는 어떠한 정당성도 획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때 요구되는 국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간디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농민 조직과 카디(khadi, 물레로 지은 옷) 산업을 통해 민족주의 사상을 대중운동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이러한 기동의 국면에서 식민 지배에 관한 비판은 훨씬 근본적이다. “영국인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영국인 없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인도를 종속 민족으로 만든 것은 영국인이라는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그 문명이기 때문이다”(180쪽)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간디는 식민 지배를 근대 ‘문명’의 관점에서 비판했다.

이러한 시야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도덕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와 정치사회는 물론이거니와 마찬가지로 근대 문명의 유산인 시민사회 또한 대안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 요구에 기반을 둔 간디의 사상은 지배 세력에 저항하는 대중들을 정치 조직에 필요한 도구로 전환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하는 것이었다.

“정치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스스로를 구제”한 낭만적 이상주의는 민족주의의 또 다른 국면을 필요로 했다.

도착 국면: 자와하를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

식민주의로부터 파생된 대부분의 민족주의에 있어 최종 지향점이 되는 것이 바로 독립을 통한 주권 민족국가의 건설이다. 짯떼르지는 이를 민족주의의 도착 국면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인도에서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네루이다.

그에게 있어 당대에 유일한 역사적 방향은 ‘산업화’뿐이었으며, 충분한 부(富)만이 사회정의를 보장하기 위한 생산 및 분배 체계를 재조직할 수 있기에 진보란 경제 영역에 우선권을 두고 사회를 재구성해 가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익이 민족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그 주체는 민족국가가 되어야만 했다. 네루는 인도국민회의 의장으로서, 그리고 독립 인도의 초대 총리로서 현실정치의 장에서 이를 이끌어 간 대표적 인물이었다.

네루의 바람대로 인도에 주권 민족국가가 건설된 지도 60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인도 사회(그리고 모든 식민 사회)의 모순은 보다 교묘한 형태로 변이되어 여전히 대중의 삶을 속박하고 있다.

민족주의의 ‘도착 국면’은 민족국가의 건설을 성취했지만, 식민성의 자장 안에서 일어난 이러한 정치적 변혁들은 수동혁명의 차원에 머무를 뿐이었기에 결코 ‘완성 국면’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자격으로 이성과 자본 간 혼인의 적법성에 대해 도전하지 않았다. 민족주의는 자본과 인민 간의 갈등을 국가라는 몸체로 흡수함으로써 용해시켜 버린다”(347쪽)라는 짯떼르지의 날선 비판은 라틴아메리카 탈식민주의 연구 그룹의 문제의식과도 통하는 바, 근대성과 식민성의 필연적 유착에 대한 문제 제기를, 그리고 이를 극복할 근본적인 해방의 기획을 강력히 요청하는 것이다.

인도와 마찬가지로 식민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식민 지배하 민족주의 사상의 발현 및 전개 양상을 살펴보는 데 흥미로운 비교점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여전히 한국 사회(혹은 정치)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민족주의적(혹은 국가주의적) 정서의 해체를 고민할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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