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사파와 자주파에 대한 역사적 고찰
    [한국사회와 NL-1] 반제 중심주의인가? 민족문제 환원론인가?
        2012년 06월 04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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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통합진보당의 선거부정 파문과 함께 사태의 중심에 서 있는 NL에 대한 언론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전 국민이 NL 또는 경기동부에 대해 학습을 하고 있을 정도지만 대체로 색깔론적 성격이 강하거나 NL의 실체에 대한 과장된 보도가 많다. 레디앙은 통진당 사태에 대해 실체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을 위해 한국사회운동에 대해 연구해왔던 한 연구자의 글을 나누어서 싣는다. 연재 순서는 아래와 같다. 참고자료와 문헌은 최종 연재 때 싣는다. (편집자)
    1. NL이란 무엇인가?
    2. NL론의 등장과 확산, 분화과정- 통일운동, 정치조직 논쟁
    3. NL의 주류화 요인(다차원적 분석)과 조직문화
    4. 한국진보정치운동과 NL론(NL론과 정치세력화의 지체)
    5. 낡은 NL-PD를 넘어 (진보정치운동의 급진화의 과제와 방향)

    민족해방계열(주사파, 자주파)에 대한 역사적-개념적 정의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비판적 자의식이 충만했던 한국 지식인과 대학생에게 급진적 계급ㆍ민족 지향적 해석틀이 확산ㆍ수용된다. 운동이 더욱 급진화되는 1980년대 초기에는 정치주의,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강조하는 경향 즉, 전위와 노동계급과 학생운동의 선도적 투쟁을 강조하는 운동 전략을 구사하는 ‘비제도적 운동정치’로 틀 확장(frame extension)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노선논쟁과 실천의 과정에서 구성된 ‘민족’과 ‘계급’이라는 해석 틀의 재구성과 분쟁 또한 심화된다.

    한 개인이나 집단이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체제를 지향하기 위해 대안적인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고 행동하려는 경향이 PD(민중)와 NL(민족)적 경향으로 분출되었던 것이다.

    해석적 틀은 사건이나 현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조직하게 하며, 운동조직의 이념과 전략 등과 일치하고 상호보완적이 될 수 있도록 운동의 해석적 지향을 연결 짓는다. 단적으로 반제통일전선론에 기초한 ‘민주대연합론(NL)’과 ‘의회주의’ 및 변혁 노선에 기초한 독자정당건설론(PD)은 1980년대 이후 집합행동의 레퍼토리(repertoires of collective action)로 지속되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 이래 한국 사회운동에 가장 영향력를 가진 세력은 NL계열임을 부정할 수 없다. 최소한 전대협-한총련-한대련, 범민련, 연합전선을 지향하는 운동조직(전민련-전국연합-진보연대), 진보정당(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등에서 민족해방운동노선을 견지하는 세력이 다수를 점해왔다. PD의 영향력이 강했던 민주노총에도 범 NL의 흐름의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분당의 도화선이 되었던 2007년 중앙위

    일부에서는 NL을 ‘주사파’로 규정하지만 이는 정확한 규정은 아니다. PD가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공개화한 것과는 달리 NL 주사파는 공식적으로 주체사상을 추종한다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분단조국에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탄압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사파란?

    주사파라는 이 용어는 1980년대 중후반 NL-CA(PD)의 경합이 치열하던 시기에 주로 조직내부에서 사용되던 것이 1980년대 후반에는 총학생회 선거과정에서 타 정파에 의해 대중에게 공개되기도 한다.

    일부 대학의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주사파와 단호한 결별로 민중민주 앞당기자”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정권의 역 공작에 대한 우려와 함께 비판받았다. 북한과 주사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은 동지의 약점과 비밀을 공개한 행위 즉, 배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NL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부정확하게 호명됐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의 반공·반북의식을 자극해 정세를 반전시키기 위한 우익세력의 주사파 소동이 그것이다. 1994년 7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학총장 오찬에서 박홍 서강대 총장이 한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이 있고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주사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사노맹을 주사파로 규정하는 것은 상식 이하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한편, 최근 민주노동당 분당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PD일각에서도 NL내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분하지 않고 주사파로 일반화하는 등 주사파(主思派)의 정의는 불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사파’는 주체사상파의 줄임말로서 김일성주의를 신봉하고 조선로동당을 전체 조선혁명의 영도조직으로, 한국민족민주전선(前 통혁당, 現 반제민전)을 한국혁명의 영도조직이며 전위조직으로 굳게 믿고 활동하는 세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주사파는 자신과 다른 노선의 구분을 ‘혁명적 수령관’에서 찾는다. “민중에 대한 충실성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고, 수령과 지도자에 대한 민중의 끝없는 존경과 흠모를 역겨워하는 것은 부르조아적 개인주의에 사로잡힌 결과”라거나 진정한 전사는 “수령을 진심으로 높이 모시고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받드는 자세와 입장을 갖는 것이며, 또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대를 이어 계승해 나가야 하는 것”등의 내부 문헌에서 이들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주사파 조직의 형성 경로와 관련해 자생적 출현과 북의 지도를 통한 출현이라는 입장이 대립하기는 한다. 이는 북한의 대남공작사업의 직접적인 결과 즉, 직파 공작원에 의해 포섭되는 경우와 자체의 학습과 실천을 통해 주사파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에도 북한의 직파(공작원 직접 파견)공작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최소한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주체사상 보급과 확산 및 주사파 형성과정은 직파공작이 아닌 후자의 경로를 밟았던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1980년대 남한 주사파의 출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북한방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주사파는 조직 내 ‘북한 방송 청취팀’을 두어 북의 방침을 학습하고 전파해 왔는데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웹을 통해 정보와 방침을 공유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북한의 ‘반제민족민주전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인 구국전선(http:// ndf-sk.dyndns.org)을 주로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반제민전(전신 통혁당, 한민전)은 북한이 남한 내 지하당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노동당 통일전선부 소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구는 자신들을 1968년 8월 남한에서 조직된 통일혁명당의 후신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1985년 7월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간판을 바꿔 활동하다가 2005년 3월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는 남한의 급진운동 세력 내에 극히 일부지만 통일운동, 남한운동에 대한 관심 속에서 북과의 관계를 모색하는 것을 벗어나, 남한 혁명의 지도부로 북을 상정하고 그 지도를 받으려고 연계를 모색하는 집단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 역시 남한 사회 내의 이런 움직임에 한껏 고무되어, 그 의미와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고 이들과의 연계 또는 지도를 위해 직파간첩을 내려 보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도 사건의 진위와 조작을 둘러싼 공방이 끝나지 않은 남한조선노동당 사건(1992), 구국전위사건(1994), 민족민주혁명당 사건(1999) 부여 간첩 김동식 사건(1995), 울산 부부간첩 사건(1997), 일심회 사건(2006) 등이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아래 내용은 1980년대 주사파 조직은 아니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 주사파의 기본적인 인식의 일단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비합법 주체주의 단체인 백두청년회 정O 회장의 주장(『말』, 2002년 8월호 “주체사상은 미국에 승리한 불패의 사회주의”)을 요약, 재구성한 것이다.

    주체사상 : 우리에게 ‘주체사상’은 활동의 지침이며 정치적 생명입니다. 우리가 주체주의자가 된 이유는 바로 주체사상이 우리 민족민주운동을 승리로 이끄는 과학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수령관 : 우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북 민중만이 영도자가 아니라 전체 조선의 영도자라고 믿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만큼 통일운동, 혁명운동에서 거대한 업적을 쌓은 지도자는 없습니다. 마땅히 통일대통령으로 추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선노동당과 한민전 : 조선노동당이 전체 조선혁명의 영도조직이라면 한민전은 이남혁명의 영도조직입니다. 우리들은 이남 민중의 애국적 전위대인 한민전을 전위조직으로 믿고 따르는 청년주체주의자들입니다. 우리들은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방송’과 ‘구국전선’ 인터넷을 통해 정세를 분석하고 투쟁전략을 수립합니다.
    주요과제 (자주ㆍ연방제통일) : 연방제는 철저히 주체사상에 의거하여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방안입니다. 우리가 연방제를 지향하는 것은 그 방안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며 유일한 통일방안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일 문제 : 조선이 미 제국주의의 전쟁책동을 분쇄한 힘은, 바로 김정일 위원장을 중심으로 뭉친 당과 군대, 민중의 일심단결과 주체사상, 대륙 간 탄도 미사일로 무장한 군사력입니다.
    북한의 기아와 인권문제 : 이북 민중들이 조선노동당이 영도 아래 분투하고 또 분투한 끝에 이제는 식량난도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인권은 오직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온전히 실현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조선이야말로 민중이 정치와 경제의 주인이고 모든 것이 민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민중중심의 사회이며 참된 인권의 나라입니다. 인권 지옥이 있다면 미국과 이남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미국과 이남은 극소수 부자들에게는 천국이고 절대 다수 빈자들에게는 지옥입니다.

    주사파의 이론체계와 모순성

    1980년대 중후반 주체사상파의 등장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가 본질적 모순이며, 따라서 사회적 재화의 생산에 기초한 계급모순은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는 민족모순에 대해 부차적”이라는 대미인식과 운동전략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에 따라 한국의 급진주의적 운동의 전통이었던 ‘당’ 건설 우위노선에서 벗어나 “통일전선”우위 조직노선으로 바뀌어 가면서 조직건설의 패턴 또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반제투쟁 중심의 정치노선에 대해 계급모순을 경시한 민족모순환원론이라는 비판이 있었음에도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수용되기도 한다.

    주사파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관점은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변혁이론의 문제 틀을 지적하면서 이론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주사파는 당시 “한국사회의 모순과 그 해결 전망을 수립하는데 필수적인 ‘사회구성체’에 대한 기존의 논의가 토대분석만 있을 뿐 정치ㆍ군사적 측면을 소홀히 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인식함에 있어서 경제적 종속뿐만 아니라 정치ㆍ군사적 종속과 기타 사회적 종속을 내포하는 종속의 총체적 성격에 대한 파악이 부족하며, 한국사회분석이 남한사회에 국한되어 있다”면서 민족 전체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주사파가 한국사회를 규정하면서 ‘제국주의적 규정력’이라는 새로운 측면을 부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체사상의 전체 체계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체사상의 형성과정으로서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과정, 주체사상의 민족해방이론 그리고 이론ㆍ방법론적 기초로써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들이 과연 정당한가,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의 중심에 서 있는 남한에 농경사회에서나 가능한 반제민족해방론과 유교적인 요소와 비주체적인 요소로 가득한 주체사상(특히 수령관)이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특정 지도자의 신격화ㆍ우상화와 함께 특정 사상과 조직 방침을 절대화하는 한 주체사상은 개별성ㆍ자주성ㆍ창조성ㆍ능동성을 고양하고자 전개되는 운동의 목적과도 결코 부합되지 않는다.

    자주파란?

    민족해방노선을 따르는 ‘자주파(自主派)’는 주사파를 포함하여 운동권내 ‘민족해방계’ 전반을 일컫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자주파’ 내지 ‘민족해방파(NL파)’는 민족통일의 달성과 같은 민족문제의 해결을 계급문제를 포함한 다른 모든 문제의 해결보다 우선시하고, 반제문제 등을 일차적으로 ‘민족해방’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좌파민족주의세력을 가리킨다”(김세균, 2008).

    자주파는 민족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운동가의 양심 때문에 운동에 나선 사람부터 소비에트 혁명과 달리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에 입각하여 반제통일전선론을 전략상의 개념으로 격상시켜 변혁적 임무를 수행하려는 급진적인 사람과 그룹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이들은 계급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문제의 해결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남북한의 화해-협력과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자유주의세력과의 연대나 진보대연합의 형성 등을 중시한다.”(김세균, 2008).

    자주파는 반자본주의적 급진주의(PD)에 대응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반제중심성으로부터 기인한 자주파의 대동단결론은 필연적으로 당(합/비합)보다는 전선 우위에 입각한 실천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반일운동의 전통을 가진 북한 지도부와 남북연대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북한 노동당의 남한 변혁운동에 대한 지도에 대해서는 주사파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주사파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주사파는 NL론에 있어서 이론과 사상의 관계, 지도사상의 문제를 가장 핵심적이라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NL주사, NL비주사의 입장에서 말하는 NLPDR론의 내용이 주사 NL의 NL론과 다름은 물론이고, NLPDR론 자체가 주사라는 지도사상과 분리시켜서는 사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NL의 입장에서는 주사적 관점에서 모든 이론이 전개되므로 지도사상은 NL론을 이해하는 데서의 근본문제이며, 따라서 주사가 아닌 비(非)주사(혹은), 반(反)주사 NL이란 있을 수 없다(정민 1987:257)

    1990년대 학생운동의 자주파는 자주계열과 혁신(사람사랑)계열로 분열되는데 여기서 자주계열은 자칭 타칭 ‘주사파’를 지칭하는 것으로 혁신은 현재적 의미의 자주파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민노당 내분 사태를 거치면서 자주파는 범 NL계열로 주사파는 김일성주의를 신봉하는 그룹으로 더 명확히 개념정의된 것으로 보인다.

    자주파의 존재는 특별히 북의 전일적 지도가 아닌 분단체제의 산물로서 한국사회에서 반제적 급진주의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굳은 믿음에도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어 있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과 독재정권의 민중수탈과 억압이 존재하는 한국의 현실은 남북연대를 우위에 두는 인식과 실천의 토양이 될 수 있었다.

    친북(親北)ㆍ연북(連北)ㆍ종북(從北)적 경향은 특별히 1980년대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해방정국에서도 있었고, 1960~70년대에도 미약하게나마 존재하였다. 해방정국에서의 종북주의는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45.10), 북로당(46.8), 조선노동당(49.6)내 주류인 김일성과 그 세력을 추종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1960년대에는 4.19 혁명 후 생겨났던 혁신정당 중 민자통(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회당 내부에도 “1949년 남북노동당 합당으로 당중앙이 평양에 있으므로 노동당 당적이 있는 사람이 또 다른 기본당을 만든다는 것은 일국일당주의에 위배”(김세원, 1993: 32; 손호철 2006 재인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등 친북(親北)적인 민족해방(NL)노선을 가지고 있었다(손호철, 2006: 30).

    1960년대 후반 통일혁명당(통혁당)은 종북(從北)적 노선을 대표한다. “통혁당은 김일성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한국사회를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규정하면서 민족적 독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조국통일을 주요 임무로 상정”하였다. 1970년대 후반 “지하당 전통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자생적인 민주화운동가들의 결합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은 신식민지 지배 하의 매판적 관료독점자본주의로 한국사회를 바라보면서 반제반파쇼투쟁을 위한 통일전선 구축을 당면과제로 설정하였다”(정기영ㆍ김윤철ㆍ최상구, 2003: 111).

    남민전은 민족혁명노선을 견지하였지만,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당시로써는 주체사상과 맑스-레닌주의 그리고 그 외 여러 사상 사이의 전체계적 논쟁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고, 관련자들이 주체사상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ㆍ평가하고 이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견지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구성원들의 견해도 다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반북(反北)이 아니라 지북(知北), 연북(連北)의 입장에 서서 북한의 사회와 사상, 이론을 알기 위한 노력과 단초적인 남북 통일전선사업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는 보다 적극적인 자주파(내지 주사파)가 형성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광주항쟁 이후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과 같은 사건은 반미저항이 시작되고 86년 이후 대중적 반미투쟁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들은 북한의 지도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북한에 대한 맹목적 추종주의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교조적 반미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자주적 반미주의(조대엽, 2007)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자주파(自主派)는 주사파와 일정한 갈등관계를 견지하고 있었음에도 운동진영 내부의 주요한 정치ㆍ조직적 방침 결정에 있어서 주사파와 협력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 이유는 주사파와 자주파가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반미ㆍ통일근본주의)과 통일전선론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필자소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 강의교수,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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